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가 박인권(1954년 생)은 1973년 만화계에 입문했고 1980년 <무당나비>로 데뷔했다(한 인터뷰에서는 1981년 작 <재벌군단>을 데뷔작이라 했다). 1990년 대 중반부터 <칼새> 시리즈(200여 편), <깜빵> 시리즈(250여 편), <미아리> 시리즈(100여 편) 등 초대형 규모의 연작 시리즈물을 발표하면서 이현세 허영만이 떠난 대본계 만화시장을 견인 해 온 대표적 만화가이다.
80년대 ‘만화대중화’의 기틀이 됐던 대본계 만화는 90년대 초입 위기를 맞이한다. 이현세와 허영만 등의 걸출한 스타작가를 배출한 이 시스템은 ‘공장만화’라는 내부 비판에 직면하며 두 스타작가를 놓치고 말았다. 또 동시기에 신인만화가 중심의 만화전문잡지 창간 붐이 일면서 대본계 만화의 전성시대는 한국현대만화사의 뒤편으로 물러서는 듯 했다. 그러나 이현세와 허영만이 보여줬던 다양한 창작 스펙트럼(소재 중심의 장르만화 예컨대 스포츠만화 드라마 경영만화 등)이 사라지면서 ‘대중적 실험’보다는 ‘대중적 실리’를 목적으로 한 창작 흐름이 형성됐다. 시장이 위축되면서 거품이 걷히고 시장이 요구하는 작품만을 생산하는 ‘특정 품종’의 ‘소량 생산’ 체제를 구축하면서 이현세 허영만 이탈에 따른 ‘후 폭풍’을 저지해냈다.
이 시기를 이후로 대본계 만화는 시장의 최대 소비층인 25세 전후의 남성 독자를 대상으로 한 ‘액션’과 ‘무협’ 장르의 작품만을 집중 생산했다. 이현세 허영만에 견주어졌던 박봉성과 고행석, 이재학과 야설록이 이 시기의 초반을 지탱했다. 특히 고행석은 대표 캐릭터였던 ‘불청객’을 ‘악질’이라는 새로운 캐릭터로 바꾸면서 특유의 개그성을 걷어냈고, 야설록은 무협소설가 출신답게 무협만화만을 집중 생산했다. 박인권은 이 시기에 박봉성과 고행석이 지탱하고 있던 액션 장르의 작품을 본격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조명운 조명훈 등의 만화가와 당시 새롭게 출사표를 던졌던 김성모 등이 액션 장르의 대본만화계 쟁탈을 위한 경합을 벌였다. 박인권은 이 시기의 당당한 생존자였고 승자였다. 그러나 2000년에 접어들면서 대본계 만화의 창작 흐름은 액션과 무협의 양대 축에서 ‘영웅의 신적인 액션 또는 액션 연출의 상승’에 자유로운 무협장르로 기울었다. 이에 따라 무협소설가 출신의 야설록 사마달을 축으로 황재와 황성이 재조명을 받기 시작했고 신예 용태성과 함께 하승남이 재등장하는 등 액션장르는 사라지고 무협만화 전국시대가 열렸다. 반면 박봉성은 액션장르 전문이면서도 스스로 ‘신적인 영웅 캐릭터’를 대표하고 있었던 탓에 ‘더욱 강한 캐릭터’를 요구하는 독자들의 욕망에 화답할 수 있었다.
박인권은 독특한 소재와 함께 독자의 긴장을 유도하는 흥미요소가 풍부한 작품 생산에 능한 만화가로 평가 받고 있다. ‘탈옥수 신창원’이 대한민국 전체를 쥐락펴락하던 시기에 <탈옥수 신창원>이라는 제목의 작품을 출간하는 등 수많은 히트 영화의 정식 만화판을 비롯해 소재를 패러디한 작품을 시기에 맞춰 발표했다. 또 추리소설가 김성종의 ‘일곱송이 해당화’ 유우제의 ‘불새의 미로’ 백동호의 ‘대도’ 등 다수의 추리소설을 만화화 했다. <미아리> 시리즈 역시 이수광의 추리소설을 바탕으로 한 작품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박인권의 폭발력 넘치는 창작 활동은 대본계 만화의 ‘절대 제왕’으로 군림하고 있는 박봉성을 강력하게 위협했지만 결과적으로 그 이상이 되지는 못했다.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만화규장각, 부천만화정보센터, 2004-02-03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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