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환, 멍텅구리 헛물켜기, 노수현, 1924 [한국만화정전5], 2012.10.31

[후기] 멍텅구리 시리즈는 퍽 촌스러운 것 같지만 지금도 통용될 법한 전형적 인물구성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얼마전부터 문화계 전반에 퍼지기 시작한 '모던경성'에 대한 분위기도 느낄 수 있다. 조선일보가 신문 데이터베이스 서비스를 적극적으로 안하고 있는 탓에 작품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빨리 디비를 공개했으면... 

그리고 '생각하는 동안에 사람 다 죽겠는데'라는 소제목은 글을 쓸 당시 안철수 후보가 낸 책이 화제가 되면서 달았던 것인데... 원고 공개가 늦게 되다보니 큰 의미를 담아서 해적되지는 못한 것 같다.

한 블로그 이웃님께서는 눈치를 채기도 한 듯^^

**네이버캐스트 게재 원문 보기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196&contents_id=14819&leafId=196


[한국만화정전 – 005]

멍텅구리 헛물켜기, 노수현

철저하게 기획개발 된 최초의 캐릭터만화


[그림 1] ‘우습고 자미있는 그림리야기’로 소개된 <멍텅구리 헛물켜기>, [조선일보], 1924.10.13

■ 작품에 대하여 : 한국 최초의 연재만화, 위기에 빠진 [조선일보]를 구하다

<멍텅구리 헛물켜기>는 1924년 10월 13일부터 1926년 5월 30일 까지 [조선일보]에 게재된 작품이다. 얼굴은 못나고 키만 커서 싱거워 보이지만 경성의 재산가로 여자를 좋아하는 최멍텅과 미모의 기생 신옥매 그리고 둘 사이를 농락하는 윤바람을 주인공으로 한 로맨틱 코미디물이다. 기생에 홀려 전차에 부딪치고 유리에 얼굴을 박으면서도 멍청하게 한 여자만을 갈망하는 최멍텅과 이를 절묘하게 이용하는 ‘밀당’의 원조 신옥매 이야기는 일제의 강압정치에 힘겨워하던 대중을 위로했다.

이 작품은 만화사적으로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최초의 신문 연재만화이고 캐릭터 중심의 오락만화이자 여러 명의 참여로 제작된 최초의 기획개발 작품이다. ‘헛물켜기’편이 48회분으로 끝나고 ‘련애생활(140회)’ ‘자작자급(84회)’ ‘가뎡생활(70회)’ ‘세계일주(103회)’ 등이 매일 1회분씩 시리즈로 연재되어 ‘멍텅구리 시리즈’가 완성됐다. 선풍적인 인기에 힘입어 영화로 제작된 최초의 만화원작이기도 하다. 진기한 기록이 많은 만큼 탄생 배경도 흥미롭다.

[그림 2] 이필우 감독, 반도키네마사 제작해 조선극장에서 상영된 영화 <멍텅구리>(1926), 한국영상자료원 사진자료


1920년 3월 5일 창간한 [조선일보]는 반일(反日)적 논조로 4차례 정간되고, 일본의 훼방으로 경영난에 빠져 있었다. 이를 임시정부에서 교통총장을 지낸 신석우가 인수하여 당시 민족의 지도자로 추앙받던 이상재를 사장으로 추대했다. 이상재는 서재필과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만민공동회를 개최한 인물이다. 여기에 [시대일보] 논설위원을 지낸 안재홍과 [동아일보] 편집국장이었던 이상협이 이사로, 만화 등을 담당했던 김동성이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합류하면서 경영과 지면 혁신이 단행됐다. 미국에서 만화를 공부하고 온 김동성이 캐릭터 중심의 오락만화 <멍텅구리 헛물켜기>를 기획했고 소설가로서 활동한바 있는 이상협과 안재홍이 스토리를 썼다. 그리고 동양화가 안중식, 조석진에게 전통 화법을 이수 받고 서화협회의 정회원으로 화단 활동을 하던 노수현이 그림을 맡았다. [조선일보]를 살리기 위해 당대 최고의 드림팀이 구성됐고 그들의 첫 번째 프로젝트는 대성공을 거둔다.

