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환, 아스팔트 그 사나이는 지금 어디에서 달리고 있는 가, 허영만만화와 환호하는 군중들, 김영사, 2004


들어가기 전에 

허영만에 대해 물었다. 시인이자 만화칼럼리스트인 함성호(1963년 생, 건축가 시인 만화칼럼리스트. 시집《56억 7천만 년의 고독》, 만화에세이《만화당인생》)는 ‘허영만은 나에게 만화의 고향’ 같은 존재라 했다. 허영만의 문하생 출신으로 대한민국 출판만화대상을 수상한 만화가 윤태호(1969년 생, 만화가. 1988년 허영만 문하로 입문, 1993년 데뷔)는 스스로 ‘허영만 키드’라 했다. 이들은 허영만의 만화로 만화를 배웠고 허영만 유의 재미에 익숙해있다고 고백한다. 그만큼 허영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어렵다는 말이다. 이들의 말에 기대지 않더라도 만화평론가라는 직분을 지닌 나 역시 허영만과 허영만 만화를 논하기가 쉽지 않다. 더군다나 허영만의 삶과 만화계 내외부에서의 족족을 찾아내어 분석하겠다고 계보(系譜)를 들고 나온 것은 더욱 그렇다. 

나는 허영만이 만화계에 데뷔할 즈음에 태어났고 내가 그의 만화를 따라가는 것이 늦을까 두려워 만화를 공부했다. 나는 허영만 만화의 성실한 독자이고 허영만의 열성적 팬이다. 그리고 허영만 만화책 수집가이며 허영만 팬카페(cafe.daum.net/ymcomics)를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허영만은 내가 만화평론가라는 지금의 직분 이전에 내게 와서 만화가가 되었다. ‘만화평론가로서 나는 허영만이라는 재료로 만들어진 그릇이다. 그 그릇에 다른 이의 만화를 담았고 지금도 간혹 그 그릇을 중심으로 담을 것과 담긴 것을 보고는 한다.’ 내게 있어 허영만과 그의 만화는 만화라는 매체의 기준점일 때도 있다. 그런 내가 스스로의 그릇을 논한다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그러나 한편으로 허영만과 그의 만화를 부정해보고 싶은 욕구 역시 커져있음을 고백한다. 내 그릇을 저 넓은 강물에 띄우고 허영만 이전과 이후의 만화를 찾고 싶어질 때면 욕구는 용기를 넘어 버린다. 


머리말-집을 찾아서


허영만은 1974년 제2회 소년한국도서 신인만화공모를 통해 만화가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그의 나이 28살. 단행본 3권 분량의 동물 소재 만화 『집을 찾아서』가 가작(당선작은 없었다)으로 선정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한 후 지금까지. 허영만은 30년 동안 자신의 작품뿐만 아니라 우리만화계의 신작로를 넉넉하게 지켜 온 나무이다. 

고 신동우(1936년 생, 만화가 풍속화가. 1960년 대 초《풍운아 홍길동》등의 작품으로 최고 작가로 활약, 80년 대 만화창작을 중단하고 풍속화에 전념) 화백은 공모전에 올라 온 작품 중 허영만이라는 이름을 건져 올리면서 ‘이제 우리는 만화를 그만 그려야 겠다’는 심사평을 했다고 한다. 『집을 찾아서』의 원고를 허영만도 보관하고 있지 않은 터라 신동우의 심사를 검증할 길은 없다. 어떤 만화가가 허영만의 등장으로 인해 만화를 ‘그만 그려야’했는지도 알 수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당대를 수놓았던 많은 작가들이 세대를 달리하며 ‘그만 그려야’했던 것과 달리 허영만은 여전히 당대 최고 수준의 작품을 내놓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일반에게 소개된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망치》는 작품의 우수성과는 별개로 그의 30년 만화이력을 돋보이게 하기에 충분했다. 『각시탈』의 액션에 흥분했던 할아버지와 『날아라슈퍼보드』의 저팔계 목소리를 흉내 내는 손자가 앞장섰고, 『카멜레온의 시』를 통해 풋사랑을 논했던 부부가 뒤따랐다. 2003년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의 개막작으로 선정 소개된 《망치》는 허영만을 기억하는 이들의 잔치판이었고 가족 3대를 만족시키는 최초의 국산 애니메이션이 됐다. 3대를 하나로 엮은 것은 멀티플랙스가 아니라 허영만이라는 원작자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만화가로서 허영만은 시대의 변화에 내둘린 적이 없다. 버려진 세월 한번 없이 대중의 선택과 환호를 받았다. 그런 까닭에 허영만의 영향력은 넓고도 깊다. 선배만화가 이두호 1943년 생, 만화가 세종대학교교수. 1961년 중학교 2학년 때 『피리를 불어라』로 데뷔, 이후 시대역사물에만 매진

는 ‘허영만 선생 만화의 재미는 연출에서 나와요. 코믹한 것은 아주 웃기고 심각한 것은 아주 심각하게, 정말 만능’이라고 한다. 만화평론가 손상익(1955년 생, 만화평론가 한국만화문화연구원장. 1991년 〈스포츠서울〉 신춘문예에 만화평론으로 등단)은 허영만에 대해‘1970년대 중반이후 가장 경쟁력있는 작가’로 ‘한국만화의 중심자리를 차지해왔다’며 이는 ‘작가의 철저한 프로의식’에 기인한다고 했다. 그가 꼽은 허영만 만화의 장점은 소재 선택의 특이성, 이야기구조의 간결성, 그림체의 대중성이다. 허영만 만화에 대한 이 같은 평가는 그의 문하에서 만화를 배워 유명작가가 된 이들이나, 그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후배 만화가나, 편집자, 만화평론가에 이르기 까지 동일하다.  출판 언론 영화 TV드라마 애니메이션 캐릭터 등등 허영만과 관계하고 있거나 그의 움직임을 주목하고 있는 이들 역시 허영만과 그의 만화를 그렇게 기억하고 평가한다. 

특히 후배 만화가 중에서는 허영만 또는 그의 만화로 인해 ‘만화가가 되기로 결심’했고 여전히 그를 ‘존경 한다’고 고백하는 이들이 많다. 패러디 성인만화 전문인 양영순은 기회있을 때마다 존경하는 만화가 1순위에 허영만을 올린다. 판타지 아동만화를 주로 하는 이충호(1967년 생, 만화가. 1985년 〈보물섬〉신인만화공모 입선, 최신오 문하를 거쳐 1992년 데뷔)와 학원스포츠 및 액션만화 전문인 박산하(1967년 생, 만화가. 1992년 〈월간챔프〉로 데뷔)는 『무당거미』 등 허영만의 만화를 보고 만화가가 될 것을 결심했다고 한다. 일상의 소소함을 짧은 만화로 전달하고 있는 황중환과 정중구 까지. 허영만 문하 출신 만화가를 제외하고도 많은 만화가들이 장르나 형식, 이념이나 가치관에 상관없이 허영만을 한국만화계의 어른으로 모시고 있고 그의 만화를 창작의 출발점으로 인식하고 있다. 

30년 동안 대중으로부터 격리된 적 없는 허영만은 스스로 버림받지 않기 위해 쉼 없이 노력했다고 말한다. 그를 칭송하는 이들 한 쪽 편에는 그에 대한 비판을 숨기지 않는 이들이 있다. 비판 세력이 집중하고 있는 부분은 다름 아닌 그의 ‘노력’이다. 만화계의 거장으로서 뿜어내는 아우라가 너무 강렬해서 작품에 쏟는 ‘과잉 노력’의 결과만 중시되고 흠은 감춰져 버린다는 것이다. 만화평론가 최 열은 ‘지나친 민족주의’를, 김이랑은 ‘만연된 일본 풍’을, 백정숙은 ‘무 비판적 현실인식과 보수적 이념성’을 비판의 논조로 삼았다. 후배만화가 K는 ‘자칫 소홀해지기 쉬운 만화가의 자기관리 부분에서 허영만은 선배로서 좋은 예를 보여줬다. 그러나 그가 진짜 뛰어난 부분은 사용자 입장에서의 화실관리, 작품생산관리’라고 말한다. 즉 허영만은 화실 운영을 통해 수많은 만화가를 배출하면서 만화계 내에 허영만 사단(일명 ‘허파’)을 일궈냈지만 ‘온갖 장르와 소재를 종횡무진하고 있는 작품목록만 보더라도 그 아래 억눌린 고스트 작가(타인 명의의 작품을 창작하는 작가)의 수를 헤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만큼 많은 후배들이 허영만에게 재능을 흡수당했고 그중 몇 명만이 남은 재능을 자신의 이름으로 펼쳐가고 있다는 주장이다. 또 선배만화가 P는 작품 외적 부분, 즉 만화계의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대외 활동에 적극적이지 않음을 탓한다. 

그의 ‘노력’자체를 만류하는 이들은 없다. 그러나 그가 발산하는 ‘철저한 프로의식’이 지나치게 상업적으로 대중의 감수성만을 쫓는 노력이라는 점,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공동창작(분업창작)이 결과적으로 급여 창작자의 권리와 이후의 창작 활동을 제약하는 노력이라는 점, 작품 내적 노력이 무엇보다 우선하지만 선배 만화가 또는 만화계의 어른으로서의 책무를 소홀히 한다는 점 등의 비판에는 적절한 답이 놓여야 한다. 

