사이보그의 계급투쟁
기계전사109, 김준범
[그림 1] 김준범, 기계전사109, 2008년 네이버 웹툰 6회 연재분 중
■ 작품에 대하여 : 기계적 인간과 인간적 기계의 대립
1989년 신예 만화가 김준범은 <기계전사 109>라는 작품을 통해 할리우드 SF영화가 담아냈던 근미래사회의 불안과 80년대 한국사회의 계급투쟁에 대해 이야기한다. 고도로 발달된 근미래사회, 모든 일은 로봇이 하고 인간은 로봇을 관리하는 일에 매진한다. 그로부터 기계적 인간과 인간적 기계의 반목과 대립이 시작된다.
[그림 2] 김준범, 기계전사109, 2008년 네이버 웹툰 1회 연재분 중
경찰 로봇보다 뛰어난 전투능력을 지닌 ‘그리핀’의 특수대원 MX16은 가족과 휴가를 즐기던 중 사이보그 테러단체 ‘메탈브레인’의 공격을 받는다. 인질이 된 아들 건이를 구하기 위해 사이보그와 대치하는 중 아내 셰어가 사망한다. 하지만 이는 MX16의 관점일 뿐이다. 인간성을 지니고 있으나 ‘인간이 아닌 인간’으로 살고 있는 사이보그들은 인간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사이보그해방전선 메탈브레인’을 만들어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다. ‘로봇은 인간을 해치면 안 된다’는 소설가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공학 제1원칙을 지키고 있는 사이보그들은 절대 인간을 살해하지 않는다. 건이 역시 인질로 잡은 것이 아니라 안전하게 대피시키려 했으나 경찰의 강도 높은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함께 있었던 것. 셰어를 총격한 것도 사이보그해방전선의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인간과 사이보그를 구분하지 못하도록 만든 살상용 경찰 로봇이었다. 이성적 판단을 상실한 MX16은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사이보그에 대한 분노와 저주를 품게 된다.
아내를 잃고 실의에 빠진 MX16은 아들 건이를 위로하기 위해 마지못해 셰어와 동일한 외형의 사이보그를 만들어 가족처럼 생활한다. 하지만 인간과 사이보그라는 계급 간 분류와 차별이 명확한 이 사회는 위장된 가족의 행복을 곧 붕괴시킨다. 자신이 인간이 아닌 사이보그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 셰어는 거리에서 방황하던 중 미연고 사이보그로 몰려 폐기장으로 이송된다. 이때 메탈브레인에 의해 구출되면서 사이보그들과 공동체 생활을 하게 된다. 조직의 보스인 데이모스가 피살된 후 셰어는 ‘사이보그해방전선’의 여전사가 되어 인간과 싸운다.
[그림 3] 네이버 아이디 fenrirkgd 님의 팬아트, 기계전사109 중 여주인공 셰어
80년대 중후반 과학기술의 진보와 정보화시대로의 진입은 놀라운 기대감이기도 했지만 불확실한 것에 대한 불안감이기도 했다. 허리우드는 이 같은 테마를 사이버펑크라는 장르로 묶었고 과학기술 발전에 따른 사회적 병폐와 부조리, 계급 간 갈등 등을 필름느와르나 탐정소설 같은 형식으로 풀어내기도 했다. 이 때문에 <기계전사109>는 영화 <블레이드 런너>나 망가 <공각기동대> <애플시드> 등과 비교되기도 했고 한국형 사이버펑크물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 작품의 스토리를 담당한 노진수는 여러 매체를 통해 <기계전사109>가 ‘계급 간 갈등과 투쟁’을 담은 작품이라 말했고 다수의 평자들도 이에 동의하면서 SF코드로 그려진 ‘민중만화’로 분류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만화가 김준범의 이후 작품 활동이 ‘불안한 가족’에 맞춰져 있는 점을 들어 SF적 코드로 ‘정보화 시대에 해체된 가족’을 그린 ‘가족만화’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림 4] 김준범, 기계전사109, 2008년 네이버 웹툰 2회 연재분 중
[그림 5] 김준범, 기계전사109, 2008년 네이버 웹툰 11회 연재분 중
<기계전사109>는 1989년 12월 주간만화 잡지 [아이큐점프] 창간 1주년 기념호부터 연재를 시작했다. 연재가 끝나고 2년여가 지난 뒤인 1993년 전4권의 단행본으로 발행됐다. 1998년 만화가 박무직이 표지를 다시 그린 재간본이 발행됐고 2002년 <메탈브레인109>라는 제목으로 재편집본이 발행됐다. 2008년에는 포털사이트 네이버에서 원작에 컬러를 입혀 웹툰 형식으로 서비스됐다.
