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남의 탐험기, 최영수
아동을 위한 신문 연재만화
[그림 1] <복남의 탐험기> 1회, 아프리카 편, [동아일보], 1932.04.01.
■ 작품에 대하여 : 신문을 성인의 것에서 가족의 것으로 전환시킨 아동만화
<복남의 탐험기>는 1932년 4월 1일부터 4월 11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된 눈목(目)자형 4칸 만화이다. 매일 4칸씩 10일간 연재됐고 각 칸마다 연번이 달려있다. 즉, 4칸으로 한 회분의 에피소드가 끝나는 형식이 아니라 총 40칸, 1번부터 40번까지의 이야기가 연결되어 있다. 어린 소년 ‘복남’이가 ‘잣내비’와 함께 아프리카로 탐험을 떠나서 경험한 이야기가 주 내용이다. 배를 타고 긴 항해 끝에 아프리카에 도착한 복남과 잣내비는 한 무리의 흑인이 화살을 쏘며 위협하자 총으로 흑인들을 굴복시켜 부하로 삼고 짐승 사냥을 나간다. 그러나 잣내비가 흑인들에게 납치되고 복남이는 이를 구하기 위해 나섰다가 호랑이에게 쫓겨 고래에게 잡아먹힌다. 고래 뱃속에서 염통을 터트리고 빠져나온 복남이는 잣내비와 함께 아라비아 사막으로 떠난다. 마지막 장면은 다음 시리즈를 예고하는 듯 끝났으나 후속 시리즈가 발표되지는 않았다. ‘총’과 ‘화살’로 상징되는 개화인(開化人)과 미개인 간의 충돌, 개화인의 무력지배를 정당화하는 이야기 구성은 지금의 시각으로 본다면 일제의 무력통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림 2] <복남의 탐험기> 3회, 아프리카 편, [동아일보], 1932.04.03.
[그림 3] <복남의 탐험기> 4회, 아프리카 편, [동아일보], 1932.04.03.
이 작품은 최영수의 데뷔작으로 추정된다. 갓 유학을 다녀온 21살 무렵의 작가가 그린 소품에 불과하고 내용적으로나 형식적으로 볼 때 별다른 특이점을 찾기 어렵다. 작화 수준 역시 당대의 작품들에 비해서 부족한 측면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여러 만화역사서나 선행연구에서 당대의 대표작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 작품이 신문지면에 정기적으로 연재됐고 어린이 만화였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고평가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아동만화는 <다음엇지>([붉은 저고리], 1913.1.)를 출발로 안석주의 <씨동이의 말타기>([어린이], 1925.3.), 박석천‧남궁낭의 <그림동화 여섯동무>([동아일보], 1930.9.16.), 마균의 <신동이의 모험>([동아일보], 1931.8.14.~1932.3.19.) 등 <복남의 탐험기> 이전에도 다수 있었다. 그러나 신문이 아동만화에 집중하기 시작한 것은 이 작품 이후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림 4] 박석천, 남궁낭, <그림동화 여섯동무> [동아일보], 1930.09.21.
[그림 5] 마균, <신동이의 모험> [동아일보], 1932.02.03.
<복남의 탐험기> 이후로 성인을 대상으로 했던 신문이 ‘아동’ 또는 아동의 볼거리와 교육을 관장하는 ‘어머니’ 독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는 [동아일보]와 경쟁 관계에 있었던 [조선일보]의 변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일보]는 윤석중(아동문학가와 동명이인임)의 <영화만화 숨박국질>(1928. 4.25~26, 연번이 들어간 4칸 만화 2회 게재)을 발표한바 있지만 이후로는 전혀 ‘아동만화’를 게재하지 않았다. 반면 이 작품의 등장이후 [조선일보]는 권구현의 <풋ㅽㅗㄹ선수>(1933.8.1.), 이주홍의 <똑똑이의 설노리>(1934.1.9.), 김상욱의 <돌보와 믹키>(1935.10.03.) 등 흥미로운 작품을 쏟아냈다. 아동문학가로도 활동했던 이주홍은 정규 미술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특유의 스토리텔링 능력과 연출력으로 대중을 사로잡았고 김상욱은 당시 미국에서 유행하던 ‘미키마우스’를 한복 입은 돌보와 함께 등장시킨 작품으로 시선을 모았다. 이로 인해 ‘최초의 캐릭터 무단도용 만화’라는 불명예를 지니게 됐지만 깔끔한 그림체와 재기 넘치는 아이디어를 보여줬다. 이처럼 최영수와 <복남의 탐험기>가 등장하면서 신문은 성인들을 위한 매체에서 아동을 포괄하는 가족 매체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급기야 1936년부터는 [조선일보] 내에 ‘소년조선일보’면이 생겼고 1937년부터는 별쇄로 발행됐다. 성인을 대상으로 출발했던 신문과 성인을 위했던 만화가 아동의 것으로 용도를 확장하는 순간이다.
