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티즌 흐름 읽기
다리미 밑에 누운 토끼가 전기 스위치를 누른다. 이 놈은 이미 죽었거나 죽으려 한다. 수명이 7~8년 밖에 되지 않는 놈들이 뭐 그리 죽을 일이 많다고 설쳐대는지. ‘토끼들의 자살 방법 연구’ 쯤 되는 내용을 담은 만화집 <돌아온 자살토끼> 이야기이다. 이 토끼들은 살고 싶어 죽겠다는 불황기의 독자들 앞에서 죽고 싶다며 난리를 친다.
영국의 만화가 앤디 라일리가 말 칸 하나 없이 그려낸 이 만화는 죽음을 추구하는 토끼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돌아온 자살토끼>는 여전히 ‘죽기 놀이’에 열중한다. 작가는 우리 주변에 널린 온갖 가전제품으로 토끼의 자살을 구상한다. 우리를 풍요롭게 했던 문명의 유산 또는 그 현장 속에서 토끼를 죽게 하고, 우리에게 익숙한 대중문화의 현장 속으로 자살하는 토끼를 보낸다. 워낙 자살이라는 것은 자신을 가장 덜 해하는 방법으로(간단하게) 죽음에 성공하려는 고민의 과정이고 결과이다. 반대로 토끼가 고민하는 자살의 방법은 차라리 살아서 좌절하며 생애의 역사를 받아드리는 것이 좋을 정도이다. 자살 설명서 치고는 너무 복잡하고 끔찍하다. 그래서 이 토끼는 자살에 성공했다기보다는 다양한 방법으로 자살을 설계했을 뿐 아직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이해된다.
얼마 전 영화배우 이은주가 자살했다. 이 재능 있는 여배우의 자살은 우리 사회를 큰 허탈감에 빠지게 했다. 언론은 이은주의 자살 원인을 찾기 위해 난리를 쳤고 그가 살아가는 것에 힘을 실어준 대중은 마지막 신호를 감지하지 못한 무력감에 빠졌다. 그리고 언론은 유명인의 성공한 자살들을 소개하며 ‘베르테르 효과’를 경고했다. 1974년 미국의 사회학자 데이비드 필립스가 유명인의 자살 보도가 동조 자살을 일으킨다며 제시한 이 효과이론은 이후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자살 보도 이론 중 가장 명료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실제로 마릴린 먼로의 사망 보도 이후 미국인의 자살은 12% 증가했다. 자살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우리 사회에는 동조 현상으로 볼 수 있는 유사 사건이 이어졌다. 이은주의 자살 역시 우리 사회의 자살율을 급 증가 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는 일종의 언론의 고정화 된 보도 패턴이고 프레임이다. 유명인이 죽으면 몇 명쯤은 같은 방식으로 따라 죽어줘야 한다. 언론은 이를 미리 예언하면서 자신들의 역기능을 순기능으로 바꿔 치기 한다.
여기서 자살토끼의 자살을 그린 만화와 유명인의 자살을 다룬 보도의 차이점을 찾을 수 있다. 자살토끼의 자살은 명백한 이유 없는 자살로 자살 자체를 설계하는 것에 목적으로 두고 있고 그 결과는 매우 끔찍하여 웃음이라는 비판적 동조의 효과로 이어지는 반면, 언론의 유명인 자살보도는 기자협회에서 마련한 ‘자살 보도 권고기준’에도 불구하고 자살 이전의 상황과 이후의 현장을 낭만적으로 묘사함으로서 자살이라는 전염병을 확산시키는 역할을 한다. 셰익스피어가 그랬다. ‘죽음이 감히 우리에게 찾아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그 비밀스런 죽음의 집으로 달려 들어간다면 그것은 죄일까?’ 알면서 왜 묻나. 그 집을 기웃거리게 하는 것도 큰 죄이다. 언론은 더욱 강력한 자살 보도 권고기준을 마련하고 이성적 수용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중앙대대학원신문, 2005-04-23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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