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짜 두 번째 이야기, 범인을 알고 보는 범죄 스릴러
『타짜2부-신의 손』 애장판이 새 장정으로 출간됐다. 『타짜1부-지리산 작두』 편이 최동훈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면서 흥행 바람을 타고 1부 애장판이 단숨에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 스포츠조선에 두 차례에 걸쳐 전편이 재 연재됐고 만화방용 단행본이 4부 41권으로 출간됐다. 인터넷에서는 흑백원고에 색깔을 입힌 올컬러판이 선보이고 있다. 이래저래 이미 너무 널리 알려진 『타짜』. 영화에 필이 꽂힌 700만 관객이 두 번째 이야기에 대한 기대감을 지니고 있다면 굳이 새 장정의 판본을 구매하지 않고 새 장정의 3부, 4부를 기다리지 않더라도 단숨에 찾아 읽을 곳이 널려있다.
스코어를 알고 보는 축구시합을 다시 보는 즐거움이 스코어를 모르고 보는 축구시합에 비 할 바 못 되듯이 『타짜2부-신의 손』편은 어찌 보면 범인을 알고 보는 범죄스릴러물처럼 맹탕이 될 수 있다. 특히 『타짜2부-신의 손』편은 타짜들의 설계(속임수)에 당한 주인공이 설계의 해법을 찾고 새로운 설계로 복수를 하는 구조를 취하는 반전의 매력이 넘치는 작품이다. 그래서 더욱 궁금해진다. 누가 얼마만큼 구매해 줄 것인가. 이것이 출판계 업자들의 관전 포인트라면 대중의 움직임을 주목하고 있는 평자들의 관전 포인트는 어떻게 다시 읽을까에 꽂혀있다. 주말의 명화를 기다리는 세상은 아니지만 케이블TV를 통해 재방송되는 영화를 몇 번이고 다시 보는 대중이 있다. 동일 작품에 대한 색다른 소비와 해석이 넘쳐나는 세상이어서 만화에 대한 중복소비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결국 영화를 통해 작품을 인식한 신규 소비층과 애장판이라는 소장 아이템을 구매하려는 재소비층이 얼마쯤일까? 2000년 초입의 평가와 현재의 평가는 어떻게 다를까? 그리고 나는 이 텍스트를 어떻게 다시 읽을까?
두 시간짜리 영화가 보여주지 못한 만화의 무대
출판사에서 보내준 『타짜 2부-신의 손』 전 5권의 이모저모를 살폈다. 깔끔하고 두툼한 장정이다. 1부 애장판에서 표지 컨셉트 중 캐릭터를 부각시키기 위한 구성이미지가 『몬스터』를 차용했다는 시비가 있었는데 이 부분이 달라졌다. 각권마다 화투, 특히 이번 편의 핵심소재인 고스톱에 대한 개괄적인 정보가 담겼다. 본문에서 타짜들이 부리는 기술도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고 5권 말미에는 만화평론가의 작품평도 수록됐다. 고급지를 사용한 탓인지 종이 먼지도 많지 않다(종이 먼지와 비염으로 인해 만화 독서계를 떠난 이들은 복귀하라!!). 1부 못지않게 열심히 편집한 판본이다. 본문을 펼친다. 5년 전 쯤 읽고 보았던 장면들이 하나씩 본문의 컷들과 오버랩 된다.
영화에서와 달리 만화 『타짜1부』 는 1948년 여순사건으로부터 출발해서 62년 화폐개혁시기까지를 무대로 한다. 2부는 72년 유신헌법 체제 하에서 대학생이 된 대길의 이야기를 그린다. 1부에서는 마지막 도박판에서 승리하지만 판돈을 은행에 예금했다가 화폐개혁으로 돈을 찾지 못하게 되면서 다시 한번 도박판에 나서야 했던 타짜들이 있었고, 2부에서는 반독재 시위 중에 진압대원에 맞서다가 살해범이 되어 노름방에 숨어든 타짜가 있었다. 영화의 두 시간이 담아내지 못한 타짜의 에피소드는 우리 현대사의 치욕적인 장면들과 그 안에서 어찌 할 바 모르고 분노하며 자책하고, 아귀처럼 그 시절을 살아냈던 군상들이 있었다. 이 같은 무대를 제거한 영화 속 스타일리시한 캐릭터들이 대중의 환호를 받아 본래의 무대를 경험할 수 있도록 인도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현대사라는 서글픈 현실이 없었던들 대학생 신분의 대길이 어찌 노름방의 식모가 되고 옥살이를 하면서 기술을 익혔을까. 일본인 현지처로 팔려간 여인의 분노와 재벌가 황태자의 방탕한 삶이 없었던들 대길의 설계(화투판의 속임수)와 도박을 통한 복수가 어찌 통쾌함을 전할 수 있겠는가.
