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환, 만화요지경(이주홍 글그림), 한국만화정전, 네이버캐스트, 2012.11.22

일제 말기의 아이러니를 담아낸 신문만평

만화요지경, 이주홍


[그림 1] 이주홍, 만화요지경-거리의 비극, [동아일보], 1939.12.04.

■ 작품에 대하여 : 정치비평이 금지된 시절, 세상의 역설을 그려낸 신문만평


<만화 요지경>은 1939년 11월 30일부터 12월 30일까지 총 12회 연재된 [동아일보]의 신문만평이다. 잡지와 신문을 오가며 아동만화와 만문만화, 캐리커처 등의 분야에서 명성을 쌓았던 이주홍의 작품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신문만평은 당일의 정치사회적 이슈를 소재로 편집국의 의견이나 주장을 풍자적으로 담아낸 1칸 만화를 의미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조금 다른 모습이다. 형식상으로는 만평보다 글이 많고 만문만화보다는 글이 적은 중간 형태이고 내용상으로는 정치적인 사건‧사고가 아닌 일상의 상황들을 소재로 하고 있다. 문법적으로는 대부분의 작품이 아이러니를 담고 있다.

[그림 2] 이주홍, 만화요지경-문명의 도덕, [동아일보], 1939.11.30.

<요지경>이라는 제호로 시작된 첫 번째 작품 ‘문명의 도덕’ 편(1939.11.30.)은 말이 안 되는 모순된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회춘(回春) 약을 파는 사람이 죽었다. 지나가던 아낙은 깜짝 놀라고 작가는 ‘이 세상에 이런 일 하도 흔함이여’라고 부연 설명한다. 과장된 의약품 광고를 예로 들어 신문명의 모순과 부도덕성을 비판한 것이다. 제호를 <만화 요지경>이라고 바꾼 ‘거리의 비극’ 편(1939.12.04.)에서는 한 추녀가 ‘젊고 미인일 것’이라는 조건부 여배우 공개 모집에 자신이 ‘패스’될 것이라 믿고 결심하는 상황을 묘사했다. 영화라는 신문명이 불러온 외모지상주의와 주제파악 못하는 모던 걸의 아이러니한 욕망을 강조했다. ‘소탐대실’ 편(1939.12.26.)에서는 작은 이익을 얻으려다 큰돈을 읽었던 기억을 되살리면서 대합실 풍경과 소매치기 현장을 묘사한다. 도시화에 따른 병폐와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비판한 것으로 읽힌다.

[그림 3] 이주홍, 만화요지경-소탐대실, [동아일보], 1939.12.26.

이처럼 이주홍의 만평 <만화 요지경>은 모던한 시대에 펼쳐졌던 신문명의 아이러니를 당시 시대상에 비춰 한 꼭지씩 소개했다. 이는 일제의 지속적인 언론탄압과 검열, 정치비평이 금지 당했던 시절에 등장한 ‘절충형 사회비판 만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작가에 대하여 : 만화로 꽃피운 전천후 창작인 이주홍


[그림 4] 이주홍

향파 이주홍(1906~1987)은 경상남도 합천 출신으로 1918년 합천보통학교를 졸업했다. 광복 후 동래중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1949년부터 부산수산대학 교수로 있다가 1972년 정년 퇴임했다. 아동문학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시‧소설‧희곡‧평론‧수필‧번역 등 문학 전반에 걸쳐서 작품 활동을 했다. 연극‧영화는 물론이고 작사‧작곡, 잡지편집과 일러스트‧회화‧서예 등에도 능한 전천후 예술인이었다. 그의 고백에 의하면 ‘첨엔 음악가가 될 양으로, 바이올린을 구해 제법 무대에 나가서 연주를 했을 만큼 기초 공부를 닦았었다. 신문이나 잡지에 발표한 동요 작곡만도 적지 않았으니, 일시의 뜬 생각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다음엔 미술가가 되려고 그림에 전심했다. 뒤에 잡지를 편집하게 될 때,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서 나 혼자의 힘으로 컷이나 표지 따위를 그릴 수 있었던 것은 그 여택에서였다. 그러나 음악에나 미술에다 한평생을 붙인다는 것은 아무래도 맘에 미흡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주저앉은 것이 문학이었다.(이주홍, <천신과의 약속>, ’소년의 꿈‘ 중)’라고 했을 정도로 다방면의 재주와 실증적 활동이 있었다.


[그림 5] 이주홍, 작열의 홍백, [신동아], 1936.07.

이주홍은 1920년 단신으로 상경, 1924년 일본 각지를 전전했다. 1925년 동화 <뱀새끼의 무도>를 잡지 [신소년]에 발표했고 192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가난한 사랑>이 입선한다. 1929년 귀국한 이주홍은 [신소년]의 편집을 맡으면서 글은 물론이고 삽화와 디자인까지 전담한다. 만화가로서의 활동 역시 1929년 [동아일보] 독자투고 만화(1929.10.19.)로 시작된다. 일본에서 경험한 신문물과 창작욕이 결합되면서 다방면에 걸친 창작활동을 계획한 것으로 보인다.