[그림 6] 김상욱, <돌보와 믹키> [동아일보], 1935.10.03.
■ 작가에 대하여 : 그림보다 글이 앞섰던 만문만화가 최영수
[그림 7] 최영수, <전억망일대기> [동아일보], 1933.10.02.
일송 최영수(1911~1950 추정) 경기도 안성 출신으로 일본의 가와바다 미술학교(川端美術學校)에서 공부했다. 1933년 6월 [신동아]에 입사해서 1935년 12월 퇴사하기까지 자매지인 [동아일보] [신가정] 등에 만화와 만문, 삽화 등을 그렸다. 다양한 유형의 만화비평을 쓰기도 했고 만화연구소를 설립하여 후학을 양성했다는 기록도 있다. 최영수의 만화론은 지금도 유효하다. ‘조선 만화계를 논함’([신동아], 1938.3)이라는 글에서 만화는 ‘인생의 피로한 신경을 위로하는 능력’을 가져야 하며 ‘민중의 요구에 만족’을 주는 것이어야 하고 만화가는 ‘전 인격적으로 인생관을 초월하여 지도, 애린에 넘치는 고급적 사회비평가여야 할 것이요, 그 자체가 연마된 종교가 내지 사상가’여야 한다며 그 이유로 만화가 ‘민중예술의 하나’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림 8] 최영수, <전억망일대기> [동아일보], 1933.10.02.
만화가로 활동한 것은 10여 년 남짓에 불과하지만 ‘동아’의 여러 매체를 중심으로 보여준 최영수의 활약은 30년대를 대표하는 것으로 20년대를 대표했던 안석주에 비견된다. 아동만화로 출발해서 성인을 위한 4칸 생활만화를 그렷다. 1933년 소시민의 얄굳은 삶을 묘사한 <전억망 일대기>, 1933년에는 <얼간선생>, 1938년에는 <뚱딴지>를 발표했다. 만문만화에서도 일가를 이루어 <봄이 쓰는 만문, 봄이 그리는 만화>(1933), <금강산 만화행각>(1934년), <추광곡>(1935) 등을 발표했다. [신가정]을 통해 발표한 상당수의 작품이 여성을 주인공으로 했거나 서정적인 만문만화여서 최초의 순정만화가로 불리기도 한다.
[그림 9] 최영수, <춘광점묘> [동아일보], 1934.04.06.
흥미로운 것은 1928년 안석주가 ‘동아’에서 ‘조선’으로 자리를 옮긴 후 최영수가 등장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조선’과 ‘동아’의 만화라이벌전은 노수현 대 안석주에서 다시 안석주 대 최영수로 이어졌다. 첫 번째 라이벌전이 4칸 생활만화(멍텅구리 대 허풍선이) 장르였다면 두 번째 라이벌전은 아동만화와 만문만화 장르였다. 그러나 ‘조선’과 ‘동아’의 라이벌전은 40년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일제의 식민 정책이 문화통치에서 민족말살통치로 바뀌면서 탄압이 거세지기도 했거니와 대다수의 정기간행물이 강제 폐간되어 총독부 기관지나 친일매체 외에는 작품을 게재할 매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것은 10년 터울의 선후배 관계였을 두 사람이 1950년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났다는 점이다. 해방 후 안석주는 친일 영화인으로, 한국전쟁 시 납북된 최영수는 한동안 월북 언론인으로 분류됐다. 조선의 근대만화를 주도했던 천재 만화가의 삶치고는 서글픈 대목이다.
■ 주목할 사항 : 당시 만화가의 원고료는 얼마
최영수는 여러 비평 글을 통해 만화론을 전파하고 만화가의 역할과 책임을 강조했고 권익을 옹호하기 위한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이를 위해 ‘만화가의 집단적 형성’ ‘만화선전의 필요성’ ‘새로운 표현 양식의 개발’ 등을 주장했다. 이 같은 배경 하에서 최영수는 김규택 임동은 정현웅 등과 함께 만화가 모임인 ‘소묵회’를 결성한다. 이는 1925년 안석주가 세운 ‘조선만화가구락부’에 이은 만화가 모임이다. 소묵회와 관련해서는 1949년 9월 3일자 [경향신문]에 ‘화료인상’에 대한 단신 기사가 게재됐다. 만화가들 간에 원고료의 가격 기준을 제시한 것으로 그 때나 지금이나 원고료는 작가와 매체 간, 작가들 간의 갈등 요인이었던 것 같다. 재미있는 것은 작품의 형식별로 가격을 고정 시켰다는 점이다. 삽화의 경우 일간신문은 1매 700원, 월간급 단행본은 1매 1천원, 시사만화는 1매 3천원, 연속만화 1혈(1페이지)은 4천원, 컷 1매 500원, 장정 5천원 이상이다. 당시 담배 한 갑 가격이 3원이었다. 작가나 작품의 가치와 무관하게 일률적으로 가격을 정한 것은 얼핏 공정해 보이지만 우수한 작가에게 청탁이 몰리고 다작을 해야 함으로 작품의 질이 하향평준화 되는 구조가 된다.