연재를 알리는 사고(社告)에서도 자신감이 가득했다. ‘우습고 자미있는 그림리야기’라는 부제 하에 서양에서도 그림이야기가 시작 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독자들이 좋아하여 신문의 가장 중요한 위치에 게재하고 일본에서도 신문사 사이에 그림이야기가 유행이라고 설명하면서 독자들이 신문을 들 때마다 웃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만큼 흥미를 드릴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림 3] 옥매를 보러갔다가 헛물켜는 최멍텅, ‘어이쿠’라는 대사를 유행어처럼 반복한다. <멍텅구리 헛물켜기>, [조선일보], 1924.10.14

[그림 4] 옥매를 보고 싶은 마음에 거울로 뛰어드는 최멍텅, 부딪힐 때마다 별이 번쩍인다. <멍텅구리 헛물켜기>, [조선일보], 1924.10.15


<멍텅구리 헛물켜기>는 당시 미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조지 맥머너스(George McManus)의 만화 <브링 업 파더(Bringing Up Father, 주인공 이름을 따서 ‘매기와 지그스’로 알려짐)>에서 힌트를 얻어서 창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 언론 사정에 밝았던 김동성이 당대 세계 만화의 트랜드를 읽고 도입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전의 만화적 표현물이 보여줬던 평면적인 구도에서 벗어나 전철을 배경으로 한 1회분부터 원근법을 적용하고 의태어적 표현기호로 ‘별’을 사용하는 등 획기적 시도가 돋보인다. 재미있는 것은 조지 맥머너스의 작품이 1924년 3월 31일 창간한 [시대일보]에 <엉석바지>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바 있다는 점이다. [시대일보]는 ‘한국 최초의 만화편집자’라고 할 수 있는 최남선이 시사잡지 [동명]의 제호를 바꾸어 창간한 일간신문이다. 우리 만화 초창기의 두 천재가 선택한 맥머너스의 만화 스타일에 국내 독자들도 공감을 표한 것이다. <멍텅구리> 시리즈가 인기를 끌면서 이후 비슷한 형식의 작품들이 각종 신문에 게재됐다. [동아일보]도 이 시기부터 김동성이 일군 밭 전(田)자형 4칸만화를 버리고 눈 목(目)자형 4칸만화의 형식을 도입했고 안석주의 ‘허풍선이’ ‘엉터리’ 등 캐릭터 중심 만화로 맞불을 놓았다.

[그림 5] 김동성이 <멍텅구리>시리즈를 기획할 때 참고한 것으로 알려진 <브링 업 파더>, 인물의 상태를 표시하는 기호로 별이 자주 등장한다. 조지 맥머너스, 1925

[그림 6] 최남선이 <엉석바지>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처음 소개한 조지 맥머너스의 작품. [시대일보], 1924.03.31.


■ 작가에 대하여 : 근대만화의 계보를 잇는 엘리트에서 최초의 스타만화가가 된 노수현

심산 노수현(1899~1978)은 황해도 곡산 출신으로 서화미술회강습소 화과(畵科)에서 이상범(1897~1972), 이용우, 변관식 등과 함께 수학했다. ‘최초의 만화가’ 이도영의 스승이자 동양화의 대가였던 심전 안중식의 수제자로 노수현이 아호 중 심(心)자를 받고 청전 이상범은 전(田)자를 물려받았을 정도로 화단에서 촉망 받는 신예였다. 1920년 [동아일보] 창간호에 이도영과 함께 축화를 게재하기도 했고 1922년에는 같은 신문에 고희동 화백이 그리던 연재소설 <무쇠탈>(알렉상드르 뒤마의 <철가면>을 번안한 작품)을 대신 그리기도 했다. 이 인연으로 1923년 6월 [동아일보]에 ‘기자’로 입사해 ‘최초의 만화기획자’였던 김동성과 연을 맺고 삽화를 전담하게 된다.

이 시기 [동아일보]는 기자였던 이광수의 ‘민족적 경륜’이라는 친일성 논설과 친일폭력조직인 박춘금의 협박(일명 식도원 사건) 등으로 혼란스러웠다. 두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이사진의 퇴진을 요구했던 이상협 편집국장과 김동성(당시 조사부장) 등이 퇴사하고 [조선일보]로 자리를 옮겼다. 노수현도 이들과 함께 이른바 ‘혁신 조선일보’에 동참했다. 이로 인해 ‘최초의 신문연재만화’이자 대중문화콘텐츠라고 할 수 있는 <멍텅구리 헛물켜기>가 탄생한다.

일제 말기에는 친일매체에 ‘운전이라도 배워서 전쟁에 나가 나라를 도와야한다’는 취지로 <멍텅구리-운전수편>을 발표했다. 광복 후로는 서울대 미대에서 후진을 양성하며 화단 활동에 전념 했다. 동양화가로서 노수현은 전통회화의 시대적 변혁을 도모했고 관념적 산수화법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초기에는 자연경을 표현하는데 집중했으나 후기로 갈수록 이상화된 산수경을 구현했다. 동양화 6대가의 한 사람으로 꼽히고 대한민국예술원 회원(1957년 선출)으로 은관문화훈장(1974년)을 수훈했다. 20~30년대 신문삽화와 만화를 그렸던 동료 이상범이 먼저 예술원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나 만화 관련 이력을 표기하지 않은 반면 노수현은 <멍텅구리>를 주요 이력으로 명기하고 있다. 만화가 출신으로는 현재까지도 유일한 예술원 회원이다.

