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환, 김인의 그림자소묘, 문장, 한국문화예술진흥원, 2005.11


빛은 그림자를 포함하고 로그인은 아바타를 성장 시킨다


『그림자소묘』, (김인 지음, 새만화책, 2004)


- F1 -

김인이라는 이의 작품을 읽는다. 윤기 흐르는 하얀 표지 위에 멍한 눈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여고생이 그려져 있다. 뒷면에는 또 다른 여고생이 서있다. 서로 다른 곳에 있지만 그림자가 하나다. 작품 『그림자소묘』는 다른 듯 한 몸인 두개의 이야기가 한 권의 책에 담겼다. 책장을 넘기면서 확인한 이미지는 여느 만화와 달리 콘테와 붓으로 그려졌다. 

콘테의 굵은 입자는 주인공의 불안한 심리상태를 상징하는 듯 하다. 끊어졌다 연결되고 심하게 뭉쳐졌다 연하게 서있기도 한다. 유연하게 흐르는 붓은 주인공의 사정과는 무관하게 흘러가는 시간이다. 붓은 공간을 표현하는 정물이 되기도 하고, 정물이 되어 버린 사람을 표현하기도 한다. 검회색의 이미지가 지면 위에 주룩주룩 흘러내린다. 함부로 긴장을 놓기 어렵다. 심지어 여고생의 따스한 속내가 드러나는 개그 컷 앞에서도 묘한 의심의 눈빛을 풀 수 없다. 여고생 주인공의 여물지 않은 사고(思考)가 공포를 전달하는 기호로 읽히는 것은 <여고괴담> 유의 장르영화에 공감하는 우리만의 생각일까. 


- F2 -

화가가 되고 싶은 주희는 고등학교도 없는 깡촌에 산다. 미술학원도 다니고 학교에도 갈 요량으로 이모를 따라 서울에 온다. 자연과 벗 삼아 살아가던 주희에게 서울은 눈 붙일 곳 하나 없는 인의적 공간이다. 불야성을 이룬 서울의 밤은 별 하나 없는 곳. 주희는 자꾸만 집으로 가는 길을 잃어버리고 만다. 거리에서 한 여고생을 만난다. 

전학 간 학교, 같은 반 학생이다. 이 여고생은 이른바 ‘왕따’이다. 있어도 보이지 않는 존재였다. 지금은 그림자를 도독 맞아 다른 이가 볼 수 없는 사람이 됐다. 그런데 주희는 여고생을 빤히 쳐다본다. 여고생은 주희 눈앞에서만 그림자가 생기고 남들에게도 보여 지는 사람이 된다. 

길을 잃은 주희와 그림자를 잃은 여고생, 둘의 이야기가 흑백의 꿈처럼 빠르게 지나간다. 하나의 프레임 안에서 몸 밖 현실과 몸 속 사고를 동시에 담아냈던 프랑스 만화가 에드몽 보두앵(Edmond Baudoin)의 붓 그림이 떠오른다. 사건이 있어서 결말을 읽었는데 이미지만 남아서 종일 이야기를 궁리하게 만든다. 뭐였을까. 왜 그랬을까. 어떻게 된 것일까. 마치 가물거리는 지난밤의 꿈같다. 

또렷하게 남은 것은 ‘빛은 이미 그림자를 포함하고 있었다.’고 말하는 여고생의 이미지이다. 여고생과 마지막 대사에 대한 해석은 어렵지 않다. 도시에서 삶의 방식을 찾아가는 주희와 도시와의 소통에 실패한 여고생이 만난다. 그리고 마치 정물처럼, 빛을 받아들이고 그림자를 만들어 간다. 『그림자소묘』는 소통을 이야기하는 작품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해석을 여기서 마무리할 수는 없다. 엔팅 컷에서 천정을 바라보는 여고생의 냉랭한 눈빛이 다른 출구를 찾고 있는 듯 했다. 그래서 조금 더 가봤다.


- F3 - 

주희의 시선을 통해서만 보이게 되는 여고생은 애당초 가상현실 속 인물은 아닐까. 주희가 자신의 정체성과는 반대에 있는 이미지를 설정해 일종의 모의실험(simulation)을 펼치고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림자 없는 비트(Bit)가 넘쳐나는 사이버시대. 주희는 물리적인 것들인이 넘쳐나는 아톰(Atom)의 세상에서 막 벋어났다. 하늘의 별들이 땅에 내려와 가상의 별(네온사인)을 만들어 내는 도시에서 주희는 길을 잃는다. 문명이 자연을 대치하는 도시에서 주희는 나름의 지도를 만든다. 살아있는 것들을 가상의 이미지로 조작해냈다. 이제 주희는 이 가상현실의 사회를 자주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조력자를 찾는다. 여고생은 주희가 보기 전에는 물리성을 지니지 못했다. 그러나 주희가 로그인을 하면 여고생은 주희에게만 보이는 아바타가 되고 그림자(아이템)을 달아주면 다른 사람과 커뮤니케이션 할 수 있는 가상인물이 된다. 외톨박이로 도시생활을 해야 하는 주희의 단 하나뿐인 친구가 된다. 주희가 모델이 되라면 정물이 되고 주파수를 맞춰야한다면 커뮤니케이션을 시작한다. 빛을 느끼라면 그림자를 찾아낸다. 여고생은 늘 주희에게 감사함을 느끼면서 주희를 기쁘게 해줘야 하는 가상의 친구가 된다. 시골에서 전학 온 여학생은 그와 함께 도시생활을 즐긴다. 


- F4 -

만화작가 김인은 소통에 대한 현실을 이야기 한 것일까. 사이버 세계에 대한 은유를 담아낸 것일까. 아니면 작가의 서운한 삶을 그려낸 것일까. 또 다른 해석자의 몫이다. 

이 작품 『그림자소묘』는 기획안 만으로 2003년 서울애니메이션센터에서 진행한 우수만화 제작지원공모에 선정됐다. 그렇게 준비된 작품이 2004년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2005년에는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신인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게 된다. 거침없는 행보에 대한 화려한 답변이다. 그만큼 좋은 작품이다. 문제는 그만한 만화를 찾는데 우리만화계가 너무 게으르다는 점이다. 이 리뷰 역시 그 게으름 중 하나일까.   


(끝)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http://www.parkseokhwan.com)

문장, 한국문화예술진흥원, 2005.11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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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평론가 박석환 홈페이지. 만화 이론과 비평, 웹툰 리뷰, 인터뷰, 보도자료 등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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