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환, 만화 속의 변신 그 총정리판, 코믹플러스닷컴, 2004.08.31


'변신'이란 소재가 만화에 유난히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아마 그것이 만화가 가진 꿈, 그리고 자유로움과 가장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코플이 잡은 9월의 테마는 '변신'입니다.  코믹플러스는 그간 변해온 것처럼, 앞으로도 변신하기를 원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만화공간으로요! 여러분은 어떤 모습으로 변신하고 싶으신가요? - 편집자


변신은 이탈이 아닌 순응을 위한 전략   


나는 아직도 꿈을 꾼다. 고대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무수한 변신기담과 영국풍 고딕소설에 등장하는 변신괴담, 우리 고대문학에서 찾을 수 있는 변신설화 등등. 나는 그런 꿈을 꿨다. 물론 내 욕망의 이유를 찾다 보니 세상에 놓여있던 답안이 이 것들이었을 뿐 내게 진짜 문제를 건넨 이는 따로 있다. 나를 꿈꾸게 한 것은 칼라 텔레비전과 일본산 만화영화 속의 '변신 모티브'였다. 


만화영화 속의 변신 모티브와 소년시절의 깨우침

- 변신소녀, 일상의 문제는 전문지식으로

나를 꿈꾸게 한 첫 번째 주인공은 '요술공주 밍키'였다. 마술봉을 휘둘러 변신주문을 외우면 소녀는 어느새 알몸의 성숙한 여인으로 변신한다. 곧이어 전문분야의 유니폼을 착용하고 변신을 완료한 여인은 전문지식과 기술로 일상의 자잘한 문제를 해결한다. 이른바 마법(또는 변신)소녀물로 불리는 이 장르는 '요술공주 샐리'의 전형을 따르고 있다. 이 작품은 1960년대 이후 등장한 다양한 유형의 어린이 대상 변신이야기의 원류였다. 미국 디즈니사의 실사영화 '메리포핀스'에 영향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요술공주'와 '변신소녀'의 관습적 연출은 일본 만의 것으로 고착됐다(아마도 이 장르의 가장 엽기적인 전개는 '호호아줌마'와 '모래요정 바람돌이'가 아닐까). 이 작품의 성공은 '메리포핀스' 유의 실사영화를 일본식 저예산 특수촬영 시스템으로 제작하게 만들었고 여기서 특촬용이라는 새로운 장르도 구축된다. '고질라' '아이젠버그호' 등으로 이어지던 특촬물은 거대괴기물 또는 거대로봇물의 형식으로 이어졌고 전대물이라는 새로운 장르로도 발전했다.  


- 변신영웅, 여럿이 뭉치면 어려운 일도 해결

나를 꿈꾸게 한 두 번째 주인공은 '초전자 바이오맨'이다. '비밀전대 고레이져'를 원형으로 한 이 작품은 특수한 능력을 지닌 대원들이 총천연색 타이즈를 입고 등장해서 지구평화를 위해 싸우는 일본판 슈퍼히어로물이다. 미국식 슈퍼히어로물이 아저씨뻘이었던 탓에 나를 보호대상으로 느끼게 했던 것과 달리 또래로 등장한 전대물의 영웅들은 쉽게 동일시의 대상이 됐다. 더군다나 변신 시간이 제한되어 있다거나 친구들 간의 협력이 필수라거나 하는 설정은 내 꿈의 대상이 나와 같은 제한 된 현실 속에 있음을 느끼게 했다. 전대물의 인물구성방식은 1970년대 등장한 거대로봇 장르 만화영화를 변신합체 로봇물로 발전시키는 계기가 됐다. 


- 변신로봇, 도구를 통한 능력의 확장

나를 꿈꾸게 한 세 번째 주인공은 '그렌다이저'였다. 탑승형 거대로봇 '마징가Z'를 원형으로 한 이 작품은 '그레이트마징가' '그로이저엑스' '게타로보'로 이어지는 거대로봇 전성시대의 주인공 중 하나이다. 이 로봇들은 사람이 비행정이나 오토바이를 탄 채로 로봇과 결합해서 자동차를 운전하듯 조정하게 되어 있다. 인간의 신체와 동일하게 생긴 로봇은 인간의 능력을 확장하는 기계적 역할을 수행한다.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이들 로봇은 인간이 로봇에 탑승해 능력을 확장한 것과 같이 새로운 기능을 지닌 기계와 합체해 능력의 확장을 이룬다. 지구의 기술력으로 만들어진 마징가나 그레이트마징가가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나는 수준이라면 외계의 혹성 프리드별의 왕자 듀크 프리드가 몰고 온 그렌다이저는 스페이저라는 비행머신에 탑승해 하늘을 날았다. 그렌다이저의 기계사용 또는 합체의 개념은 불사조로 변신하는 용자라이덴이나 비행기로 변하는 간담브이에 이어, 세 로봇이 합체해서 하나가 되는 갓시그마, 다섯 사자로봇이 거대로봇으로 변하는 킹라이온 등의 개념으로 확장됐다.   