[그림 7] 노수현 사진

[그림 8] 일제 말기에 친일 잡지 [신시대]에 게재된 노수현의 <멍텅구리-운전수 편>, 1941.1.1


■ 주목할 만한 캐릭터와 명대사 : 일편단심 짝사랑남과 연인 그리고 나쁜 친구

<멍텅구리> 시리즈에는 세 명의 메인 캐릭터가 등장한다. 세 인물은 상호적 갈등관계 하에서 이야기를 이끌어 낸다. 주인공 최멍텅을 중심으로 외사랑 대상인 신옥매에 대한 갈망이 이야기 전개의 골격이고 최멍텅과 친구사이인 윤바람과의 갈등이 이야기의 골간을 이룬다.


1) 최멍텅

경성 제일의 재산가이지만 이름처럼 우둔해서 아름다운 여인에게 곧잘 홀린다. 당시 모던보이의 필수 아이템인 실크햇과 연미복, 지팡이로 멋을 냈다. ‘키가 크면 싱겁다’는 속설은 당시에도 있었을 터. 큰 키는 겉모습만 어른이지 생각이 깊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설정이다. 성씨를 ‘최씨’로 한 것도 재밌다. 마음씩 착한 부자의 상징인 ‘최부자’가 떠오른다.


2) 윤바람

부자집 아들 최멍텅의 친구이다. 최멍텅과 정확하게 대조를 이루는 캐릭터성을 지니고 있다. 키가 작고 영민한데다 이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바람둥이에 바람잡이다. 신문물과 연애에 능한 ‘척’하며 부자 친구를 골탕 먹이는 것을 즐긴다.


3) 신옥매

전통적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조선기생이다. 최멍텅의 관심과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지만 모른 척 내숭을 떤다. 옥매가 모른척하면 할수록 멍텅의 ‘헛물켜기’ 수위는 높아진다. 영화로 제작됐을 때 옥매 역은 김소진이라는 신예 여배우가 맡았다. 신극 사상 최초의 여배우이다.

<멍텅구리> 시리즈를 근대만화의 걸작으로 만든 것 중 하나는 재미있는 대사와 색다른 표현기호이다. 최멍텅이 헛물을 켤 때마다 ‘어이쿠’라는 대사가 마치 변사의 추임새처럼 반복적으로 사용된다. 의도한 것이 명확해 보이는 이 대사는 최멍텅의 상징으로 독자들 사이에서 꽤나 유행했을 법하다.

‘생각이 다 무엇이야 생각하는 동안에 사람 다 죽겠는데’

최멍텅이 윤바람에게 신옥매를 한번 만나게 해달라고 애원하며 던진 이 대사는 멍텅의 마음을 단적으로 전달하는 한편,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들의 단초를 제공한다. 될 듯 말 듯 바람만 잡는 윤바람, 아는 듯 모르는 듯 모습만 드러내는 옥매, 그 사이에서 자신의 마음을 보이지 못한 채 안절부절인 최멍텅의 상황이 절절하다.

사랑 때문에 죽을 것만 같은 멍텅이 헛물을 켤 때마다 머리 위로 별이 뜬다. 만화에서 별은 어딘가 부딪혀서 머리가 아플 때나 어지럼증이 날 때를 강조하기 위한 표현으로 자주 쓰인다. 조지 맥머너스의 <브링 업 파더>에도 자주 등장하는데 이를 도입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자료

‘멍텅구리’에 대하여, 네이버지식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45699&mobile&categoryId=1642

‘노수현’에 대하여, 국립현대미술관 저, 얼과알, 2000.04.04.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87428

영화 ‘멍텅구리’에 대하여,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http://www.kmdb.or.kr/movie/md_basic.asp?nation=K&p_dataid=00029&keyword=멍텅구리

‘브링업파더(Bringing Up Father)’에 대하여, 위키피디아

http://en.wikipedia.org/wiki/Bringing_Up_Father

‘친일미술’에 대하여, 오마이뉴스, 2004.09.06.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47&aid=0000050120

박석환/ 만화평론가,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전략기획팀 부장

세종대학교 대학원 만화애니메이션학과 박사과정에 있고 스포츠서울 신춘문예에 만화평론이 당선된 후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만화비평서 <만화시비탕탕탕>, <코믹스만화의 세계>가 있고 만화이론서 <디지털만화 비즈니스-잘가라 종이만화>, <만화리뷰쓰기> 등이 있다. 공저로는 <만화>, <한국의 만화가 1, 2> 등이 있다.

블로그는 http://blog.naver.com/comicspam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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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환(만화평론가, 한국영상대 만화콘텐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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