■ 작가에 대하여 : 점프챔프 세대의 신호탄을 쏜 김준범
[그림 6] 김준범
김준범은 1967년 2월 10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던 그는 중학교 졸업 후 진학을 하지 않고 서양화 복제 일 등을 하다가 1985년 허영만 문하로 만화계에 입문했다. 이후 박원빈, 하승남 문하를 거쳐 1989년 10월 정정란의 스토리를 받아 [월간만화]에 단편 ‘나를 부르는 소리’를 발표했고 그해 12월 노진수(1956~2010)의 스토리를 받아 첫 장편 데뷔작 <기계전사 109>를 발표한다. 스토리작가 노진수는 허영만과 <담배한개비> <2시간10분> <아스팔트사나이> 등의 작품을 함께 한 인기 스토리작가였다. 허영만이라는 인연이 있었다하더라도 김준범의 재능이 덜했다면 스토리를 받기 어려웠을 터이다.
[그림 7] 김준범의 단편, 장편 데뷔작 스토리를 쓴 정정란과 노진수 부부
(네이버 블로그 pilotfish 님의 포스트에서 발췌)
김준범은 <기계전사109>로 1994년 만화가협회가 지정한 신인만화가상을 수상했고, 한국의 대표작가 30인 중 한 사람으로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 초대되기도 했다. 다수의 만화평론가들이 이 작품을 한국만화사를 대표하는 걸작으로 손에 꼽으면서 과평가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고 과도한 기대 탓인지 메카닉 디자인과 캐릭터 묘사 등을 두고 표절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이후 김준범은 <부전자전> <따로따로형제> <필승아 놀자>와 같은 가족만화, <버그> <노는날> 등의 청소년만화, <아니타레바>(순정), <엑스타투>(SF), <시방새>(성인) 등으로 활동 영역을 확장해갔다. 직접 스토리를 쓰고 그림을 그린 다수의 작품들은 연재 당시 인기를 누리기도 했고 1인만화웹진, 선주문출판 등 기존 출판유통시스템으로부터 독립하고자 하는 실험적 시도들로 인해 마니아 독자층을 형성하기도 했지만 데뷔작격인 <기계전사 109>를 넘는 성과와 평가를 얻지는 못했다. 2002년 이후로는 만화창작 활동보다는 천문해설가로 명상만화를 기고하는가하면 별자리입문서(<별이 전하는 말>)를 출판하기도 했다. 현재는 개인홈페이지 코스모로드(www.cosmoroad.com)를 중심으로 별자리 강좌와 관련 집필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 명장면 명대사 : 그래서 너희 사이보그는 안 되는 거야
<기계전사 109>에서 스토리 부분을 빼고 나면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메카닉 디자인과 액션 장면연출이다. 총기류나 오토바이 디자인 등이 근미래사회라는 설정과 맞지 않다는 시비도 있었지만 그 같은 설정이 눈에 잡히지 않을 만큼 뛰어난 묘사력과 연출력이 돋보였다. 특히 폭파장면 묘사와 컷 연출의 역동성은 동영상이 흉내 낼 수 없는 극적 흥분을 전달하기에 충분했다.
