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환,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저녁(이명진 글그림), 한국만화정전, 네이버캐스트, 2012.12.04

소년들을 위한 성적 판타지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저녁, 이명진


[그림 1] 이명진,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저녁, 1992년 [소년챔프] 연재 개시


■ 작품에 대하여 : 고등학생 만화가가 그린 고등학생 주인공의 연애담


이명진의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저녁>(이하 <어쩐지 저녁>)은 만화잡지 [소년챔프]에 1992년 5월부터 1995년 2월까지 총 140회 동안 연재된 작품이다. [소년챔프]가 실시한 제1회 챔프신인만화대상 수상 작품으로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만화가 이명진의 데뷔작이자 100만부 판매 신화를 일군 밀리언셀러이다.


[그림 2] 이명진,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저녁, [소년챔프] 1주년 기념 일러스트

<어쩐지 저녁>은 지존고등학교의 캡틴이자 문제아로 낙인찍혀 북예고등학교로 전학 온 하숙생 남궁건과 하숙집 손녀딸 민승아의 알콩달콩한 연애담을 담은 학원 로맨스물이다. 우연하게 터지는 각종 사건들 속에서 남궁건은 민승아를 자신의 연인으로 설정한다. 하지만 민승아는 늘 새로운 여자와 만나고 있는, 원하든 원하지 않던 간에 만남을 지속하고 있는 남궁건을 신뢰할 수 없다. 두 사람의 엇갈린 감정과 상황은 하숙집인 ‘행운관’을 중심으로 하나로 엮여지기도 하지만 두 사람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는 둘의 ‘밀고 당기기’를 멈추게 하지 않는다.

하숙집 스토리는 70~80년대 학원만화의 단골 소재였다. 급격한 산업화→도시로의 인구집중→세계적으로 소문난 교육열→그리고 신천지에서 겪는 생경한 사건 사고가 곧 하숙집 스토리였고 그렇고 그런 학원만화의 뻔한 스토리라인이었다. 신예 만화가 이명진은 이처럼 케케묵은 ‘하숙집 소재’의 성장만화를 온전한 10대의 감수성으로 뒤바꿔 놨다. 불필요한 배경설명을 제거한 ‘하숙집’은 소년이 지닐 수 있는 혼자만의 방이었고 네트워크의 장이었으며 설익은 청춘의 충전소이자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공간이 됐다. ‘행운관’이라 명명된 하숙집 이름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주인공 남궁건과 또래 친구들에게 이 공간은 ‘행운’을 제공하는 곳이었다. 물론, 뜻하지 않은 행운이 발생하는 공간이 아니라 상상 속에서 꿈꾸고 갈망하던 것이 현실적으로 이뤄지는 공간이었다. 당대의 10대 독자들은 또래 만화가였던 이명진의 연애에 대한 갈망을 함께 공유했고 남궁건을 통해 그들에게도 ‘행운’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그림 3] 이명진,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저녁, 2권 표지, 남궁건과 머신

[그림 4] 이명진,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저녁, 6권 표지, 민승아와 남궁건

당시 소년만화에서 학생 주인공의 성적(性的) 판타지는 논의대상이 될 수 없었다. 꽉 끼는 청바지나 잘록한 치마를 입은 여성 캐릭터가 성인만화에나 등장하던 시절이었고 학생 독자들은 자신의 고민보다 더 진지한(?) 내용을 훔쳐보기 바빴다. 이명진은 자신의 고민이었을 수도 있는 소년들을 위한 성적 판타지를 그려냈다. 금발의 큰 눈과 앵두입술을 가진 소녀, 왕 가슴과 개미허리, 꽉 끼는 블라우스와 짧은 플레어스커트로 대표되는 세라복 차림의 소녀들을 등장시켰다. 불편해 보이는 옷차림의 소녀들에게 이명진은 수줍거나 활달한 성격을 줬고 작은 움직임 하나에도 커다란 의미를 부여해 클로즈업 시켰다. 당대의 기성만화가들이 표현하지 못했던 ‘소년의 감수성’은 그대로 소년 독자들의 것이 됐다. 이른바 일본에서 건너 온 미소녀 장르만화의 첫 번째 한국형 모델이 된 셈이다.

[소년챔프]를 발행하던 대원동화에서 전9권이 발행(1993년~1994년)됐고 대원씨아이에서 완전판이 재발행(2002년)됐다. TG엔터테인먼트에서 PC용 액션게임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1편은 2D로 제작되어 원작 만화의 스토리라인에 충실했고 2편은 3D로 제작됐다.


[그림 5]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저녁 PC 게임 장면

[그림 6]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저녁의 히로인 민승아


■ 작가에 대하여 : 고교 데뷔 후 밀리언셀러 기록한 만화스타 이명진


[그림 7] 이명진

이명진은 1974년 생으로 1992년 제1회 챔프신인만화대상을 받으며 데뷔했다. 수상 당시 고교 2학년이었고 수상작인 <어쩐지 저녁> 1회분을 장편으로 연재하면서 고교데뷔와 고교만화스타라는 두 가지 타이틀을 거머쥔다. 고교 3학년생 신분으로 대학 진학을 하지 않고 작품 활동에 집중하면서 당시 청소년들이 선망하는 아이콘이 되기도 했다.