허영만은 창작 수련기에 이미 만화에 대한 재능을 인정받았다. 허영만의 재능은 남다른 것이었고 데뷔시기에 전설적 히트작품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우리만화사가 요동을 치며 작품의 소비방식을 바꿔갈 때 마다 그에 걸 맞는 작품을 발표했고, 매 작품이 곧 하나의 장르가 될 정도 였다. 그리고 그의 작업은 여전히 지속 중이고 ‘우리 만화계는 그를 통해 매번 새로운 창작마당을 얹고 있다.’ 그는 스스로 만화 열매를 맺는 나무이면서 대중문화라는 숲을 만들어 내고 있는 거대한 뿌리인 것이다. 즉 허영만을 바라보고 그 이전과 현재를 고민하는 일은 곧 한국만화 현대사를 조망하는 것이고, 한국 대중문화의 주요한 트랜드를 검토하는 일이 된다. 또한 허영만과 허영만 만화 이후를 검토하는 일은 곧 한국만화의 미래를 가늠하고 앞으로의 의제를 포착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윗몸말-허영만의 삶 


허영만이 아직 허영만이기 이전. 허영만이 아직 허영만이 아니어서 한국 현대만화의 거대한 기준점이 아니었던 시절. 그때를 출발로 허영만이라는 기준 이후를 모색해보자. 이를 위해 허영만 관련 문헌정보를 수집 정리하고 이를 토대로 관련인의 증언을 들었다. 이후 허영만과 다섯 차례에 걸친 인터뷰를 통해 기존 자료를 연대기적으로 구성, 이를 다시 주요 흐름별로 세분하여 당시의 만화사적 흐름과 비교 분석했다. 이 과정을 통해 구체화된 도표는  계보의 출발점인 가계도부터 창작 수련과정, 창작의 흐름 변화, 공동창작 및 문하생 계보 등이다. 각 구분별로 도출된 도표를 바탕으로 허영만과 허영만 만화의 구축 배경, 성장동인, 발전방향 등을 논한다. 


1) 가계도 

허영만은 1947년 6월 26일 전라남도 여천군 화양면(현 여수)에서 허 종씨와 박옥종씨 사이에서 8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본명은 허형만. 아버지 허 종씨는 1913년 생으로 일제(日帝) 때부터 순사를 지냈고 해방이후로도 순천 지역에서 경찰로 일했다. 이후 여수로 이사 가면서 교육행정직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지물포(식기류 지역총판), 멸치어장 등 자영업을 했다. 허영만은 아버지에 대해 ‘사람들이 흔히 떠올리는 일본 앞잡이 식 못된 순사는 아니었다. 오히려 자유주의자였다.’고 한다. 낚시와 술, 놀러 다니는 것과 농담을 좋아해서 주위에는 항상 웃음꽃이 피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아버지의 모습이 허영만과 가족에게는 좋게 다가오지 않았던지 허영만은 ‘아버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관련 허영만의 삶 중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은 1948년 여수 순천 일대에서 벌어진 ‘10・19 사건(속칭 여순반란사건)’일 것이다. 이 사건은 우리 민족사의 얼룩진 부분임과 동시에 허영만과 그의 만화를 읽는 주요한 출발점이기도 하다.



1945년 해방 이후 한반도는 좌익과 우익의 이념대립이 팽배한 상황이었다. 미군정은 일제의 식민통치기구를 복구, 친일 관료를 재기용했다. 한 동네 사람들끼리도 이념과 체제에 따른 갈등이 심했다. 남북분단이 고착화되면서 남한만의 단독 정부수립이 기정사실화 될 때 쯤 제주에서 ‘4・3 사건(속칭 제주폭동사건)’이 발생했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여수 지역에 주둔했던 국군 제14연대가 출동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여수항으로 출발하기로 되어 있던 14연대는 ‘38선은 인민군에 의해 무너졌으며 서울은 이미 함락되었다. 지리산에도 1만 여 명의 인민군이 포진하고 있다. 세상은 달라졌다. 살고 싶은 자는 궐기하여 반동분자를 처단하고 새 세상을 맞자. 불응하는 자는 인민의 이름으로 처단 한다’며 반란을 일으켰다. 

1천 여 명 규모의 반란군은 경찰서 및 여수지역 주요 관공서를 장악하고 인공기를 게양했다. 인민위원회와 보안대를 급조하여 약 4만 명의 양민이 모인자리에서 각계인사 60여 명을 사살하는 등 만행이 벌어졌다. 14연대는 순천 남원 광주까지 세를 확대했고, 육군총사령부는 반군토벌전투사령부를 광주에 설치 계엄령 선포와 함께 반란군 진압을 시작했다. 여기에 허영만의 아버지 허 종씨도 경찰 측 반군토벌대로 참가했다. 반군과 토벌군이 일보일퇴를 할 즈음 허 종씨는 퇴각하는 반군의 총 세례를 받아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한다. 10월 27일 경 토벌군에 의해 외형적으로 진압은 완료됐으나 반군 중 일부는 덕유산 기슭으로 숨어들어가 빨치산 식 유격투쟁을 벌였다.

이 사건에 대한 교과서적 해설은 ‘공산당 및 좌익세력 활동이 불법화되자 지하당이 조직되어 남한의 각계각층에 공산당 프락치를 심었는데 그들이 4・3사건과 10・19사건을 주도했고’, 양민학살과 만행을 저질렀으나 미군정이 이들을 진압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두 사건의 진압과정에 대해서는 사뭇 다른 증언과 주장이 있다. 양민학살과 방화 등 상당부분은 반군이 아니라 토벌군이 자행했다는 것이다. 피아식별이 불가한 상황에서 반군색출을 위해 토벌군이 겨눈 총부리는 양민을 향하기도 했다는 것. 

‘10・19 사건’은 ‘제주 4・3 사건’과 함께 명확한 진상규명이 이뤄지지 않은 민족적 비극이다. 사건의 도발 배경 및 사후 문제 등에 있어 많은 부분이 베일에 쌓여있다. 다만 이 사건이 군내부의 좌익세력에 의한 반란사건 임에도 이를‘여순반란사건’이라 칭하고 있어서, 마치 여수와 순천 지역민들에 의한 반란 사건처럼 이해 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14연대 반란사건’으로 개명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부 받아들여져 ‘10・19 사건’으로 공식 명칭이 바뀐 정도이다. 

여수에서만 1천 여 명이 살해 된 이 사건으로 인해 여수와 순천의 양민들은 ‘반란군에 의한 광란의 시간/ 진압군에 의한 학살과 방화의 시간’을 현실로 받아들였고 ‘사람 많이 모이는데 가지 마라/ 바른 소리하지 마라/ 자식 교육 많이 시키지 마라’는 등 혹독한 상실감에 시달려왔다. 당시 순천에서도 여수와 비슷한 규모의 학살과 방화가 있었다고 한다. 순천 출신인 소설가 김승옥은 ‘국민학교 시절 반란사건으로 무수한 이웃들이 시체가 돼 학교운동장에 널려 있는 것을 보고 평생 잊을 수 없는 충격’을 받았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해방직후 전라남도는 미군정의 힘이 닿지 못하고 좌익세력의 군대조직인 인민위원회가 득세를 보였던 지역이다. 곧이어 미군정 하에 국군이 모집되었으나 광복군부터 일본군 출신까지, 정치범부터 노동당 당원까지 입대하여 오합지졸이었다. 한편 미군정의 용인 하에 일제치하의 경찰조직이 그대로 재기용됐다. 허영만의 아버지도 이 과정에서 다시 경찰로 복직했다. 경찰은 군 내부의 좌익 사상범들을 주목했고 군은 친일 경찰에 반감을 보였다. 또한 경찰이 좌익 중심의 인민위원회를 강제 해산시키면서 이 지역 경찰은 군과 민 모두로부터 외면 받는 상황이었다. 이런 배경을 통해서 보면 10・19 사건은 일정부분 예견되었던 것이다. 

좌익 이념이 강했던 지역민, 새로운 체제를 형성하고 있었던 국군과 친일 경찰. 이들 간의 갈등은 곧 좌익세력의 군부 내 침투로 인한 반란으로 이어졌다. 많은 수의 양민이 좌익 반란군에 가담했고 경찰은 토벌군이 되어 지역 양민을 진압해야 했다. 한 가족 중에서도 형은 반란군으로 동생은 토벌군으로 나섰다. ‘낮에는 친가 쪽 편을 들어 토벌군이 되고, 밤이면 외가 쪽 편을 들어 반란군’이 됐던 것이 이 지역 사람들이다. 

당시 세 살 박이였던 허영만은 이 사건을 직접적으로 겪지 못했고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허영만은 그의 아버지가 경찰직을 그만두고 순천에서 여수로 이사한 후 여수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순천과 여수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성장기에 주위 어른들로부터 이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고 한다. 한 동네에서 동네사람들끼리 반란군과 토벌군이 되어 수많은 사상자를 내며 싸운 사건. 그 갈등의 이면에 경찰이 있었고 허영만은 경찰 가족이었다. 허영만은 몇몇 인터뷰를 통해 ‘아버지에 대해 떳떳할 것도 없지만 부끄럽지도 않다’고 했다. 아버지는 자식에게 자신 같은 삶을 살지 말라하고 자식은 그런 아버지의 삶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지만, 결국 자식은 커가면서 자신에게서 아버지를 발견해가는 존재이다. 온 동네를 공포에 몰았고 오래도록 한 서리게 만든 이 사건의 뒷 이야기를 하나씩 알아가게 됐을 때, 아버지가 여기에 연관되어 있음을 알았을 때 성장한(공인이 된 이후로도) 허영만의 고뇌는 남달랐을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한 허영만의 인식은 여러 작품을 통해 등장한다. 정치적 상황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는 작품으로는 《오!한강》을 들 수 있고, 시대적 상황을 아우른 작품으로는 《타짜》1부, 2부가 있다. 또 허영만 만화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아버지’ 캐릭터와 ‘부정(父情)에 대한 혼란’‘소유욕에 대한 상실감’‘인간에 대한 허무’‘무정부적 정서’‘이념에 대립에 대한 회의’등에 대한 테마는 이 사건과 가족사에 깊게 연결되어 있다.  