[그림 8] 김준범, 기계전사109, 2008년 네이버 웹툰 20회 연재분 중
[그림 9] 김준범, 기계전사109, 2008년 네이버 웹툰 38회 연재분 중
하지만 무엇보다 <기계전사 109>의 명장면은 라스트씬에 있다. 불확실한 기억에 의한 판단으로 기계적 사고를 하는 남편과 정확한 기록을 바탕으로 인간적 감성을 지닌 아내가 아들을 사이에 두고 총부리를 겨눈다. 영화 <미스터&미세스 스미스>를 능가하는 지상 최대의 부부싸움이 펼쳐진다. 결정적 순간 남편은 방아쇠를 당기지만 기록에 지배된 아내는 남편의 프로포즈를 떠올린다. 남편 MX16은 이 작품에서 가장 반인간적인 모습으로 ‘그래서 너희 사이보그는 안 되는 거야!’라며 총격을 가한다. 인간인 남편은 아내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지만 사이보그인 아내는 남편에 대한 ‘기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결국 기억은 인간성을 버릴 수 있을 만큼 느슨한 것이지만 기록은 인간성을 지키도록 만드는 장치가 된 셈이다. 그래서 기억하고 추억하는 것보다 기록하고 재현할 수 있는 것이 더 인간적인 상황이 됐다.
참고자료
김준범, 기계전사109, 만화보기
http://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26434&seq=1&weekday=thu
박석환, 김준범 - <기계전사109>의 만화시기, <만화시비탕탕탕>, 1999
http://comicspam.com/140033849865
박석환, <코믹스만화의 세계>, 살림, 2005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985217
20년 만에 돌아온 기계전사 만화가 김준범, 민족21, 2008.11.01
http://www.minjog21.com/news/articleView.html?idxno=3482
박석환/ 만화평론가,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전략기획팀 부장
스포츠서울 신춘문예에 만화평론이 당선된 후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만화비평서 <만화시비탕탕탕>, <코믹스만화의 세계>가 있고 만화이론서 <디지털만화 비즈니스-잘가라 종이만화>, <만화리뷰쓰기> 등이 있다. 공저로는 <만화>, <한국의 만화가 1, 2> 등이 있다. 세종대학교 대학원 만화애니메이션학과 박사과정 중에 있다.
[후기] 1989년 만화가를 꿈꾸던 고교생이었던 나는 [아이큐점프] 창간에 흥분했고 <기계전사109>를 보며 환호했었다. 그의 만화를 읽고 그의 만화를 모사하면서 만화가가 되는 꿈을 꾸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어설픈 그림 실력을 탓하며 좌절하기도 했다. 나도 그처럼 만화가가 되기 위해서는 유명 만화가의 문하생 생활을 거쳐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고 강한 터치가 매력적이었던 박원빈 화실에 여름방학 중 위장취업(?)을 하기도 했었다. 지금 다시 보니 어설픈 구석도 많이 보이지만 <기계전사109>는 결코 과거의 작품은 아니었다. 작품 자체가 지닌 매력과 이야기의 힘은 여전했다.
글을 쓰면서 한동안 연락하지 못했던 김준범 작가에게 문자로 최근 사진을 보내달라고 했다. 여전히 동안인 사진을 보내줬는데 ... 좀 야위어보이기도 하고 그 때 그 시절의 사진이 더 의미가 있을 것 같아서 캐스트에는 옛날 사진을 보냈다. 글을 쓰면서 스토리를 담당했던 노진수작가가 고인이 됐다는 것을 알게 됐다. 또 노진수작가의 반려자인 정정란(황매출판사 대표)작가가 김준범작가의 데뷔작 스토리를 담당했었다는 것도 새롭게 알게됐다. 안타까운 일이고 진기한 인연이다.
>> 근대만화 10선을 연재하는 동안 별다른 덧글 반응이 없어서 내심 걱정했는데 소년만화 10선을 시작하니 전에 없이 유저들의 반응이 느껴진다. 글에 대한 답신이 있다는 것은 무척 즐거운 일이다.
>> 네이버에서 <기계전사109> 보기
http://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26434&seq=1&weekday=thu
글에 남긴 여러분의 의견은 개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