오래전 2부를 읽었던 기억들은 대길의 서사를 따라가면서 하나둘 잊혀지고 전혀 생경한 장면들로 전달됐다. 마치 전혀 다른 대길의 삶을 읽는 것처럼 느껴졌다. 시간과 속도에 묻혀버려 영화에서는 도무지 표현 못할 부분들이 나의 독서의지에 의해 고스란히 전달된다.
영웅을 만들지 않는 대중의 서사
오래 전의 독후감을 떠올리며 독전감(讀前感)도 쓸 수 있다는 자세로 『타짜2부』를 다시 읽었다. 새롭게 읽어 버린 대길의 서사. 그 흥미진진한 놀음에 흠뻑 젖어 버려놓고도 계몽적 결말을 제시하는 작가의 선의가 불만족스럽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했다. 승자가 권력을 득한 이라면 역사는 권력을 득한 이들의 이야기가 된다. 이를 왕조사 속의 영웅서사라 해두자. 그렇다면 이 반대편에 놓이는 것은 피권력자들의 이야기가 되겠다. 이를 대중의 서사라 하자. 대중의 서사는 왕조사를 근간으로 한 영웅서사와 동일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종극은 다른 모습이다.
나는 대중의 서사 속에서 갑자기 등장한 주인공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낀다. 그가 특수한 능력과 출생의 비밀을 지니고 있고 아름다운 여인과의 로맨스라도 만들라치면 흥미를 넘어 ‘다음 이야기’에 대한 집착을 보이기까지 한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씩 영웅의 면모를 갖춰가며 성장가도를 달리던 주인공은 목표한 욕망을 해결한 후에는 평범한 시민으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를 실행했던 영웅은 개인적 욕망이 해결된 뒤에는 알맹이 빠진 계란마냥 작은 힘 앞에서도 풀썩 주저앉아 버린다. 새로운 세계를 만들 수 있는 권력을 지녔으면 기록을 남겨서 역사가 되어야 할 일. 그런데 역사 속으로 진입하지 못하고 그 정점에서 기억되지 않을 선문답을 남기고 잠수함을 탄다. 한 명의 여성을 구한 건달도, 왕을 제압한 무사도, 도시를 구한 형사도, 지구를 구한 기능공도 마찬가지다. 왕조사에 기록된 영웅서사의 문맥을 따르다가 자손도 없이 사라진다.
타짜 1부의 고니도 그랬고 고니의 조카인 타짜 2부의 대길이도 그랬다. 정점을 경험한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모든 열정을 불살라버렸다는 듯 사라져 버린다. 그것이 왕조사 중심의 영웅서사와 다른 대중의 서사 속 주인공이다. 그래서 신나는 판타지를 경험하는 도중에도 불쑥불쑥 놓여있는 좌절의 흔적을 발견하게 만든다. 언제 급강하하게 될지 모를 주인공을 보며 불편한 감정을 부여잡느라 즐거움 반, 고통 반에 만족해야 한다. 물론 이것이 나의 감성과 이성을 좌에서 우로 크게 흔들어 대는 허영만의 매력이다. 이 같은 서사전략은 허구적 이야기에 사실성을 부여한다. 여느 작품에서 찾을 수 없는 탄탄한 서사적 재미와 감동도 전한다. 그런데 아쉽다. 그는 왜 주인공을 최후의 승자로 묘사하지 않을까. 그의 주인공은 왜 최후의 승자가 되어 역사가 되지 못할까. 그럼에도 대중은 왜 완성되지 않은 영웅에 환호하고 흥분할까. 그리고 그 영웅의 침몰에 동의를 표하고 감동을 허락할까. 부정적 과정을 통해서는 결코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인가. 도박으로 돈을 벌어 부자가 되고 세세토록 풍요롭게 사는 타짜의 삶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도 전달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세상의 부와 권력은 그렇게 완전하게 형성되었단 말인가.
신의 손, 그의 재능과 노력이 조금 더 축복 받으면 안 되나.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컬쳐뉴스, 민예총, 2006. 11. 28 게재
글에 남긴 여러분의 의견은 개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