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환, 사이버문화 시대 만화를 통한 소통, 우리교육, 2005.01.01


사이버문화시대의 초입에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이라는 선언적 개념을 설파했던 인류학자 피에르 레비는 사이버커뮤니케이션 시대의 특징을 ‘동질 적이지 않은 것’이라 했다. 공통점을 찾아 시대를 구분 짓고 그 차이를 명확히 해서 무엇인가 분명하게 다른 것을 찾길 원하는, 또는 그렇게 학습되어 있는 우리에게 이 학자의 주장은 묘한 여운이 되어 맴돌았다. 얼핏 이해되는 부분이 있으면서도 무책임해보이고 부정확해보였다. 

마치 진실은 저만치에 존재하는데 표피만 확인하게 하는듯하여 경박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이 철학자의 주장이 근거 없는 고백이 아니었음을 느끼게 된다. 이 시대를 온 몸으로 부딪치면서 너와 내가, 교사와 학생이, 학교와 가정이 전혀 ‘공통적’이지 않음을 언론의 사회면을 통해 매일 확인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지정한 업체의 교복을 입고 동일한 글씨체의 명찰을 차고, 규격화된 책걸상에 앉아 표준화된 교과과정에 따라 칠판 앞 강의를 듣는 아이들은 그렇게 세상을 향해 달릴 준비를 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오늘 우리 앞의 아이들은 심정적인 수준의  ‘세대간 격차’가 아니라 반쯤은 외계인인 듯 한 느낌이다(<너 좋아한 적 없어>). ‘19세기 식 교실에서 20세기의 선생이 21세기 학생을 가르치고 있다(<20세기소년>)’는 이야기는 그나마 교단을 경계로 선생과 학생이 나뉘어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경계만 허물면 의사소통은 가능하다는 자신에 찬 목소리였다(<그 놈은 멋있었다>). 그러나 지금 교실이라는 세계 속에서 칠판이라는 독점적 미디어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됐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교실 안 아이들은 칠판이 아니라 각자의 책상에서 세상을 향해 있다. 마치 교실 안 모든 사람이 각자의 경계를 만들어 살고 있는 듯하다. 그들은 각자의 몸에서 발생된 촉수로 자신에게 필요한 것과만 접속하고 있으며(<츄리닝>)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은 하지 않는다. 저 먼 시대의 탐험가라도 된 듯 혼자 생각하고 행동하며, 검증할 수 없는 지식을 스스로 축적하고 수많은 기호들을 따라 이동한다. 

그들에게는 역사적 질서도 도덕적 규범도 도무지 쓸모 있어 보이지 않는다(<신암행어사>). 나와 너만 다른 것이 아니라 수많은 ‘너’들 끼리도 전혀 다르게 보인다. 일부러 시간 내서 말도 걸어 보고, 우연을 가장해 같이 활동 해봐도 ‘너’들은 그저 ‘다른 너’로 남아있다. 다른 것 안에서의 공통점을 일부러 찾아보려 해도 ‘그 때 그 때 달라요’일뿐이어서 익숙한 개념이나 문자 안에 ‘너’들을 구겨 놓고는 ‘이해불가’ ‘소통불가’의 딱지를 붙여버리고 만다. 

세대차를 넘어 시대차를 느끼고 사고마저 디지털라이징 된 이들과 우리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시험 점수’아니면 ‘대중문화’에 대해서다. 대중문화라는 것의 상업성과 획일성 등 각종 문제들은 경계하고 의심해야 하겠으나 그것이 뿜어내는 서사구조를 우리가 이 아이들과 함께 따라가고 있다는 것은 적지 않은 위안임에 분명하다. 설령 우리가 컴퓨터나 휴대폰을 사용하는 방식이 아이들의 그것과 전혀 다른 것처럼 아이들이 같은 이야기를 전혀 달리 이해하고 해석한다 하더라도, 그만큼의 ‘다름’을 인정하고 인정받는 다는 것은 그들과 소통할 수 있는 길 위에 놓이게 되는 일일 것이다. 