동화와 소설로 등단했지만 1930년대 이주홍이 가장 집중했던 분야는 만화였다. 문단활동을 겸하기도 했지만 당시 이주홍은 가장 독창적인 형식의 작품 활동을 전개한 만화가였다. 주무대는 잡지 [별나라], [신동아] 등이었다. 1936년 [신동아] 7월호에 발표한 <작열의 홍백>은 지금 봐도 독특한 구성을 취한 걸작으로 만화와 영화를 결합했다는 의미에서 영문으로 ‘Manwhatoki’라고 표기한 것도 이색적이다. 만화가로서의 명성이 쌓이면서 이주홍은 자연스럽게 일간지 연재 만화가가 됐고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아쉬운 것은 1940년 [동아일보]가 일제에 의해 강제폐간 되면서 만화가 이주홍이 창작공간을 잃었다는 점이다. 더더욱 아쉬운 것은 1941년부터 1944년 사이 이주홍의 탁월한 재능이 조선금융조합연합회의 기관지인 [半島の光]에서 빛났다는 점이다. 이주홍은 이 잡지에 15칸으로 구성된 연재만화 <즐거운 박첨지>, 10칸으로 구성된 연재만화 <명랑한 김산일가> 등의 작품을 발표했고 그 내용은 일제의 사업에 동참할 것을 권하는 것이었다.


[그림 6] 이주홍, 즐거운 박첨지, [半島の光], 1941.04.

■ 명장면 명대사 : 우슴 날 건덕지가 잇어야 우슨 소리가 나오지 안소!


만화는 물론이고 문학이나 음악 등 이주홍의 창작 활동은 독학에 의한 것이었다. 영화분야에서 활동할 때를 제외하면 변변한 스승 하나 없었다. 그 때문에 한 분야에 정착하지 못한 측면도 있었고 그로인해 전방위적 창작활동이 가능했던 측면도 있었다. 무엇보다 스승이 없었던 그의 창작은 특별한 형(形)이 있다기보다는 여러 상황에 적합한 형을 스스로 창안하는 쪽으로 전개됐다.

[그림 7] 이주홍, 만화요지경-우슴 거리의 본부, [동아일보], 1939.12.21.

<만화 요지경> ‘우슴 거리의 본부’ 편(1939.12.21.)에서는 이주홍의 이 같은 애환이 드러난다. 가난한 만화가가 단칸방에서 만화를 그리다가 소재가 나오지 않자 아내에게 화를 내는 장면이다. 아내에게서 창작의 소재를 찾지만 결국 웃음 날 건덕지도 제공하지 못한 만화가는 외로운 창작을 지속해야 했다는 설정이다. 자신의 역할을 타인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그릇된 욕망을 희화화시킨 것으로 보이지만 창작의 원천이 다른 곳에 있지 않고 아내나 실생활에 있음을 강조한 것으로 읽힌다.



참고자료

손상익, 한국만화통사, 프레스빌, 1996

류종렬, 이주홍의 일제강점기 문학연구, 2004

펜 대신 붓 화가 이주홍을 만나다, 부산일보, 2012.05.17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82&aid=0000340640

오진원, 이주홍 연표의 비어있는 기간을 찾아서, 2012

http://www.childweb.co.kr/think13.htm

이주홍 문학관 홈페이지 http://www.leejuhong.com/


박석환/ 만화평론가,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전략기획팀 부장

스포츠서울 신춘문예에 만화평론이 당선된 후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만화비평서 <만화시비탕탕탕>, <코믹스만화의 세계>가 있고 만화이론서 <디지털만화 비즈니스-잘가라 종이만화>, <만화리뷰쓰기> 등이 있다. 공저로는 <만화>, <한국의 만화가 1, 2> 등이 있다. 세종대학교 대학원 만화애니메이션학과 박사과정 중에 있다.


[후기] 근대만화 10선에 대한 정리작으로 이주홍의 <만화요지경>을 선정했다. 기실 이주홍은 만화가였다는 부분을 부각하지 않는 분이기도 해서 다른 작가의 작품을 소개할까도 했지만 당시 가장 주목받았던 작가 중 1인이었고 그의 작품에 대한 독창적 표현의지 등을 당시의 다른 분에게서 찾을 수 없어서 최종 이 작품으로 낙점했다.

당시 만화계는 신문과 잡지를 중심으로 형성되었지만 신문이 총독부에 의해 강한 검열을 받고 있던 터라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잡지 쪽에서 다양한 성향의 작품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주홍 역시 잡지를 통해서 만화를 비롯한 다양한 창작활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신문의 영향력은 여전했고 특히 만화 분야에 있어서 동아일보의 역할은  대단했다.

만화요지경 이후 한동안 신문에서 만화는 자취를 감췄고 얼마지나지 않아 동아일보는 총독부의 명에 의거 폐간호를 발행하기도 했다.

기실 이 시기 이후로 만화가들의 친일행적이 진행됐다.

직전까지 만화가들은 당대의 부조리를 강도높게 비판했다. 그것이 업이었고 사명이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가 길어지고 일제의 폐망이 다가오기 시작하면서 일제의 억압은 수위를 더 높여갔으나 일반적인 대중들의 경우에는 각기 다른 경험론적 현실을 인식하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즉, 어떤 사람은 일제를 자연스럽게 받아드리는 상황이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더욱 강하게 저항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생활과 무관해보이는 정치적 입장을 지니지 않으려 했을지 모른다.

그 같은 상황 하에서 당대의 유명만화가들은 발간이 지속되는 총독부 관련 매체에 원고를 기고하기 시작했다.

아주 당연스럽게 매체의 편집자는 만화가들에게 특정한 소재나 내용을 요구했을 것이고

만화가들은 이를 적극적으로 부정하거나 이전 시대의 그것처럼 저항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 역사는 당시 만화가들이 남긴 작은 흔적들을 찾게 된다.

일부 작품의 내용이 친일적이라는 이유로, 특정 시기의 제한 된 작품활동이 그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고해서

작가의 창작활동이나 삶 전체가 정리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단, 그 같은 상황이 있었고 그 같은 작품이 있었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기록하고 평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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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환(만화평론가, 한국영상대 만화콘텐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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