허영만이 기억하는 아버지는 가족에게는 무심하고 주변과 자신에게는 관대하여 일 벌리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곧바로 이어진 한국전의 악몽을 겪고 난 뒤 그의 아버지는 ‘총 쏘는 일이 싫다’며 교육공무원으로 이직했고 불우한 학생을 도왔다고 한다. 이후 지물포를 운영하면서 생활이 좀 안정되나 싶었으나 멸치어장으로 모든 재산을 탕진하면서 가족들은 ‘해초죽으로 끼니를 때워야하는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그의 어머니는 ‘말수도 웃음도 별로 없으신 분’으로 묵묵하게 아버지와 가족을 위해 사셨다. ‘까탈스런 시어머니’를 모시고 ‘8남매를 키우느라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아버지가 지물포를 운영하던 시절 외에는 11명의 식구가 먹고 사는 것도 넉넉하지 못한 형편이었다. 허영만은 어머니의 ‘몸빼바지는 돈이 마르지 않는 요술주머니’같았다고 기억한다. 어머니는 근검절약했고, 필요할 때는 꼭 쓸 돈을 마련해 줬다는 것. 8남매 중 누나 허순자씨는 교사였고 형 허치만씨는 대학에 다녔다. 셋째였던 허영만은 이런 집안 분위기 때문에 ‘고교시절 대학진학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고등학생 시절 아버지의 사업이 기울자 집안형편은 더욱 어려워져서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만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아내 이명자씨와는 이향원화실에서 일하던 시절 음악다방에서 만났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아내가 직접 장인을 설득해서 조촐한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고 현재까지 가장 든든한 후원인 역할을 해주고 있다고 한다. 최근 허영만 이명자 부부는 시간 있을 때마다 야영과 산림욕을 떠난다고 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명자씨는 함박여자중학교에서 음악선생으로 교편을 잡았었다. 허영만은 이명자씨와의 사이에 아들 딸 자매를 두고 있다. 

첫째 아들 석균(1976년 생)군은 연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한국IBM에서 일하고 있고, 둘째 딸 보리(1982년 생)양은 서울대와 같은 대학원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허영만이 초창기 어린이 교양잡지 〈어깨동무〉에 만화를 연재하던 시절 본권과 부록에 동시 연재를 하고 있어서 동일인 이름으로 3편의 작품을 연재하는 것이 마땅치 않았던지 「밀림의 왕자」 「짚신왕자」 등의 작품 연재분에는 작가 이름을 ‘이석균’이라 표기했다. 이때 허영만이 사용한 필명 ‘석균’이 아들의 이름이다. 또 보리양은 허영만이 『한국대표만화가 10인 단편집』에 발표한 단편 「해탈이」에서 키우던 강아지를 캐릭터 상품으로 만들어 큰 성공을 거두는 미대 학생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2) 창작수련도 


허영만이 처음 접한 만화는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학생전문잡지 〈학원〉에 연재됐던 김용환 1912년 생, 만화가. 1940년 대 일본에서 삽화가 등으로 활동하다 귀국, 코주부라는 캐릭터로 50~60년 대 우리 만화계의 최고작가로 활약

의 「코주부삼국지」였다. 교사였던 둘째 누나가 집에 가져온 이 잡지를 통해 허영만은 이후 그의 인생을 지배하게 되는 만화와 첫 대면을 한다. 허영만은 이 작품으로 친구들과 함께 퓰립북(종이 여러 장에 조금씩 다른 그림을 그려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한 책) 형식의 ‘엉터리 애니메이션’을 만든 적도 있다고 한다. 

김용환은 한국 현대만화의 출발을 이끌었던 선구적 인물로 ‘코주부’라는 기념비적 캐릭터를 만들어 낸 만화가이다. 일본에서 정규 미술수업을 받은 김용환은 초기 ‘기타코지北宏二’라는 이름으로 일본만화잡지 등에서 활동 했다. 당대 최고의 필력을 자랑하던 김용환은 어수선한 시대의 굴곡에 끌려 다니며 친일-좌경-극우를 오가는 ‘이데올로기 외줄타기를 연출’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김용환은 미국에서 쓸쓸하게 말년을 보내다 1998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작품은 상당부분 유실됐지만 당대의 가장 충실한 독자였던 후배만화가들의 가슴 속에 교과서로 남아있다. 허영만이 초등학생 시절 김용환과 맺은 인연은 몇 순배를 거쳐 만화수련기에 다시 그를 찾아온다. 김용환은 허영만의 스승에 스승에 스승 격이 된다. 



허영만은 중학교 시절 잠깐 영화에 빠져 시들해졌던 때를 빼고는 늘 가방에 만화를 넣고 다녔다고 한다. 그는 이웃한 만화방을 제 집처럼 드나들었다. 명랑학원 장르의 인기 주자였던 방영진의 만화와 화풍이 세련됐던 김 석(1945년 생, 만화가. 어린이 만화 다수 창작, 발표작 미상, 문하에 허영만 허청운 등이 있었다) 등의 작품에 빠졌고 이향원(1944년 생, 만화가. 남산만화연구소 2기 출신, 1960년 단행본으로 데뷔)과 강철수(1944년 생, 만화가. 1960년 단행본으로 데뷔)의 초기 극화도 즐겨봤다고 한다. 고교 시절 이미 만화가가 되기로 결심을 했지만 중학교 졸업 무렵부터는 만화방 보다는 영화와 극장에 매달렸다고 한다. 

허영만은 당시를 떠올리며 근처에 사는 여학생에게 연정을 느끼게 된 후로 ‘만화방에 가는 것이 부끄러워 졌다’고 했다. 그 대신 서부영화와 멜로영화를 즐겨 봤다면서 어머니가 준 용돈 대부분을 만화와 영화 보는 데 ‘투자했다’고 한다. 환약을 입에 달고 다녔을 정도로 허약했던 성장기였고, 공포영화는 볼 엄두도 내지 못하는 심약한 성격. 이런 그에게 만화와 영화는 감수성을 키워주는 한편 강한 의지를 심어주는 대리 체험 공간이 됐다. 

허영만은 미대를 갈 요량으로 미술부원들과 함께 데생과 수채화 등의 습작에 열을 올렸다. 그러나 친구들은 허영만의 만화 실력에는 탄성을 내질렀지만 수채화에는 그저 그런 반응이었다. 때마침 동기 중 한명이 부산에서 만화가로 활동 중이던 토니 장(19??년 생, 만화가. 1960년 대 부산 지역에서 손의성 오명천 등과 함께 활동한 극화체 만화가)으로부터 약간의 그림 수업을 받아와서는 한껏 멋을 냈다고 한다. 또 ‘먹고 살만했던’ 형편이 아버지의 사업실패와 함께 끼니를 걱정할 정도가 되면서 대학 진학은 남의 이야기가 됐다. 

허영만은 가족 학교 친구 등 사방에 만화가가 되겠다고 말하고 수업시간은 물론 방과 후에도 드러내 놓고 만화 공부를 했다. 만화방에 갈 때도 전과는 다른 마음가짐으로 임했다고 한다. 단순히 즐기기 위한 만화보기가 아니라 어떤 선생에게 어떤 만화스타일을 배워야 할지를 찾기 시작했던 것이다. 

1965년 허영만은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을 틈타 화풍이 세련됐던 서울의 김석화실에 찾아갔다. 그 전에 우편으로 직접 그린 그림을 보내는 등 상경 허락을 받아놨었다. 그러나 허영만은 몇 일 지나지 않아서 김 석의 세련된 화풍이 일본만화를 그대로 보고 그린 것에서 온 것임을 알게 됐다. 채 1주일이 되지 않아 여수의 집으로 돌아 온 허영만은 많은 고민에 빠졌다. 일본만화 모작은 당시 만화계의 풍토에서 자연스러운 것이었으나 이를 당시 독자들이 알 길은 없었다. 전문적인 직업인으로서 만화가가 되기로 했던 허영만이었으나 만화계 내부의 그 같은 관행까지 이해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멋진 서부활극을 자기 스타일로 그리고 싶었던 허영만은 낙담했다. 

허영만은 집으로 돌아와 졸업할 때까지 스케치 공부를 하면서 기본기를 닦았다. 그리고 졸업과 함께 다시 서울로 올라가 박문윤의 문하로 들어간다. 허영만은 만화방에서 박문윤의 만화를 발견하고 그간 그린 그림을 미리 우편으로 발송했었다. 박문윤은 그런 그의 상경 요청을 흔쾌히 받아줬다. 박문윤은 허영만에게 일반적인 문하생과는 다른 대접을 해줬다. 보통은 지우개질 등 허드렛일부터 하게 되는 데 그에게 맡겨진 일은 처음부터 데생작업이었다. 허영만은 순정만화를 주로 그렸던 박문윤화실에서 만 1년가량 생활했다. 

박문윤은 1944년생으로 1947년생인 허영만의 형뻘 되는 연배였다. 『봄의 노래』 등 순정만화를 주로 발표했고 박평일 등의 필명과 대필 작가로도 활동했다. 일본만화가 치바 데쓰야(千葉てつや, 1939년 생, 일본 만화가. 초기 소녀만화로 데뷔했다가 주간 소년 메거진에 1968년 ~1973년 까지 권투만화〈내일의 죠〉를 연재하면서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가 됐다)의 작품을 김윤명이 『눈물의 세레나데』라는 모작으로 발표한 적이 있는데 이 작품의 대필도 박문윤이 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박문윤은 당대의 만화가 중에서도 잡학다식했던 것으로 유명하고 얼마 전까지 영화 미술 등과 관련된 다양한 작업을 해 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허영만은 박문윤을 첫 스승으로 섬기고 있으며 박문윤화실에서 ‘만화가가 되기 위해서는 잡기에 능해야 하고, 만화만 잘 그려서 될 일이 아니라 많은 지식을 습득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고 한다. 특히 음악이나 미술 등에 대한 식견을 넓힐 수 있었던 시간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허영만이 ‘선생의 타고난 게으름’을 질책할 정도로 이 시기의 박문윤은 시대감각에 맞는 작품을 발표하지 못했고, 여수 만화방에서 봤던 유의 눈에 띄는 작품 활동을 하지 못했다. 

이 시기를 전후로 박문윤은 조원기(1942년 생, 만화가. 1959년 단행본으로 데뷔, 줄 곧 순정만화 창작했다. 현재는 미국에서 부인과 함께 애니메이터로 활동 중이다), 김윤명 등의 대필 작가로 활동한다. 당시 만화계는 전반적으로 초기 형태의 순정만화가 붐을 이루고 있었는데 대표적 작가로는 민애니(1945년 생, 만화가. 1962년 단행본으로 데뷔, 60년대 순정만화계를 대표하는 인기작가),이범기, 조원기 등이 있었다. 조원기는 고등학교 2학년 때 독학으로 단행본 『백조의 꿈』을 발표하며 만화계에 입문한 실력파. 박문윤의 인기가 시들 무렵 조원기의 인기는 상승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이때 자신의 문하에 있던 동갑내기 엄희자와 결혼을 하면서 최초의 만화가 부부로도 유명해졌다. 엄희자(1942년 생, 만화가. 남산만화연구소 1기 출신, 조원기 문하를 거쳐 1963년 단행본으로 데뷔, 84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기 전까지 약 300 타이틀의 작품을 창작, 한국순정만화사의 구분점을 엄희자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을 만큼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이제 막 데뷔작을 발표하고 인기가 높아지던 시기로 오히려 조원기보다 더 많은 작업량을 소화해야 했다.