고사에 노마식도(老馬識途)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적절치 않은 비유이나 이 시대가 ‘다름’과 ‘늙음’을 동의어로 인식하고 젊음이 새 길을 찾는다면 그들과 다른 늙음은 잃어버린 길을 알고 있어야 할 의무가 있다. 이해가 달라 재미가 다르더라도 그들의 문화를 함께 소비하는 것은 ‘내 안에 너 있다’는 믿음을 줄 수 있는 그런 일이다. 그중에서도 만화는 ‘난무하는 기표’와 함께 내밀한 기의를 갖추고 있다. 영상과 출판의 장점을 고루 갖추어 아이들과 교육현장에서 소통하기 위한 좋은 매개체가 될 것이다. (끝)


5편의 만화를 통한 트랙백


너 좋아한 적 없어/ 체스터 브라운/ 열린책들/ 2004년 11월 

캐나다 출신의 세계적인 만화가 체스터 브라운의 <너 좋아한 적 없어>부터 시작해보자. 아이들에게 낯설 수 있으나 만화에 낯선 이들이 ‘요즘 만화(?)’에 접근하기 위한 디딤돌이 될 것이다. 작가가 성장기에 경험한 연애심리와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혼란스러운 일상이 독특한 펜화로 묘사됐다. 한편의 문예영화를 보는 것처럼 높은 흡입력을 지닌 작품이다. 국내에 같이 소개된 작품 <똑똑, 리틀맨>은 작가의 여러 단편을 묶은 모음집이다. 성인용으로 출간되었지만 아이들의 머릿속을 훔쳐볼 수 있는 단편이 여럿 수록됐다. 


20세기소년 16/ 우라사와 나오키/ 학산문화사/ 2004년 6월

탄탄한 서사구조로 자신의 이름을 브랜드화 시키고 있는 일본 만화가 우라사와 나오키의 <20세기소년>을 보자. 어린시절 외계의 적으로부터 인류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싸우자고 맹세했던 주인공 켄지와 아이들은 이제 어른이 되어 허름한 삶을 살고 있다. 그들 앞에 그 시절의 공상과 똑 같은 사건이 벌어진다.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일본의 60년대 풍경과 함께 21세기의 스펙터클이 펼쳐진다. 60년대의 꿈으로 21세기를 구원하는 30대의 소년들. 우리가 아이들과 소통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한 길은 우리의 어린시절 꿈을 기준으로 그들의 꿈을 고민해보는 것 아닐까. 


그놈은 멋있었다 2/ 귀여니 원작, 김지은 만화/ 황매/ 2004년 12월

각종 이모티콘과 이른바 외계어를 사용한 소설로 ‘귀여니 신드롬’을 이끌었던 소녀 작가의 원작소설이 영화에 이어 만화로도 나왔다. 이모티콘을 통한 문장표기의 대중화를 주도했다고 볼 수 있는 <그 놈은 멋있었다>는 한글파괴라는 강력한 비판을 받았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한글의 이미지와 활용방식을 다양화 시켰다는 옹호론도 있다. 만화가 김지은이 작화를 담당했고 시원한 펜선으로 원작의 엽기적인 상황을 강화했다. 만화에서는 귀여니 작품의 전매특허인 이모티콘이 전부 등장인물의 얼굴 표정으로 대체됐다. 원작이 그들만의 언어로 세대격차를 느끼게 했다면 만화는 이를 적극적으로 해석해서 소통의 길을 열었다. 이제 그들 외의 세대가 그 입구에 가면 된다. 


츄리닝/ 이상신, 국중록/ 애니북스/ 2004년 9월

<츄리닝>은 이상신・국중록이라는 신예 만화가가 스포츠신문에 연재하면서 매일매일 폭발적인 화제를 이끌고 있는 작품이다. 신문사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려진 작품이 네티즌의 ‘펌질’을 통해 수많은 사이트에 올라가기 시작했고 급기야 ‘츄리닝 실사판 만들기’라는 색다른 유행을 불러오기도 했다. ‘덧글 놀이’의 극한을 보여줌과 동시에 ‘대중소비’의 틀에서 벗어나 ‘창조적소비’의 방법을 가시화 시켰다. 예술이 사고에 작용한다면 대중문화는 실천에 작용한다.


신암행어사 9/ 윤인완, 양경일/ 대원/ 2004년 11월

한일 합작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된 이 작품은 양경일・윤인완 콤비가 일본 현지 출판사의 기획으로 제작한 일본만화(?)이다. 패망한 쥬신의 암행어사 박문수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이몽룡과 성춘향을 비롯 수많은 역사적 인물과 설화 속 인물이 총 출동한다. 그리스 로마신화 속 인물들의 캐릭터와 이미지를 차용한 서구 판타지소설 처럼 이 작품은 우리 역사와 설화 속 인물들의 이미지를 작품 전면에 배치한 한국적 판타지만화이다. 역사는 없고 이미지와 이를 트랙백(Track back, 블로그에 엮인 글)하는 방식만 서사의 형식으로 남아있다. 이제 아이들의 생각을 트랙백 할 차례이다.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우리교육, 2005-01-01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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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환(만화평론가, 한국영상대 만화콘텐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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