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낌없이 줄 수 없는 나무, 감동하거나 동감하거나
유럽 만화계가 발견한 다니구치 지로
다니구치 지로(1947년 생)는 자국 내에서 보다 세계에서 더 유명한 일본 만화가이다. 먼 옛날 유럽의 화가들은 일본의 우키요에(浮世繪)를 받아들여 프랑스 화단을 풍요롭게 했다. 이처럼 90년대 초 프랑스 작가주의 만화가 프레데릭 부아레는 다니구치를 발견하고 공동 작업을 통해 유럽에 그의 작품을 소개했다. 유럽만화계는 다니구치 만화의 서사성과 문학적 일상성에 찬사를 보냈다. 그간 유럽에 소개된 일본만화는 과잉서사와 이탈성으로 인해 독자들은 즐겼지만 작가들은 터부시해왔다. 반면 다니구치의 <열네살> 등의 작품이 지닌 서사적 즐거움은 작가들을 흥분시켰다. 앙굴렘 국제만화페스티벌 등 유럽 중심의 만화제는 다니구치에게 각종 상을 걸어주기 시작했고 세계 여러 나라에서 그의 작품이 출간되고 있다.
한국어판도 다수의 작품이 소개되고 있는데 얼마 전 <느티나무의 선물>이라는 단편 모음집이 출간됐다. 사람 사는 모양의 서운함을 장식 없이 묘사하는 그의 작품은 때때로 피곤함을 가중시키기도 하지만 대개는 다스리기 어려운 감정을 환기시켜줌으로서 얼마간의 위안을 제공해주었다. 일본의 성인만화잡지 <빅코믹>에 연재됐던 8편의 작품을 묶은 이 작품집은 소설가 우쓰미 류이치로의 단편소설을 각색한 것이다. 제목에서 느낄 수 있듯이 ‘나무’라는 전통과 완고함의 상징이 전달하는 비물리적 ‘선물’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주인공은 대개 고령의 노인이고 상대는 젊은이들이다. 90년대 초 고령화 사회로 접어든 일본의 노인문제 즉, 세대간의 갈등이 이 작품집의 키워드이다. 표제작을 따라가 보자.
아낌없이 줄 수 없는 나무
젊음을 다해 일군 회사를 자의반 타의반으로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전원생활을 시작한 하라다씨 부부가 있다. 정원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는데 바람이 불면 나뭇잎이 휘날리는 통에 동네 사람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하라다씨는 내키지 않았지만 아들이 괜한 일로 융통성 없이 동네사람들과 불화를 만든다고 할까봐 느티나무를 자르기로 한다.
이때 노령의 옛 주인이 나타나 나무에 얽힌 이야기를 풀고 간다. 딸이 집을 팔기 전까지 나무는 옛 주인의 그늘이었고 시계였으며 일기예보를 해줬다는 것이다. 자신에게 뿐만이 아니라 나뭇잎이 온 동네에 휘날리는 것은 이제 청소를 해야 할 때가 되었음을 온 동네에 알려주는 것이라 했다. 그리고는 이 나무가 다른 사람보다 먼저 이곳에 살았는데 나뭇잎이 휘날려 빗물 통을 막는다고 주인을 쫓는 것은 이기적인 처사라 주장한다.
곧이어 나무를 베러 온 사내는 나무의 영혼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내는 나무가 그냥 서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반응한다고 말 한다. 고집불통 영감마냥 뻣뻣이 서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불만을 듣고 표 나지 않게 이를 해소하려 노력한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커질 수록 더 아름다운 새싹을 피워낸다고 한다. 하라다씨는 나무를 베지 않기로 하고 융통성 없는 고집불통 영감이 되어 느티나무가 주는 선물을 지키기로 한다.
함께 살아가야 하는 나무
복잡하지 않은 이야기이고 몇몇 인물설정을 제하고 나면 익숙한 테마를 전달하는 단편이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같은 이야기인데 다니구치가 이 흔한 이야기에 살을 붙인 까닭은 무엇일까. 사회 구조의 변화 때문이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상징은 죽을 때까지 헌신적으로 자식 사랑을 외치는 부모이다. 문제는 의료기술 등의 발달로 죽을 때까지의 기간이 매우 길어졌다는 점이다. 부모가 철이 든 자식에게 사랑을 받을 때쯤 고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 자연의 섭리이고 이를 기준으로 세상의 윤리라는 것이 구조화되었을 텐데, 고인이 되어야 할 부모는 살아있고 철이 든 자식은 사랑을 돌려주지 않으니 문제가 생긴다. 3대가 사는 것도 어려운데 4~5대 이상이 동시대에 살게 된다. 그래서 느티나무는 아낌없이 그늘을 제공하고 베어져서 땔감이 되는 구 시대적 운명을 택해서는 안 되게 되었다.
고령화 사회에서 몇 세대를 더 살아야 할지 모르는 하라다씨 역시 아낌없이 주고 노노노(老老老)의 삶을 살 수 없게 됐다. 하라다씨가 원해도 그것을 방치했을 때 발생하는 사회적 문제행동이 더 복잡다단하기 때문에 그렇게 둘 수도 없다. 그래서 다니구치의 느티나무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아니라 주변의 요구를 수용하는 한편 자신의 가치를 이해시켜서 함께 살아가는 나무이다.
세대 간의 갈등, 세대에 대한 감동으로
다니구치의 느티나무는 고령화 사회를 살고 있는 일본에 국한 된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나라 역시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고 있으며 이에 따른 노인학대, 자살 등 기존의 윤리적 기준으로는 해석 할 수 없는 다양한 사회문제행동이 발생하고 있다. 고령화와 연령차에 따른 세대 간의 갈등도 복잡한 문제인데 정치, 문화적 트랜드의 급속한 변화와 과학기술의 진보적 발전 등에 따른 더욱 복잡한 세대 간 분화도 진행 중에 있으니 이 역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처럼 동시대에 사는 세대간 연령차가 다양해지고 이와 함께 의식차가 다양해지면서 갈등은 증폭되고 있다.
이 갈등이 폭발하면 그 피해규모는 핵폭발 이상으로 거대한 변화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이를 통제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곧 함께 사는 느티나무의 철학이다. 다니구치의 느티나무가 주는 선물은 요즘 세대를 기준으로 한 최대다수의 행복이 아니라 너무나 다양해진 우리의 세대가 함께 가치를 생산하고 상생하는 구조를 실현시켜야 한다는 마음의 움직임, 즉 감동이다.
글. 박석환 (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스위치, 성균관대학교언론정보대학원, 2005-08-10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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