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주)컨텐츠와이드의 이동훈 대표가 별세했습니다.
형을 처음 만난 것은 '미스터블루'라는 만화잡지를 통해서였습니다.
1993년 쯤 되는 것 같습니다.
'미스터블루'는 일본만화가 판을 치던 시절, '순' 한국만화만 연재한 성인용 만화 잡지였습니다.
이현세, 허영만 선생님이 투톱으로 나서 다수의 걸작을 발표했고,
양영순 강성수(강도하) 윤태호 등 신예 작가들이 대중적 인기를 얻기도 한 곳입니다.
형은 이곳에서 편집팀장으로 일했습니다.
잡지 구석구석에서 만났던 이름을 다시 보게 된 것은
만화평론가 손상익 선생님이 집필한 '한국만화통사' 서문을 통해서였습니다.
책의 내용 중 일부가 '미스터블루'에 연재됐었고 형이 담당 했던 모양입니다.
그 인연으로 '한국만화통사편찬위원회'에서 손 선생님을 도왔고
관계자 인터뷰, 자료수집, 기초 집필 등의 부분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서문에는 형을 포함해 김차선 등 조력자들에 대한 감사의 표시가 담겨 있었습니다.
이 때가 95년 쯤이죠.
그 후 한 두해가 지났을 무렵.
97년에 신춘문예에 당선 된 후 손 선생님을 처음 만나 뵙게 됐습니다.
편찬위원회에서 함께했던 이들과 나눴던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고
그들과 함께 꿈꿨던 '만화비평 및 이론' 스터디모임을 발촉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내가 처음 만화계에 발을 디딘 한국만화문화연구원이었습니다.
스터디모임에는 아직 기준과 절차가 부족했지만
이동훈, 김차선 등이 1기고 그 뒤로 함께한 이들은
기수를 끊어 교육도 하고 실무에 참여시키겠다고 했습니다.
물론, 그때까지 형의 얼굴을 직접 대하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미스터블루의 편집팀장이 연구원 1기고 선배라는 생각만 했습니다.
이후 형은 이직을 하기도 했고 장기간 만화여행을 다녀오기도 한 것 같습니다.
2000년, 형이 쓴 '유럽만화를 보러갔다'는 책의 출간 소식을 들었고
연구원 기관지에 그 책의 리뷰를 제가 쓰기도 했습니다.
유럽만화를 보러 갔다 - 이동훈
하지만 무슨 연유인지 많은 만화계 인사들이 연구원을 왕래했지만 형의 모습을 직접 볼 수는 없었습니다.
형이 쓴 책은 대중적으로만 소비되는 우리 만화에 비해
미술과 문학과는 다른 영역의 예술로 대우받고 있는 유럽의 분위기를 전했습니다.
책은 생소한 유럽만화사를 소개하는 것이기도 했고, 작가와 작품 유럽의 문화를 전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또 여행 에세이의 형식도 취하고 있어서 전문서로서도, 대중서로서도 충분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올컬러로 제작된 책의 구성이나 가로가 넓게 편집된 형식, CD롬을 부록으로 제공했던 것 까지.
편집자다운 욕심과 노력이 고르게 자리한 기획도서였습니다.
얼마간 형에 대한 소식을 접하지 못했습니다.
디지털만화에 대한 관심으로 이런저런 관련 글을 쓰고 있던 때였는데
부천만화축제에서 디지털만화에 대한 학술대회가 열렸습니다.
발표자로 참석했는데 형이 사회자 석에 앉아 있었습니다.
첫 대면이었던 셈입니다. 그 때가 2001년 경 인 듯 합니다.
좌석 앞에 이름표가 붙어있기도 했지만
사진을 통해서 얼굴이 익었던 터라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형도 첫 만남이었지만 이런저런 경로로 제 얼굴을 아는 듯 반갑게 맞아줬습니다.
그렇게 첫 인사를 나눈 후로 각종 행사 자리에서 잠깐씩 눈인사를 나눴지만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없었습니다.
2005년 경인 것 같습니다.
대학원에서 석사 논문을 준비하던 중에 만화가협회와 우리만화연대가 공동으로 추진하는 사업에 참여하게 됐습니다.
형도 자문과 운영위원 자격으로 함께 했습니다.