박문윤의 작품 활동이 뜸해지자 화실 식구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박문윤은 허영만 등과 팀을 이뤄 조원기화실 일을 했다. 당시 조원기화실은 박문윤 허영만 등이 포진한 조원기팀과 엄희자의 동생 엄미자와 그의 남편 이성훈 등이 포진한 엄희자팀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결과적으로 허영만의 스승이었던 박문윤은 조원기팀의 데생을, 허영만은 박문윤의 추천으로 엄희자팀의 데생을 담당하게 됐다. 한때 두 팀이 한달에 발표한 만화 작품 수는 무려 20여 권에 달했다고 한다. 이런 다작 시스템은 다수의 급여 창작자를 필요로 하는 구조였고 그만큼 많은 수의 예비만화가를 배출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조원기 엄희자팀에서는 박문윤 허영만 이성훈 엄미자 외에도 최경탄 차성진 하영조 김숙 방재호 등의 만화가가 배출됐다. 

허영만이 엄희자의 데생을 했던 시기는 1967년. 약 8개월가량이다. 이후 동물만화 『투견』 시리즈로 유명세를 타고 있던 이향원이 허영만을 찾았다. 이향원은 박문윤과는 친구사이로 평소 허영만의 그림실력을 아껴서 제대로 가르쳐보고 싶었다고 한다. 이향원은 허영만에게 ‘언제까지 순정만화만 그릴거냐’며 자신의 문하로 들어오라고 권했다. 허영만은 당초 서부활극을 그리고 싶어 했다. 이향원의 작품은 그전부터 눈여겨 봐왔고 순정만화 일을 해왔지만 서부활극에 등장할 말을 수천 번도 더 그렸기 때문에 동물만화에는 자신이 있었다. 허영만은 지체 없이 사람 좋기로 소문난 이향원의 문하에 들어간다. 그리고 무려 7년 여 간 이향원화실에서 그림을 그렸다. 이향원은 차돌이 세모 꼭지 벤 검둥이 등 밝은 성격의 주인공 캐릭터로 유명하다. 동물만화 가족만화 야구만화 등에 두루 강한 면모를 보였고 문하생으로는 고유성 장윤식 등이 있다. 

허영만은 이향원화실에서 수없이 많은 작업을 경험했다. 많은 작업량으로 인해 색다른 시도를 할 수 있었다. 이향원은 허영만을 신뢰했으며 많은 재량권을 주었다. 이향원은 허영만에게 서른 이전에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어서 독립하라고 가르쳤고 그는 이향원화실에서 만화가 허영만의 초기 스타일을 구축해냈다. 허영만은 이향원의 작품을 하면서도 자신의 작품을 쉼 없이 계획했고 1973년 경 독립을 결심한 뒤 1974년 데뷔작을 발표한다. 이향원화실을 통해 만화가 허영만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허영만은 잠깐 들렀던 김 석화실을 제외하면 박문윤 엄희자 이향원화실을 거쳐 만화계에 공식 데뷔 했다. 허영만의 세 스승에게는 공통점과 함께 향후 허영만 만화의 전개부분을 살피는데 주요한 대목을 가늠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우선 박문윤은 엄희자와 함께 순정만화가로 활동했다. 또 두 만화가는 국내 최초의 만화학원으로 기록되고 있는 ‘남산 만화연구소’1기생이다. 당시 유명만화가들을 중심으로 개설된 이 교육과정의 강사로는 신동헌(1927년 생, 애니메이터 만화가. 50년 대 최고의 만화가로 활동, 1960년 신동헌 프로덕션을 설립하고 1967년 국내 최초의 장편 만화영화 애니메이션 《홍길동》 제작) 신동우 형제, 김정파 송영방 임수 김경언 등이 있었다. 모두 특정 장르에서 뛰어난 활동을 전개했던 당대 최고의 만화가들이다. 이들 중 박문윤과 엄희자에게 영향을 미쳤을 순정만화가 출신의 강사로는 김정파(1924년 생, 만화가. 1950년 대 속칭 ‘딱지만화’ 창작을 통해 데뷔, 당시 최대 출판사였던 부엉이 문고의 전속작가로 다작을 기피한 것으로도 유명하다)를 꼽을 수 있다. 『흰 구름 가는 곳』의 김정파는 이 만화에서 ‘순정(純情)’이라는 타이틀을 처음 사용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아동 대상의 캐릭터 만화 깨막이 시리즈로도 유명하다. 이 교육과정의 1기생 중 이후 왕성한 활동을 전개한 우등생으로는 박문윤과 엄희자를 비롯해서 한희작 임웅순 김마정 등이 있다. 박문윤과 절친한 친구사이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허영만의 세 번째 스승 이향원은 이 교육과정의 2기생 출신이다. 이들을 함께 가르쳤던 신동헌은 그 이전부터 도제식 만화교육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만화가였다. 신동헌은(신동우의 형), 국내 최초의 극장용 애니메이션 《홍길동》 제작 등 애니메이터 또는 클래식 칼럼리스트로도 유명하지만 그 자신이 당대 최고의 명랑 만화가였다. 신동헌은 허영만이 학창시절 즐겨봤던 명랑 학원 만화의 대가 방영진의 스승이고, 어린시절 접했던 『코주부 삼국지』 김용환의 제자가 된다. 

허영만 만화의 초기 형성 배경이 될 법한 세 스승과 그들의 또 다른 스승. 김용환을 출발로 신동헌 방영진 김정파 박문윤 (조원기) 엄희자 이향원까지. 닮은 듯 전혀 닮지 않은 이 만화가들의 나열은 이후 허영만 만화의 화려한 폭과 깊이를 가늠하게 하는 단초가 된다. 순서대로 삽화와 풍자정신, 캐릭터와 애니메이션, 시츄에이션 개그와 유머, 감성과 순정성, 전문 소재와 이종 접합, 눈물의 드라마와 로맨스, 가족드라마와 동물극화 등에 있어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만화가들이다. 허영만은 우리만화계의 하향식 도제 시스템을 횟수로 10년간 체험하며 이들의 장점을 자신의 것으로 펼쳐낸다.


아랫몸말-허영만 만화의 삶 


허영만이 유명 만화가의 문하에서 생활했던 60년대 중후반기는 우리만화계 최대 호황기라고 할 법하다. 당시 만화책의 출판규모는 월 1,200 종 150여 만권이었다. 전체 출판부수에 있어서 단일 종목이었던 만화가 일반 서적 총량보다 많았던 것. 호황은 만화계의 살림규모와 형편을 높여놨지만 그만큼 따가운 눈총을 받게 했다. 

시장의 요구에 비해 작품 생산량이 턱없이 부족했던 탓에 터무니없는 수준의 ‘만화도 아닌 만화’가 등장했다. 특히 합동문화사라는 출판사가 군소 출판사를 통합하고 대본소 중심의 만화유통망을 독점적으로 관리하게 됨에 따라 이런 풍토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 유통을 장악한 합동문화사는 인기작가의 작품 공급 수를 제한하고 무명작가의 작품을 같은 가격에 끼워 팔았다. ‘종이에 잉크자국만 있으면 팔려 나갔다’는 당대의 속설은 유통을 장악했던 합동문화사의 힘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인기 만화가이건 신통치 않은 신인 만화가이건 만화를 하겠다는 사람들은 모두 합동문화사의 통제를 받았고 그들의 장삿속을 채워줘야 하는‘평준화 정책’에 훈련 받았다. 굳이 공들여 만화를 그릴 것이 아니라 얼추 모양만 만들어서 정해진 권수를 채워주면 규정된 부수가 유통됐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존재할 수 없었다. 대신 합동문화사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만화계에는 발도 들일 수 없게 됐다. 그런 이유로 이 시기에 현재까지 우리만화계가 안고 있는 모든 구조적 문제와 악행들이 쏟아져 나왔다. 대여유통 시스템, 일본만화 모작, 인기만화 흉내내기, 대필창작, 문하생시스템을 조직화한 다작, 출판사의 원고료 가불 등등. 

합동문화사의 유통시장 독점은 만화 출판물의 질적 수준을 바닥으로 몰고 가는 역할을 했다.  1967년 사회적으로‘저질만화시비’가 일었고 이어 1968년 대통령 박정희는 불량만화 단속을 지시했다. 당시 문화공보부는 한국아동만화자율회를 해체하고 윤리위원회를 설립 ‘한국아동만화 윤리강령’과 ‘한국아동만화 실천요강’을 제정, 만화원고 사전심사를 시행한다. 이중 출판물의 제작과 관련된 웃지 못 할 조문도 있다. 만화의 용지를 선화지에서 갱지로 바꾼다. 판형을 국판에서 4X6배판으로 바꾼다. 편수를 무제한에서 상중하 3권으로 제한한다. 50쪽 전후였던 쪽수를 130쪽 이상으로 한다는 등의 조문은 정부의 간섭이 도를 넘었음과  함께 당시 우리만화출판계가 얼마나 마구잡이로 책을 만들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또 이 시기에 관 주도로 사단법인 한국아동만화가협회가 결성이 되고 협회에서는 만화가 협회원의 자격심사를 시행했다. 자격심사의 1차적 기준은 ‘만화가도 아닌 만화가를 걸러내는 것’ 이었다. 당시 다수의 만화가 일본만화를 무작위로 복제했던 것이었고 ‘복사 기술자’가 만화가 행세를 했었다. 이 자격심사는 1977년에는 자격시험으로 바뀌어 국어 상식 등의 과목에 응시, 합격한 자만이 협회에 가입할 수 있게 됐다. 

