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환의 만화방]
타인을 해하는 행위에 죄의식이 없고 자신의 삶도 하찮게 여긴다. 범죄가 증가하고 자살이 끊이지 않는다. 국민은 범죄에 대한 공포와 혼란으로 상실감과 무기력함에 빠지고 국가는 황폐해진다. 이 같은 도미노 현상을 막고 생명의 존엄성과 소중한 삶의 가치를 일깨우기 위해 국가는 ‘국가번영유지법’을 만든다. 국민 1000명 중 1명을 무작위로 골라 죽이는 법이다.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열심히 살라는 취지다. 이 법에 따라 죽어야 할 사람이 받는 사망통지서가 ‘이키가미’다.
만화 ‘이키가미’의 주인공 후지모토는 사망통지서를 전달하는 공무원이다. 작품 속 국가의 모든 국민은 초등학생이 되는 해에 특수한 주사를 맞는다. 1000명 중 1명이 맞은 주사에는 심장박동을 멈추게 할 수 있는 ‘나노 캡슐’이 들어 있다. 주사를 맞은 사람은 18세부터 24세 사이의 어느 날 죽어야 한다. 물론 당사자는 이 사실을 모른다. 죽기 하루 전날, 후지모토가 직접 전달하는 사망통지서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사망 예정자가 살아온 삶과 사망 하루를 남겨 두고 보낸 일들은 신문 부고란에 소개된다. 사망자의 소식은 국민에게 삶의 가치를 일깨워 주며 이로 인해 범죄와 자살률은 감소하고 생산성이 증가되어 국가는 번영과 발전을 이룬다. 사망자는 국가의 발전을 위해 명예로운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평가되고 국민의 애도를 받는다.
연재만화에는 크게 두 가지 이야기 구성 형식이 있다. 하나는 전체 이야기의 흐름을 쫓는 ‘서사 중심 만화’이고 다른 하나는 초반부에 제시된 세계관이나 캐릭터를 중심으로 작은 에피소드가 반복되는 ‘설정 중심 만화’이다. 이 작품은 후자의 형식이다. 즉, 국가번영유지법이라는 설정을 중심으로 매회 새로운 사망 예정자의 에피소드가 그려진다. 그래서 기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자신의 직업에 대해 회의를 품기 시작한 후지모토가 아니라 그에게 ‘이키가미’를 받는 사람들이다.
설정은 가상이지만 사망 예정자들의 문제는 지극히 현실적이다. 가혹한 집단 따돌림과 청소년 범죄, 은둔형 청소년과 자해, 자신감 결여로 인한 사회 부적응 등 현대사회의 청소년들이 겪고 있는 참혹한 성장기가 그대로 재현된다. 이들은 성년이 되어 이제 막 그 끔찍한 기억에서 벗어나 새로운 내일을 준비하려 한다. 그런데 자의식이 생기고 보니 남은 삶이 하루뿐이다.
독특하다 못해 소름 끼치는 상상력이다. 이 작품의 핵심 설정인 국가번영유지법이 전체주의적 발상, 군국주의적 사고에 따른 것이라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이 설정은 당의정일 뿐이다. 입에 쓰지만 달게 삼켜야 할 약은, 이런 법이 없더라도 존재하는 소외받는 청소년의 현실이다. 죽지 못해 살고 있는 어느 청소년의 분노다. 그리고 이들의 문제는 국가가 아니라 가정과 지역사회가 담당해야 한다는 점이다.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시공사 콘텐츠연구실장)
www.parkseokhwan.com
동아일보, 박석환의 만화방, 2007-08-18
* 네이버 블로거로 활동중이신 연우님의 포스트를 보고 읽었는데...
저는 이 작품이 "청소년의 이탈행동과 반사회성의 문제"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으로 읽었습니다.
성장기에 가족과 이웃의 관심이 중요하다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봤습니다.
제가 좀 순진한가요^^
글에 남긴 여러분의 의견은 개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