사업계획을 작성하고, 생산관리를 함께하고, 연구보고서를 쓰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특히 석사 논문의 경우 이현세 선생님의 '천국의 신화'를 소재로 했었는데
과거의 초판본 도서를 손수 구해주기도 했고
좋은 논문을 쓰라며 격려도 해줬습니다.
형은 컨텐츠와이드라는 회사를 차려 만화가 에이전시 업무와 출판을 하기도 했고
중국에 애니메이션 원화팀을 두고 관련 작업을 하기도 했습니다.
한때 엠파스에서 만화웹진 코너를 운영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관련 실무를 형의 회사가 추진했었지요.
오래가지 못하고 웹진은 중도 하차했지만
인기 웹툰 강도하(강성수)의 '위대한 캣츠비'를 탄생시킨 곳이기도 합니다.
이후 형은 단행본출판과 우리만화의 디지털화, 해외수출 등의 영역에서 활발하게 기업활동을 전개 했습니다.
저 역시 비슷한 범위의 사업을 하던 회사에 있었던지라
형의 활약에 적지 않은 경쟁심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지난해였지요. 전화가 왔습니다. 일이 있다며 얼굴을 보자고 했는데
장소가 연세대 동문회관이라고 했습니다.
늘 일에 취해 있었던 지라 결혼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 줄 알았는데
나이 어린 형수를 모시고 늦 장가를 간다고 했습니다.
많이 쑥쓰러워하는 목소리였습니다.
주례는 이현세 선생님이 보셨습니다. 오랜 동료이기도 하고 후배이기도 한 형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말씀했었죠.
예식이 끝난 후 이 선생님과 강성수, 원수연 만화가 부부 그리고 다수의 만화계 인사가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형에 대한 이야기와 형이 늘 고민했던 만화계에 대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대화였습니다.
자리에 잠깐 들른 형과 형수는 수줍게 웃었고
대화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각자의 길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형이 아프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전화 할 용기는 없었고 문병을 가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습니다.
몇일 전... 회사동료와 함께 저녁을 먹고 있는데
핸드폰으로 문자메시지가 왔습니다.
형의 부고였습니다.
몇 차례 담배만 피웠습니다.
정해진 일정이 있어서 집으로 왔다가
다음날 장례식장을 찾았습니다.
영정 사진은 늘 수줍게 웃고 있던 형의 모습과는 달라 보였습니다.
눈웃음 가득히 크게 웃는 모습을 보면서 삐쩍 마른 미키마우스 같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형과 인사를 나누는 사이 형수를 봤습니다.
간호하는 기간도 사별하는 순간에도 많이 힘들었을 형수가 안타깝게 느껴졌습니다.
허망한 심정에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웠습니다.
그곳에서 재털이에 담배를 비벼 끄고 있는 윤태호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제 몸보다 작가의 몸을, 제 것보다 작가의 원고를 소중하게 여기며
만화편집자로서 살았던 형에 대한 추억들을 꺼내놓고
담배 연기에 담아 훠어이 훠어리 날려 보냈습니다.
그러고도 떠나지 않는 것은 형이 만화계에 남긴 족적입니다.
한국만화로 승부하고, 한국만화의 역사를 정리하고, 한국만화가 발전해야 할 길을 제시하고, 한국만화의 디지털화와 세계화를 위해 노력했던 모습들은 우리 만화계에 새로운 긴장과 역동적 에너지를 제공했습니다. 제게는 새로운 성찰의 기회였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끝으로 우리 만화계에는 만화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화가로부터 위대한 작품을 탄생 시키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조력자가 있습니다.
또 만화가 자신도 발견하지 못한 자신의 역할을 찾아내주는 조련사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만화편집자입니다.
작가가 씨를 뿌리는 사람이라면 그 씨에 열매를 맺게하고 독자와 만날 수 있도록 하는 이들은 분명 만화편집자입니다.
그들의 역할과 위상은 우리 문화예술계에서 만화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만큼이나 만화계의 변방에 있습니다.
우리 만화계는 그들을 너무나 혹사시키고 있습니다.
우리 만화의 긍정적 발전을 위해서는 만화가들에 대한 대우만큼이나
만화편집자에 대한 대우가 달려져야 합니다.
좋은 만화편집자는 없는 만화가를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글에 남긴 여러분의 의견은 개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