정부의 정도를 넘어서는 시장 개입과 언론의 여론몰이, 관변 협회가 마련한 나름의 자구노력에도 불구하고 만화계에는 예사롭지 않은 사건이 지속적으로 발생했다. 그러나 만화시장은 오히려 더 견고해져서 1975년 통계에 의하면 2개의 만화출판사(한국일보가 자회사를 설립하여 합동문화사의 독점시장에 개입, 이후 상호 협정을 통해 시장을 양분해 가졌다)가, 7천7백여 종 1천만 여 권의 만화책을 발행했고, 전국적으로 2만 여개 소의 대본소에 공급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2001년 기준 만화책 4천만 여 권 발행). 

이 시기를 전후로 한 ‘저질만화시비’ 관련 사건으로는 1972년 한 어린이가 만화 내용에 나오는 ‘환생’을 믿고 목매 숨진 사건, 1975년 미성년자의 대본소 여주인 피살사건, 1976년 만화를 흉내 내 목매 죽은 어린이 사건 등이 있었다. 사건이 있을 때 마다 민-언-경-검-관이 각종 방식으로 만화사냥을 벌였고 만화는 사전검열 대에 올려져 토막살해를 당했다. 


1) 창작계보도 


허영만이 겪은 도제식 시스템은 최근 만화교육과정의 고급화, 다양한 지면과 인터넷 등 대안 매체의 등장으로 상당부분 위협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허영만 데뷔이전과 이후 그리고 최근까지도 우리만화계의 가장 폭 넓은 창작 인력 교육 시스템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이 같은 도제 시스템은 계파의 형성으로 건전한 창작 풍토를 저해하는 요인이 되는가 하면, 스타일 세습화(자신의 이름과 캐릭터 까지 후배나 제자에게 물려주는 경우도 있다) 등의 문제를 양산하기도 한다. 당시 만화가가 되기 위해서는 스승의 밑에서 일을 도우며 스승이 ‘머리를 올려주기 전(데뷔할 매체와 방법 등을 설정해주는 일)까지’는 그의 조치에 따라야 했다. 허영만이 만화계에 입문했던 시기, 도제식 시스템은 절대적인 형식의 입문과정이었고 이를 거스르는 것은 곳 ‘만화밥’을 먹지 않겠다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나쁜 물에서도 좋은 고기는 자라는 법이다. 허영만은 만화가를 1회성 상품 생산도구 정도로 인식했던 독점적 유통 시스템과 도제식 시스템을 통해 많은 것을 얻었다. 하지만 이는 그대로 허영만의 앞길을 막는 역할이기도 했다. 

허영만은 횟수로 10년에 가까운 도제식 시스템을 겪었다. 허영만의 공식 데뷔는 1974년, 그의 나이 28살 때이다. 당시 만화계의 분위기는 앞서 논한 것과 같이 다수의 만화가를 필요로 했던 상황이다. 만화천재라고 할 법한 소양을 지녔던 고등학생 만화가도 흔했던 때였다. 그러나 허영만은 쉽게 데뷔 무대에 오르지 못했거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에 비해 자질이 부족했던 화실 후배들이 데뷔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만화가의 문하 수련과정은 일반적으로 ‘뒤처리→배경(자연물, 현대물)→펜터치→데생’등의 순서를 거친다. 허영만은 박문윤 문하에서 이미 2-3년 뒤에나 담당해야 할 최상위 과정을 수행했고, 당대 최고의 인기작가 엄희자 문하에서도 데생을 했다. 이향원 문하로 옮긴 뒤에는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자율권까지 확보하면서 이미 신인 만화가 이상의 역량을 발휘했다. 그럼에도 그 호황기에, 만화가가 절대 부족했던 시절에 허영만이 이향원 문하에서 그토록 오랜 잠복기간을 거친 것은 왜일까? 이는 허영만의 재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이향원에게 있어 허영만이 그만큼 필요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이와 관련 허영만은 만화가협회원으로 등록하기 위한 자격심사에서 떨어진 적이 있었다. 심사위원들이 허영만이 이향원의 그림을 흉내 낸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당시 심사위원으로는 고인이 된 무협만화가 이재학씨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허영만은 이 시기를 전후로 이재학씨의 이름으로 『히라소니』라는 작품을 대필했다).

초기 이향원화실의 스타일에 따라 그림을 그렸을 허영만은 오래지 않아 이향원의 만화 캐릭터를 자신의 스타일대로 변형 발전 시켰다. 그것이 당시 허영만이 할 수 있었던 최고 수준의 창작이었겠고, 자격 심사 시에 제출한 그림 역시 그 수준을 넘어서지는 못했을 터. 심사위원들은 이향원의 이름으로 본 만화를 떠올리며 허영만이 그의 만화를 따라 그렸다고 판단했을 법하다. 이향원은 직접 나서서 허영만의 자격심사 통과를 주장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모양이고, 허영만은 변형된 이향원의 만화가 아닌 완전히 새로운 허영만의 만화를 만들어 내야 했다. 물론 그는 자신만의 만화로 재심사를 통과했다. 그러나 본류는 어쩌지 못하는 법. 이향원의 만화에서 우리는 어렵지 않게 허영만을 발견할 수 있듯이, 허영만의 만화에서 이향원을 발견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한편 이향원은 『허리케인 죠』로 유명한 치바 데쓰야의 작품을 보고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실제로 이향원이 향 원이라는 필명으로 작업한 초기 극화에 비해 이후의 극화는 거친 부분이 많이 사라졌다. 『허리케인 죠』는 허영만이 이향원화실에 입적한 해인 1968년 발표된 작품으로 열혈권투만화라 할 수 있다. 

합동문화사는 60년대부터 80년 초반까지 우리만화계의 유통을 장악하고 독과점에 따른 횡포를 자행했다. 70년대 초반 한국일보는 소년한국도서라는 자회사를 설립, 독과점에 따른 횡포를 비난하며 시장진입을 꾀했다. 결과적으로 양사는 담합을 하여 시장을 분할독점하는 체제로 입장을 조정했다. 

임 창을 주축으로 한 몇몇 만화가들은 이 같은 독점 구조의 문제점을 성토하며 대안 형태의 출판사를 꾸리기도 했으나 번번이 실패로 끝났다. 이향원도 수차례에 걸쳐 독점체제 타파를 위한 연대활동을 벌였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대안 출판(代案 出版)을 선언했던 만화가들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음은 두말이 필요 없다. 

허영만은 만화계 사상 최대 호황기에 수많은 작품에 참여하면서 신인 이상의 실력을 쌓았지만 자신의 이름을 내거는 일이 쉽지 않았다. 데뷔작을 내려면 합동문화사나 소년한국도서와 계약을 해야 하는데 스승인 이향원이 이들과 적대적인 싸움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다. 출판사들 입장에서 허영만은 이향원이라는 ‘불순분자’의 제자였던 셈이다. 이런저런 고민 끝에 허영만은 계파에 구애 받지 않는 공개 경연장을 데뷔 무대로 설정했다. 당시 소년한국도서는 작가 발굴을 위한 방편으로 대규모 공모전을 시행했는데 허영만이 1974년 2회 대회의 수상자로 선정됐다(소년한국도서 1회 공모전 수상자는 허 영, 3회 수상자는 김수정(1950년 생, 만화가 경영인. 1975년 공모전을 통해 데뷔, 만화 주인공 캐릭터 중 최고의 상품 경쟁력을 지닌 아기공룡 둘리를 직접 다양한 상품으로 개발, 경영자로서도 뛰어난 활약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다.



데뷔작 『집을 찾아서』로 만화가라는 이름을 갖게 된 허영만은 3년 안에 만화가로서 대성할 것을 결심했다고 한다. 그러나 허영만은 『총소리』『빛 좋은 개살구』에 이은 네 번째 작품 『각시탈』을 발표하며 데뷔 3개월 만에 인기작가의 자리에 우뚝 서게 된다. 도제시스템의 그늘을 벗어내고 찾은 선택이고, 독점유통시스템의 일반적 만화 등용 시스템을 벗어나서 얻은 쾌거였다.   

만화가 허영만의 분신과도 같은 캐릭터 이강토는 그의 세 번째 작품 『빛 좋은 개살구』에 처음 등장한다. 허영만은 자신의 만화를 대표할 수 있는 주인공 이름을 구상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애국가를 듣던 중 ‘강산’이라는 단어에 착안해서 둔탁한 어감이 나는 강토를 주인공 이름으로 정했다고 한다(『태평양은 알고 있다』에서는 강산이 주인공으로 강토와 함께 등장한다). ‘이강토=허영만’이라는 공식은 『각시탈』 시리즈를 통해 성립됐다. 『각시탈』 시리즈는 1974년 소년한국도서에서 50페이지 전후의 국판으로 처음 발행됐고 30권 분량의 후속 시리즈가 인기리에 출간됐다(이후 다양한 재판본이 나왔으나 현재 이 시리즈를 온전하게 보관하고 있는 소장자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각시탈』은 평소에는 바보 같던 주인공 이강토가 일제 치하의 탄압 받는 민족을 돕기 위해 탈을 쓴 슈퍼영웅으로 등장한다는 설정을 지니고 있다. 탈 쓴 슈퍼영웅의 예는 1968년 발표됐던 김종래 (1929년 생, 만화가. 1952년 만화잡지 〈만화천국〉으로 데뷔, 정교한 데생과 역사소재 만화로 일대를 풍미했다. 2001년 작고했고 같은 해 《마음의 왕관》이 부천만화정보센터에서 복간됐다)의 『황금가면』과 동일시기 한일합작으로 제작됐던 만화영화 『요괴인간』 『황금박쥐』 등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각시탈』은 허영만이 데뷔한 해에 쏘아올린 인기작이었다는 것 외에도 여러 측면에서 검토가 필요한 문제작이다. 특히 이 작품은 향후 허영만 만화의 전개과정을 파악하기 위한 첫 단추가 된다. 『각시탈』의 시대적 배경은 일제치하이고 항일이념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역사만화, 이념만화이다. 또 주인공이 택견과 검도를 이용 적과 대립한다는 측면에서 스포츠만화, 잡기만화, 액션만화로 볼 수 있다. 주인공이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변장을 한 뒤 사건을 해결한다는 측면에서는 추리만화, 변신영웅만화로 보여 진다. 또 이 작품의 정서 역시 다양해서 두 얼굴 방랑자 복수 허무 민족 초월 형제애 구도 등의 정서를 찾을 수 있다. 