변신물, 비현실 세계를 통해 구축한 과장된 현실의 교육장


일본산 만화화영화 속의 변신모티브는 내 소년기의 모든 욕망을 총천연색의 꿈으로 도배했다. 나는 차근차근 성장해야 했지만 내 욕망은 성장이 아닌 변신을 원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과학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는 인간의 상상력이 처음 사용된 것은 짐승의 모습을 닮고 싶다는 욕망에서부터 일 것이라고 했다. 꼭 그의 확신에 찬 주장이 아니라도 사자의 발톱, 호랑이의 어금니, 치이타의 다리, 독수리의 날개를 가지고 싶었던 것은 그만의 인식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위대한 자연 앞에 초라하게 내버려진 바슐라르의 인간과는 달랐다. 나는 애국가와 함께 열리는 초현실적 세상의 문 앞에 서있었다. 칼라 텔레비전 속 일본산 만화영화의 주인공은 현실 세상을 살아야 하는 내게 필요한 능력을 알려줬고 나는 그들을 닮고 싶었다. 

나는 바슐라르의 인간처럼 짐승의 능력을 대신할 도구 개발의 욕망을 느꼈고 나의 영웅들 역시 도구를 사용했음을 인지했다. 소년시절 내게는 밍키의 마술봉과 바이오맨의 다목적 손목시계 그리고 그랜다이저가 필요했다. 나는 밍키를 전문직 여성으로 변하게 해줬던 마술봉을 생각하며 주산학원(?)에 다녔다. 바이오맨처럼 지구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전자계산기 기능이 있는 손목시계와 다른 이의 평화를 위해 항시 출동대기 중인 그랜다이저급 자전거도 가질 수 있었다(하교 길에 누나를 태워주고는 했다). 성인이 된 지금 나는 무한도 대출이 가능한 마술봉 같은 신용카드와 모바일인터넷 기반으로 모든 전자제품과 통할 수 있는 손목 부착형 핸드폰 그리고 원격시동시스템과 위치정보시스템을 부착한 자동차를 필요로 한다. 


변신 욕망의 상품화, 좋거나 나쁘거나


나는 변신을 꿈꿨지만 성장했을 뿐 변신에 성공하지 못했다. 나는 변신을 대신할 도구를 꿈꿨지만 구매했을 뿐 개발하지 못했다. 소년기의 나는 폐쇄적인 현실에서 이탈하기 위한 방법으로 변신을 원했다. 그러나 이제는 현실에 순응하기 위해 변신을 꿈꾼다. 내가 가진 변신의 욕망은 어느덧 소비의 욕망으로 바뀌었고 나는 나를 꿈꾸게 한 이들이 기대했던 대중으로 성장해서 그들의 상품을 아끼지 않고 구매한다. 그러기 위해 나는 내 가족과 함께 땀 흘려 일한다. 월급봉투는 나의 욕망을 흉내 낼 수 있는 변신의 기회를 제공한다. 불가능한 것을 꿈꿨지만 하나둘 그를 대신할만한 현실들이 주어지고 내 꿈은 공상이 아닌 목적이 된다. 나는 매일 목표를 세우고 이를 향해 질주한다. 대중문화의 폐해나 물신주의의 피해자쯤으로 나의 꿈을 깍아 내려도 상관없다. 성과로 얻어지는 욕망의 해소는 나를 행복하게 하고 현실은 나를 다시 꿈꾸게 한다. 그뿐이다. 지금 내가 아쉬운 것은 내 꿈의 대상이 우리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내가 아쉬운 것은 이런 꿈을 만드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제 나는 우리의 것으로 내 꿈을 만들고 싶다. ‘변신이야기’가 허황된 거짓 공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잠재된 욕망의 나열을 통해 우리를 성장하게 하고 세상의 질서에 맞춰 사는 법을 알려주고 있음을 전달하고 싶다.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코믹피플, 코믹플러스닷컴, 2004-08-31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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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평론가 박석환 홈페이지. 만화 이론과 비평, 웹툰 리뷰, 인터뷰, 보도자료 등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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