■ 명장면 명대사 : 어대로 가야 오른지 올치 인제 알엇다.
최영수의 작품은 그의 명성에 비해 전반적으로 데생의 완성도가 높지는 않다. 초기작인 <복남의 탐험기>는 더욱 그래서 자칫 초보자가 그린 것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렇지만 컷 안의 구도나 캐릭터의 자유로운 변형, 만화적 기호와 음영의 적극적 활용, 보조 설명수단으로서의 컷 구성 등은 작품의 역동성과 흥미도를 높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중 마지막편인 1932년 4월 11일자 두 번째 컷이 주목된다.
[그림 10] 최영수
한동안 헤어졌던 잣내비와 다시 만나게 된 복남이는 산꼭대기에 올라가 ‘어대로 가야 오른지 올치 인제 알엇다’라고 외친다. 길 위에 있으면 길을 찾을 수 없고 높은 곳에서 멀리 내다봐야 길이 보인다는 평범한 진리를 전하는 대목이다.
참고자료
손상익, 한국만화통사, 프레스빌, 1996
최영수, 나의 만화생활 자서, 백민, 1948년 1월 호
http://blog.hani.co.kr/dong5797/
동네, 동아일보를 빛낸 당대의 화백들(4)
http://dongne.donga.com/2011/10/28/d-story-121-%EB%8F%99%EC%95%84%EC%9D%BC%EB%B3%B4%EB%A5%BC-%EB%B9%9B%EB%82%B8-%EB%8B%B9%EB%8C%80%EC%9D%98-%ED%99%94%EB%B0%B1%EB%93%A44-%EC%B5%9C%EC%98%81%EC%88%98-%EC%9D%B4%EB%A7%88%EB%8F%99/
박석환/ 만화평론가,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전략기획팀 부장
스포츠서울 신춘문예에 만화평론이 당선된 후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만화비평서 <만화시비탕탕탕>, <코믹스만화의 세계>가 있고 만화이론서 <디지털만화 비즈니스-잘가라 종이만화>, <만화리뷰쓰기> 등이 있다. 공저로는 <만화>, <한국의 만화가 1, 2> 등이 있다. 세종대학교 대학원 만화애니메이션학과 박사과정 중에 있다.
[후기] 한 주에 두번씩 연재되는 터라 한 번에 두회차씩 마감을 해주거나 쿨하게 한 5회분씩 탁탁 쏴줘야하는데 일상이 또 그리 만만치 않은터라. 퇴근 후 밥먹고, 또는 밥먹고 퇴근후 좀 이른 취침 후에 새벽에 일어나서 원고를 쓰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10여년 넘게 원고 쓰는 생활을 해왔지만 여전히 준비운동에 시간이 많이 걸리고 '필'이 충만해져야 타자가 빨라지는 터라 '새벽 글쓰기'가 실패로 끝나는 일도 더러 있습니다. 이번 원고가 그런 사례 중 대표급이 되겠습니다. 그래도 펑크는 왠만해서는 없었는데... 마감일 아침이 와도 새벽 글쓰기는 끝나지 않고... 해외 출장 비행기 시간은 다가오고... 얼추 털어버리고 싶은 욕구도 있었지만 그래도 막 던질수는 없는 일. 결국 귀국 후 마감하게 됐습니다.
20년 대의 안석주, 30년 대의 최영수가 조선의 만화천재였다는 것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일.
두 천재의 만문만화가 또 백미지만 이 원고는 한국만화사의 대표 작품을 중심으로 하는 만큼 일회성 원고보다는 연재만화 작품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두 천재의 작품 중 만화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작품을 고르느라 한 참을 고민했습니다.
안석주의 허풍선이 시리즈는 당대 신문만화의 형식을 확대 제시한 것으로 했고
최영수의 복남의 탐험기는 당대 신문만화의 소재적 다양성을 확립한 것으로 했습니다.
물론, 두 천재의 작품 활동은 그 안에서만 머무르지 않아서... 나중에 어떻게 더 해봐야 할 듯.
글에 남긴 여러분의 의견은 개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