『각시탈』의 정신을 답습한 작품이 범작 수준에 머물렀던 『쇠퉁소』였다면, 『각시탈』을 복원 발전시켜서 허영만 만화의 새로운 지평을 구축한 작품은 『무당거미』 시리즈로 볼 수 있다. 『무당거미』 시리즈는 동일 이름의 주인공 이강토가 ‘숨어 사는 항일투사’가 아닌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현대사회의 스포츠투사’ 또는 권투영웅으로 분한 작품이다. 주적 개념을 버리고 싸움의 공포에 오픈 되어 있는(무당거미라는 닉네임 뒤에 숨었지만) 이강토의 인간적 고뇌를 담아 낸 걸작으로 허영만 만화의 정신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냈다. 

『각시탈』 이후 『무당거미』 이전, 허영만이 이향원화실에서 앞으로 쓰일 기술과 연출을 익혔다면 실전을 경험하며 앞으로 해야 할 작품의 밑그림까지 잡아냈던 시기는 아동교양지 〈어깨동무〉를 통해서였다. 『각시탈』로 사실상 데뷔작 신화를 쏴 올리기는 했지만 허영만이 올라선 무대는 지금으로 따지자면 대본소용 만화만을 전문으로 생산하는 ‘대본만화판(일일만화)’이었다. 당시에도 지금처럼 잡지 연재를 주축으로 서점용 단행본을 ‘창작’하는 만화가와 대본소에 보급할 목적으로 작업공정에 따라 ‘생산’해내는 만화가가 나뉘어있었다. 이를 두고 만화계에서는 잡지 연재 만화가들을 ‘창작만화팀’으로, 대본소용 만화를 그리는  만화가들을 ‘신촌파(당시 신촌 지역에 만화총판이 많았고 만화유통의 독점체제를 구축했던 합동문화사가 있던 곳도 신촌이었다. 이 출판사의 사장은 신촌 대통령이라 불리기도 했다)’로 불렀다. 허영만은 이향원 등과 함께 신촌 대통령 휘하에 있었던 신촌파 만화가였다. 창작만화팀은 신촌파에 비해 상대적 우월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만큼 원고료나 사회적 대우도 달랐다. 잡지 쪽에서도 출신 성분에 따라 만화가를 가렸던 것이 사실. 그러나 당시 〈어깨동무〉의 편집장이었던 전영호는 신촌파였던 허영만을 전격 기용했다. 

창작만화팀에서 유명세를 떨치고 있었던 젊은 만화가(김영하 1947년 생, 만화가. 1963년 단행본으로 데뷔, 20년 간  2천 여권에 이르는 다작을 발표했다. 최공봉 시리즈와 팽킹동자 캐릭터가 유명하다) 김철호(1947년 생, 만화가. 강철수 문하를 거쳐 1974년 단행본으로 데뷔, 권투소재 만화로 일대를 풍미했다. 한동안의 휴식기를 깨고 당구소재 날제비 시리즈를 발표하며 제2의 만화인생을 살고 있다) 이상무(1946년 생, 만화가. 1966년 지방 신문 연재로 데뷔, 이후 박기정 문하를 거침. 독고탁 시리즈로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으나 90년 대 이후 성장하는 독자층을 붙들지 못하면서 활동이 뜸해졌다) 등과 함께 허영만은 〈어깨동무〉에 「기억하라」라는 작품을 연재한다. 일제시대 군대를 배경으로 했던 이 작품에 대한 반응은 냉담했다. 몇 작품이 더 죽을 썼지만 전영호는 허영만에게 깊은 신뢰를 보냈다. 그러기를 몇 차례 야구를 소재로 한 「태양을 향해 달려라」가 〈어깨동무〉에 연재되면서 허영만은 ‘신촌파 출신’이라는 멍에를 벗을 수 있었다. 이 작품의 인기와 함께 각종 스포츠만화의 전성시대가 개막됐다. 전영호와의 인연으로 허영만은 ‘좋은 편집자와의 만남’이 무엇보다 소중함을 느끼게 된다. 〈어깨동무〉에는 「짚신왕자」 「잠비지 강의 달무리」 「태풍스트라이크」 등 허영만의 개성이 물씬 풍기는 독특한 소재의 만화들이 여럿 연재됐다. 

〈어깨동무〉를 필두로 〈소년중앙〉〈새소년〉에 이르는 3대 아동 교양지는 ‘창작만화팀’에 있어서 중요한 버팀목 역할을 했다. 당대의 주요한 만화들 역시 이들 잡지를 통해 발표됐다. 허영만은 〈어깨동무〉에서 3편을 동시에 연재하는 등 내는 작품마다 인기를 누리는 저력을 보여줬다. 그 후 〈새소년〉 등에도 연재를 하면서 ‘신촌파’출신으로 ‘창작만화팀’의 선봉 만화가가 된다. 60~80년대까지 신촌파와 창작만화팀의 구분이 존재했다. 이는 90년대에 두 종의 만화전문잡지가 발행되면서 그대로 재현된다. 현대적 의미의 신촌파는 대본소용 만화를 전문으로 창작하는 일일만화 작가군, 창작만화팀은 잡지 연재 후 단행본을 발행한다는 개념이지만 작은 판형의 코믹스판 만화를 창작하는 작가군으로 볼 수 있다. 

허영만과 〈어깨동무〉 편집장 전영호와의 인연은 이후로도 계속 됐다. 전영호가 ‘레저코믹스’라는 컨셉을 들고 출판사(도서출판 예원, 요요코믹스)를 설립했을 때 허영만은 거대 출판사를 제쳐두고 이전 작품 대부분과 『망치』 『19번 홀』 등의 신작 출판권을 그에게 줬다. 허영만 만화가 전작 개념으로 재판됐던 예는 일본순정만화의 호황으로 서점판매용 만화 시장이 개척되면서 60년 대 등장한 예문각 크로바 문고 시리즈와 이현세(1954년 생, 만화가. 나하나 하영조 문하를 거쳐 1979년 단행본으로 데뷔, 까치 시리즈로 2000년 초까지 당대 최고의 히트작을 다수 창작했다. 한국만화의 대중화를 이끈 걸출한 스타로 꼽힌다) 등이 출자하여 1995년 설립됐던 세주문화사 시리즈를 들 수 있다. 허영만이 인연 깊은 편집자를 소중하게 여기는 대목은 다른 예에서도 찾을 수 있다. 신촌파에서 창작만화팀으로 환골탈태했던 허영만은 80년대 중반 대본소 만화의 초장편만화 창작 붐이 일면서 다시 원위치로 돌아간다. 허영만은 이 시절 여타의 작가들과 같이 대형화실을 꾸려서 공장식 분업 창작으로 많은 량의 작품을 찍어냈다. 관록의 무명만화가 조운학 (953년 생, 만화가. 1978년 단행본으로 데뷔, 1987년 허영만의 대필작가로 활동하다 독립 대본소용 만화 다수 창작. 2000년 대 초 청소년 대상의 만화잡지에 학원물을 연재하며 제2의 만화인생을 살고 있다)을 중심으로 냈던 심령만화 시리즈가 이 시기의 작품이다. 이때 인연을 맺었던 이가 타임출판사의 편집자 이재근이다. 허영만은 ‘공장 폐업 선언’과 함께 스포츠신문과 만화전문잡지 연재에만 전념하던 시절에도 이재근과의 인연을 유지했고 『넥타이』 『살라망드르』 등의 범작을 생산했다.『타짜』『사랑해』같은 최근 인기작의 경우도 과거 세주문화사에서 인연을 맺었던 이정석이 운영하는 채널출판사에서 내고 있다.  또 벤처기업 열풍이 불었던 2000년 대 초반 황제주 대우를 받았던 세롬데이터통신에서 매체 발간 사업을 제의 받았다가 물거품이 된 적이 있었다. 이때의 인연으로 관련 인사가 출자하여 설립한 업체 이피닉스(www.huryoungman.com)를 통해 허영만 만화의 인터넷 서비스가 진행 중이다.


2) 작품 진화도


이상무와 이현세는 허영만의 라이벌로 쉽게 비교되는 당대의 만화가들이다. 허영만은 입버릇처럼 ‘난 늘 2등이었다. 70년대는 이상무, 80년대에는 이현세가 1등이었다.’는 말을 한다. 이상무는 1976년 박기준(1941년 생, 만화가. 1957년 만화잡지 연재로 데뷔, 형 박기정과 함께 당대의 인기 만화가로 활동했다. 만화출판사, 만화학원 운영, 만화작법 책 집필 등 만화관련 활동으로도 유명하다) 문하에서 『노미호와 주리혜』로 데뷔했다가 독고탁을 주인공으로 한 만화 시리즈로 70~80년대 중반까지 최정상의 만화가로 활동했다. 이현세는 80년대 중반 그야말로 혜성처럼 등장해서 『공포의 외인구단』을 발표하며 우리만화의 대중화 시대를 개막한 장본인이 된다. 허영만의 위치는 늘 두 만화가의 한 계단 아래에 있었다. 그러나 허영만을 허영만이게 하는 이유 중 한 가지는 ‘새로운 장르의 개척과 소재의 발굴’에 있다. 여기에는 늘 2등 일 수밖에 없었던, 늘 2등이고자 했던 허영만의 창작관이 깊게 자리하고 있다. 

이상무 만화의 대표적 키워드인 가난 형제애 도전 승리의 정서는 그대로 허영만 만화에서 찾아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무의 주 독자층이 15세 미만이었다면 허영만이 설정한 주 독자층은 조금 더 올라간다. 이현세와 비교되던 시절에도 ‘초월적 영웅의 초장편 만화 붐’에서 허영만은 한 발짝 비켜나 있었다. 박봉성이 50여 권에 이르는 『신의 아들』을 발표하고 김철호가 이를 넘는 규모의 『슈퍼스타』를 발표하던 그 시절. 시작했다하면 30권은 기본이 됐던 그 시기에 다수의 만화가들은 신적 영웅 만들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허영만의 초장편 만화는 ‘힘의 남성’이라는 컨셉에서 벗어나 있었다. 오히려 구도자의 모습으로 권투를 하는 주인공(『카멜레온의 시』)이나, 기타를 치는 주인공(『고독한 기타맨』)을 등장시킨다. 허영만은 현대사회에서 유머를 상실한 전투영웅보다는 웃음을 머금은 시인을 그렸다. 