이명진은 공모전 출신 만화가들의 등장을 촉진시켰고 소년만화잡지 시대의 기성 만화가들을 신인 만화가로 대체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같은 시기에 박상용, 손희준이 등장했고 이우영, 이재석, 홍연식 등이 이 공모전을 통해 데뷔했다. 군 입대와 함께 작품활동을 중단한 이명진은 제대 후 북유럽신화를 근간으로 한 판타지만화 <라그나로크>를 발표했지만 기대 이하라는 평가를 받았고 <어쩐지 저녁> 역시 ‘고3 만화가 지망생의 데뷔작 신화’로 평가 절하되기도 했다. 그러나 제작에 직접 참여한 동명의 온라인게임 ‘라그나로크’가 국내외에 호평을 받으면서 ‘역시 이명진’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최근 해외 시장을 타깃으로 한 신작 <Soul Grasper>를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 명장면 명대사 : 승아를 위해서라면 저깟 녀석쯤은 우주의 저편으로 날려 보내주지


[그림 8-1,2]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저녁의 엔딩과 또 다른 시작

이명진의 작화는 새로웠다. 굵은 G펜을 꾹꾹 눌러 그린 선화와 큼지막한 도트 톤, 거친 듯 장난스러운 효과음과 스피드가 느껴지는 동작선 등 이명진 만화에 담긴 모든 요소는 그가 기성의 만화로부터 자유롭다는 점을 강변했다. 그러나 이런 요소들은 일본망가스타일이라 쉽게 평가됐고 아마추어리즘으로 격하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명진 만화에 담긴 동시대적 감수성만은 그때나 지금이나 상처받지 않았다. 모든 소녀로부터 사랑 받는 주인공이지만 자신이 원하는 한 사람에게는 아직 사랑받지 못한 소년. 그 소년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서 ‘승아를 위해서라면 저깟 녀석쯤은 우주의 저편으로 날려 보내주지’라고 외친다. 실생활에서는 절대로 사용하지 못할 것 같은 용례지만 멋져 보이고 싶은 소년은 이 정도의 문어체에 더 이상 어색해 하지 않는다. 그것이 진짜가 아닌 판타지라는 것을 남궁건도 알고 독자도 알기 때문이다. 좀 조숙해 보이는 승아의 외형과 남궁건의 포옹도, 남궁건만 등장하면 육탄 돌격을 서슴지 않는 소녀들과 싸움꾼들도 결국 다 진짜가 아닌 소년들의 판타지일 뿐이다. 그 때의 소년들은 이 판타지의 힘으로 오늘을 산다.


참고자료

이명진,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저녁, 대원씨아이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279337

박석환만화연구소, 이 만화를 발견하다-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저녁

http://comicspam.com/140035632562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잡지만화 신세대작가시대, 경향신문, 1998.02.27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8022700329122005&edtNo=40&printCount=1&publishDate=1998-02-27&officeId=00032&pageNo=22&printNo=16367&publishType=00010


박석환/ 만화평론가,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전략기획팀 부장

스포츠서울 신춘문예에 만화평론이 당선된 후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만화비평서 <만화시비탕탕탕>, <코믹스만화의 세계>가 있고 만화이론서 <디지털만화 비즈니스-잘가라 종이만화>, <만화리뷰쓰기> 등이 있다. 공저로는 <만화>, <한국의 만화가 1, 2> 등이 있다. 세종대학교 대학원 만화애니메이션학과 박사과정 중에 있다.

블로그는 http://blog.naver.com/comicspam 이다.  


[후기]  아동청소년보호법 개정안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던 때. 그것을 동의할 어떤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는데 은근슬쩍 또 하나의 모호한 규정이 만들어 지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법이 모든 것을 좌우할 수 있는 세상의 경박함에 대해 논한 적이 있다. 그래서 법이 아니라 법과도 같은 사회적 질서와 동의가 필요한 부분이 있을거라 믿는다. 특히 시류에 따라 법을 손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르는 바 아니나 법을 변경하거나 적용하지 않고도 돌아가는 사회적 시스템이라는 것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근본적으로 발전한 사회라 생각한다. 그런 차원에서 이 작품은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 이 작품은 당시 우리 사회가 청소년용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범위와 요소들을 아슬아슬하게 지켜내며 유쾌하게 표현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작품 이후 우리 만화는 이전보다 더 높은 수위의 성적 표현물들을 만들어낸바 있다. 즉, 법이 있더라도, 개정되더라도, 또는 법이 없더라도 이런 작가와 작품은 매번 새롭게 등장할 것이고 이들은 그 동안의 표현물이 지닌 한계를 훌쩍 뛰어넘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것의 고민은 또 무용지물이 되어버린다. 그 같은 일을 반복한다는 것은 좀....  



이미지 맵

Parkseokhwan

만화평론가 박석환 홈페이지. 만화 이론과 비평, 웹툰 리뷰, 인터뷰, 보도자료 등 게재

    'Critique/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