허영만은 이상무나 이현세라는 트랜드에 동참하지 않았다. 이를 두고 허영만이 당대 최고의 만화가들과 정면승부를 회피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만들어내지 못한 독자와 만나고, 오히려 그들이 외면한 장르를 개척한 것이라는 쪽이 더 우세하다. 대본용 만화의 대량 생산이 절정에 이르던 시절 이현세는 여전히 스포츠를 근간으로 하는 작품에 머물러 있었고, 박봉성은 기업극화를, 고행석(1948년 생, 만화가. 최 경 박기준 문하를 거쳐 1981년 단행본으로 데뷔, 불청객 시리즈로 유명하다)은 끝나지 않는 불청객 시리즈를, 이재학(1939년 생, 만화가. 김경언 문하를 거쳐 1965년 명랑만화 단행본으로 데뷔, 추공 시리즈로 유명하다)은 절절이 추혼 시리즈를 발표하고 있었다. 이 때도 허영만은 심령만화라는 색다른 장르를 들고 나왔고 일정수준 이상의 완성도를 담보했다. 

수집 가능한 작품 목록을 기반으로 허영만의 30년 만화기록표를 구성해 봤다. 

허영만 만화의 대표적인 작품들을 통해 시대적 구분을 나누는 일은 어렵지 않아 보인다. 이를 거칠게 정리해 들어가 보면 『각시탈』→『태양을 향해 달려라』→『고독한 기타맨』→『오!한강』→『미스터손』→『세일즈맨』→『사랑해』로 볼 수 있다. 이견은 있을 수 있으나 차례대로 소년한국도서 시기의 항일 아동만화→〈어깨동무〉시기의 스포츠 성장만화→대본소용 만화창작 시기의 특이소재 청춘드라마→만화 대중화 시기의 이념드라마→일본만화 개방 시기의 캐릭터만화→신문연재만화 시기의 전문 직장인 소재 만화→인터넷 대중화 시기의 옴니버스 교양 감성만화로 구분할 수 있다. 이 같은 구분 기준은 허영만의 대표작이 품어내는 장르적 특성에 기인한다. 그러나 한 겹 더 들어가 보면 시기별로 가장 유망했던 만화유통망, 매체, 경향 등과 만나게 된다. 그리고 더 집중해 들어가면 대표 작품별 주 독자층의 성장도 확인 할 수 있다. 이는 허영만 스스로 자신의 최초 독자였던 아동의 성장 시기에 맞춰 청소년 준성인 성인으로 접어드는 창작을 했을 수도 있고, 만화가의 작품 내적 성숙도가 독자의 성장과 일치했을 수도 있다. 성인 대상 만화를 창작하던 시기 이후 아동 대상의 캐릭터 만화가 오고 그 다음으로 직장인 대상의 만화가 오는 것이 의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시기를 전후해서 변두리문화의 측면이 강했던 만화가 대중문화의 담론화 현상과 함께 주변문화에서 주요문화로 진입하게 됐다. 이념만화는 이런 분위기에 좋은 재료가 됐다. 곧이어 터진 일본문화개방에 대한 성인들의 논쟁은 경쟁력있는 한국산 캐릭터 만화의 출현을 반겼다. 이런 상황은 당대의 캐릭터 만화가 단순히 아동이 좋아해서 성인이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으로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음을 알게 한다. 

이 경우는 전자 쪽에 더 무게가 실린다. 그래서 이를 다시 크게 묶어보면 ‘소년 대상 성장 만화시기→청소년 대상 트랜디 만화시기→성인 대상 전문 교양 교양만화라는 표현에 문제가 있을 수 있으나 여기서는 『타짜』『식객』등에서 볼 수 있는 특정 분야와 관련된 지식을 담아낸 형식의 만화라는 개념으로 사용했다. 90년 대 중반 일본의 한 만화편집자가 ‘만화의 교양주의’라는 선언적 편집방침을 발표한 적이 있다. 이때의 ‘교양’이 지시하고 있는 바가 이른바 전문소재만화가 다루고 있는 특정분야에 대한 지식이었다. 특정 분야를 다룬 만화라면 그 분야의 매뉴얼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만화시기’가 된다. 그러나 이는 만화의 테마가 지닌 기본적 속성이기도 하고, 장르만화나 소재주의 만화의 일반적 특성일 뿐이다. 그 안에 허영만 만화의 특수성이 담겨있지는 않다. 이는 단순하게 허영만 만화의 시기별 작품 전개 방향을 예시할 뿐이다. 


년도

제목

년도

제목

1974

<집을 찾아서>

1988

<허슬러>

1974

<빛 좋은 개살구>

1988

<야구타령>

1974

<각시탈>

1988

<퇴색공간>

1978

<기억하라>

1989

<대머리 감독님>

1979

<태양을 향해 달려라>

1989

<미스터손>

1980

<짚신왕자>

1989

<48+1>

1981

<무당거미>

1989

<청동미르>

1982

<사마귀>

1989

<형제>

1982

<10번타자>

1989

<황금산장>

1982

<쇠퉁소>

1990

<망치>

1982

<태평양은 알고 있다>

1990

<날아라 슈퍼보드>

1983

<변칙복서>

1990

<>

1983

<욕망의 수레바퀴>

1990

<0점 인간>

1983

<겨울로 가는 복서>

1990

<1989라틴아메리카>

1983

<무당거미 통합타이틀전>

1990

<미로학습>

1984

<도롱뇽구단의 골치덩이들>

1991

<아스팔트 사나이>

1984

<칫솔한개>

1992

<굿바이 아메리카>

1984

<잠비지강의 달무리>

1992

<무저갱>

1984

<7구단>

1992

<들개이빨>

1984

<황금충>

1994

<비트>

1985

<두얼굴>

1994

<미스터Q>

1985

<아스팔트 위의 강풍>

1994

<닭목을 비틀면 새벽은 안온다>

1985

<무당거미와 노랑머리>

1995

<세일즈맨>

1985

<무당거미와 괴인 해왕성>

1995

<망치2>

1985

<장미 하나 사랑 둘>

1995

<오늘은 마요일>

1985

<봄 여름 가을 겨울>

1996

<나스카의 메시지>

1985

<1+1+1>

1996

<화이트홀>

1986

<카멜레온의 시>

1996

<킹메이커>

1986

<흑기사>

1997

<안개꽃 카페>

1986

<퇴역전선>

1997

<3의 눈>

1986

<단막극을 위한 소나타>

1998

<짜장면>

1987

<동체이륙>

1998

<넥타이>

1987

<질수없다>

2000

<타짜>

1987

<고독한 기타맨>

2000

<사랑해>

1987

<담배한개비>

2000

<살라망드르>

1987

<링의 골치덩이들>

2001

<노상방뇨닷컴>

1987

<2시간 10>

2003

<식객>

1988

<!한강>

 

 


허영만은 30 여 년간 자신의 이름으로 그려 온 만화원고가 111,000여 페이지에 달한다고 했다. 책으로 따지자면 700~800권 규모이다. 상기한 작품목록은 필자 소장도서, 허영만 홈페이지 공개자료, 기타 문헌조사 및 관련인 증언 등을 토대로 구성 한 것으로 허영만 명의의 모든 작품 목록은 아니다. 또 문헌과 증언을 참고로 한 출간 년도 표기는 작품 최초 연재시기,  단행본 초판 또는 재판 발행 시기 등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다. 

30년 간 1개월에 2권 이상은 꼭 그렸던 셈이다. 이 수치에는 허영만 자신이 관여하지 않은 대필 작품은 빠져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철저한 자기관리로 유명한 허영만이지만 자신의‘모든 작품 리스트’를 정리해두지 못했다. 출판사에 매절형식으로 원고를 넘겨야 했던 시절도 있었고, 출판사의 원고관리 소홀로 분실되는 일도 많았으니 작업했던 원고나 도서를 모두 관리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존재하지 않지만 독자의 기억과 작품 제목만 남아있는 것도 여럿이다. 

현재 나열할 수 있는 작품 목록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기실 허영만 만화의 변화를 시기별로 구분한다는 것은 불가능 하다. 앞서 허영만 만화의 시기별 특수성에 입각한 성격 구분을 시도했고 일견 타당성 있는 구분점을 지었다. 그러나 이는 매우 작위적일 수 있다. 확인할 수 없는 작품을 포함해서 나름의 구분점에 어긋나는 작품들은 논외로 했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허영만 최고의 인기작도 있고 기록할 만한 작품도 여럿 있다. 작품 자체에 대한 보다 본격적인 논의는 다른 작업을 통해 이뤄져야 할 것이다. 


3) 문하계보도 


1988년 이현세는 만화가협회지에 ‘후회’라는 글을 발표하며 ‘공장제 만화생산을 중지 한다’고 발표한다. 허영만도 같은 시기에 ‘만화가가 아니라 공장장이 된 것 같다’며 공장제 만화생산을 접었다. 이현세는 ‘후회’한 일을 이후로도 계속했지만 허영만은 이 선언을 되돌리지 않았고 나름대로 성실하게 지켜왔다. 〈아이큐점프〉〈소년챔프〉로 대표되던 만화전문잡지가 창간되고 듣도 보도 못했던 신예작가가 활력 넘치는 작품을 연재하는 것을 보고 허영만은 ‘안 되겠다 싶었다’고 한다. 40여 명에 이르던 화실 식구들을 정리하고 신문연재팀 6명 만 남겼다. 그리고 마석의 외진 곳에 화실을 차리고 기존 만화스타일을 탈피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당시 허영만은 대필작가로 있었던 조운학에게 화실의 운영권 일부를 넘겼고 조운학은 당구 소재 만화 『허슬러』 시리즈로 허영만 유를 승계했다. 

허영만의 대규모 화실이 해체되던 시기를 전후로 해서 ‘허영만 사단’ 또는 ‘허파’라는 별칭을 단 신인 만화가들이 쏙쏙 등장하기 시작했다. 〈아이큐점프〉 창간과 함께 허영만의 스토리작가였던 노진수에게 글을 받아 『기계전사109』를 발표한 김준범은 허영만 사단의 1번타자 격이다. 그 이전부터 ‘허영만 화실에 가면 연출은 확실히 배운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여서 화실 해체와 함께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야 했던 분업만화가들은 나름의 프리미엄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김준범 이후 김종한 강웅승 윤태호 장태관 임동재 심갑진 김용회 김환 허재호 등이 독특한 개성으로 만화계에 얼굴을 내밀면서 프리미엄은 보증수표로 바뀌었다. ‘허영만 문하 출신’이라는 이야기는 만화계 내외부에서 그 자체로 신뢰 할 수 있는 타이틀이 됐다. 허영만 문하 출신 만화가의 성격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입문과 데뷔를 허영만 문하에서 한 부류

둘째, 허영만 문하로 입문했다가 조운학 문하에서 데뷔한 부류

셋째, 허영만을 전후로 다른 작가의 문하를 거친 부류이다. 


첫 번째 부류의 만화가로는 김준범 장태관 심갑진 김종한 강웅승 등을 들 수 있다. 1985년 허영만 문하로 입문한 김준범은 김종한 조운학 등과 함께 『무당거미』 시리즈의 후속편(『무당거미와 노랑머리』 『무당거미와 거인 해왕성』 등)에서부터 작업에 참가했다. 김준범은 SF만화로 시작해서 가족극화, 순정극화 등 다양한 장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김준범은 허영만 식 상황개그와 가족 애를 다룬 연출과 유연한 선에 능하다. 한때 서울문화사가 서울미디어라는 대여점용 전문 만화 출판사를 설립했을 때 장태관 등과 함께 참여해서 대량생산을 꾀하기도 했다. 최근 엽기적인 일상을 소재로 한 신문만화가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아웃복서』의 장태관은 꾸준히 권투라는 소재를 파고들고 있는 만화가이고, 『비천어』의 심갑진은 몽환적 분위기의 SF만화와 심리만화로 색다른 위치를 확보했으나 너무 과작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장태관과 심갑진은 그 재능과는 별도로 일본만화 캐릭터를 흉내 냈다는 비판 앞에 자유롭지 못하다. 장태관은 타케이코 이노우에, 심갑진은 우라사와 나오키의 스타일과 닮았다. 장태관 역시 허영만의 스토리 작가 출신인 김은기와 공동작업을 했다. 『파이팅 바람이』의 김종한은 동물만화, 항공만화, 레이싱만화 등 독특한 소재의 작품을 내 놓았으나 소재에 비해 평이한 이야기 전개로 기대에 못 미쳤다. 『고스트 특공대』의 강웅승은 조운학의 스토리 파트너인 심경희와 공동작업으로 뒤늦게 데뷔했다. 허영만이 K2등반을 떠났을 때 신문연재 중이던 『타짜』 등의 작품 일부를 대필했던 만화가이고 특히 아끼는 문하 출신으로 지목하기도 했었다. 이들 중 허영만 유가 깊은 만화가로는 김준범 김종한 강웅승을 들 수 있다.   

두 번째 부류의 만화가로는 윤태호 임동재를 들 수 있다. 조운학은 허영만 화실과 허영만 만화목록에서 빼 놓을 수 없는 한축을 담당했다. 1978년 『태양을 향해 달려라』(필명 유경환)로 데뷔했던 조운학은 1987년 허영만 화실에 들어왔다. 이정민 이재진 장태산 황재의 문하에서 작업했던 조운학은 여타의 문하생처럼 허영만에게 그림을 배웠다기보다는 대본소용 만화의 대량 생산 시절에 허영만의 대필 작가로 활동했던 급여창작자였다. 이 시기 이후로 허영만이 화실을 폐쇄하고 조운학이 독립을 할 때까지 허영만 문하생들은 상당부분 조운학의 영향 하에 있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실제로 허영만의 문하로 만화계에 입문하여 조운학의 문하에서 수련을 하다 데뷔를 한 만화가도 여럿이다. 이중 대표적인 만화가가 『야후』의 윤태호와 『촌놈』의 임동재이다. 윤태호는 성인만화잡지 〈미스터블루〉로 데뷔한 양영순 이경열과 함께 당대 가장 독특한 신인 만화가로 평가 받았었다. 흥부전을 패러디 한 독특한 성애만화 『연씨별곡』은 만화계에서 몇 손가락에 꼽힐만한 특급 데뷔작이었다. 임동재는 축구 소재와 학원액션 장르를 적절하게 배합한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허영만의 작품 목록 중 조운학의 필치가 확연하게 느껴지는 작품군으로는 『블랙홀』 『화이트홀』 등의 심령만화 시리즈와 『허슬러』 등 당구 소재 만화이다. 특히 『허슬러』는 허영만의 도회적 캐릭터에 강렬한 펜터치를 더해내면서 조운학 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세상에 알린 작품이다. 조운학 문하에서도 많은 만화가가 배출됐다. 이경열 최병열 변병준 최미르 문성기 이세경 등이 조운학화실을 거쳤다. 

세 번째 부류로는 『무림적풍』의 전중원을 비롯해서 이기 이영석 김덕수 김 철 송창훈 등이 있다. 이밖에 『해바라기 꽃미남』의 김용회, 『바람의 전학생』의 김 환 등이 허영만 문하 출신이고, 『힙합』의 김수용은 김준범과 김종한의 문하 출신이다.

허영만 문하 출신 만화가, 이른바 허영만 사단 또는 허파는 허영만 문하라는 확실한 보증수표를 발급받았다. 탄탄한 데생력은 기본이고 말끔한 캐릭터, 효과적인 연출력과 깔끔한 개그 컷의 활용, 꼼꼼한 펜터치, 창작 소재 설정의 특이성과 스토리 전개 능력 등에 있어서 허영만 사단은 달랐다. 허영만 화실에서 수련과정 중 겪었을 다양한 형태의 교감은 이들에게 주요한 자산이고 원재료가 됐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허영만 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자책도 큰 것으로 전해진다. 이들에게 허영만은 이왕에 넘기 힘든 산 정도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런 까닭에 이들은 데뷔 초반 허영만 스타일을 벗기 위해 다른 방향성을 설정하고 거기에 전념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기만의 스타일을 온전히 발전시켜 갈 것을 재차 다짐했다는 것. 하지만 해를 넘기고 만화의 맛을 알아가면서 오히려 허영만적인 그림을 그리게 됨을 고백 한다. 따라가지 않으려고 돌고 돌았는데 목적지는 또는 지향점은 같았던 것이다. 


이름

입문

년도

데뷔

데뷔작

인기작

이기

이재진

1970

1986

<자갈맨>

<계몽학습만화>시리즈

전중원

허영만

1977

1988

<무림적풍>

<강호용병전>

심갑진

허영만

1985

1993

<녹슨총>

<비천어>

김준범

허영만

1985

1989

<기계전사109>

<부전자전><아니타레바>

장태관

허영만

1986

1990

<>

<아웃복서>

김종한

허영만

1983

1991

<환상여행>

<파이팅 바람이>

조운학

이재진

 

1978

<태양을 향해 달려라>

<아가페> <휘파람>

임동재

허영만

1987

1993

<끝없는 승부>

<촌놈>

강웅승

허영만

 

2001

<고스트특공대>

 

윤태호

허영만

1988

1993

<비상착륙>

<연씨별곡> <야후>

이경열

이경열

1988

1995

<도사열전>

<엄청난놈들>

김용회

허영만

1990

2001

<해바라기꽃미남>

 


다릿말-허영만, 허영만만화


허영만은 우리만화계의 가장 위대한 작가 중 한명이고 한국 현대 장르만화의 개척자임과 동시에 탁월한 전수자이다. 그는 현대만화사가 간직한 온갖 형식의 만화와 매체를 경험했고 그 경험치로 한국 현대 만화의 새로운 지형을 구축해 왔다. 그의 작품은 그 자체로 장르화 됐고 각 작품이 장르의 이름으로 만화사의 첫 단에 올라섰다. 그가 작업한 111,000 페이지의 만화원고는 다른 만화가와 대중문화의 여러 지형에 수십 수백배의 크기로 확대 전파됐다. 그리고 그 수법은 문하 출신 만화가에게 고스란히 계승되고 있다. 

허영만의 30년 만화창작 그리고 지금까지의 활동만으로도 그의 족족은 우리만화사에 거대한 뿌리이고 양분임에 분명하다. 허영만은 그 스스로 한국만화의 지도를 바꿔왔다. 이런 작업은 현재도 진행 중에 있으며 앞으로 내딛는 걸음 하나하나가 곧 땅을 만들고 나무를 심어 숲을 가꾸는 일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허영만과 허영만 만화는 주위 깊은 행보를 요구 받는다. 가벼운 걸음은 자칫 잘 못된 지도를 만들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허영만은 환호하는 군중을 몰고 다닌다. 거기에는 긴 세월 동안 맺어 온 독자와의 교감이 존재한다. 허영만을 신뢰하고 허영만 만화를 보는 것이 편한 독자. 그들은 끈임 없이 허영만이 작품을 창작하길 기대해왔다. 자신이 읽어낼 수 있는 속도만큼의 작품을 바랬다. 그러나 이제 허영만은 이왕에 만들어 온 수만큼의 작품을 앞으로 더 만들어 낼 수 없다. 허영만 스스로 ‘앞으로 하고 싶은 작품이 더 많은데 할 수 있는 작품이 한정적이어서 마음이 급해진다’고 한다. 그래서 이제는 작품을 시작할 때 더욱 신중해져야 할 것이고 시작한 작품의 진행과정을 더욱 탄탄하게 구성해가야 할 것이다. 허영만 만화에 대한 재미가 그의 바쁜 손에서 나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 믿음은 새로운 작품을 위한 여백에서 나온 것이다. 허영만 만화의 창작 진화도를 통해 우리는 그가 다음에 계획할 법한 작품을 예측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예측은 여지없이 깨어져도 좋을 것이다. 우리가 예측 가능한 작품에 그의 소중한 손이 쓰이는 것처럼 불행한 일도 없기 때문이다. 


(끝)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허영만만화와 환호하는 군중들>, 김영사, 2004-04-06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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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평론가 박석환 홈페이지. 만화 이론과 비평, 웹툰 리뷰, 인터뷰, 보도자료 등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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