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작가 이충호(1967년 생)는 1985년 「보물섬」 신인공모에 입선하며 만화계에 입문, 최신오 문하를 거쳐 1992년 「소년중앙」에 단편 『고독한 전사』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스토리작가 엄재경과의 공동작업으로 1993년 서울문화사의 「아이큐점프」에 연재를 시작한 『마이러브』와 1995년 발표한 후속 작품 『까꿍』은 우리만화 100만 부 판매 시대를 이끈 대표작으로 꼽힌다.
70년대 말 소년잡지 시대, 80년대 중 후반 대본소만화 시대, 90년대 초 서울문화사와 도서출판 대원의 만화전문잡지 시대를 거치면서 다양한 작가와 작품이 선보였다. 앞선 두시기를 관통한 중견작가군의 활동이 둔화세를 보이면서 90년대 초 신진 작가군이 대거 등장한다. 90년대 우리만화계는 번역 출판된 일본만화의 폭발적 인기, 새로운 작가진의 출현과 전문잡지 체제, 만화에 대한 인식 변화, 문화산업에 대한 관심 증대, 책대여 프렌차이즈업의 열풍 등으로 전대에 없었던 호황을 누렸다. 서울문화사와 도서출판 대원의 양분할 구조 속에서 만화계는 최대의 호황을 누렸고 긴급 수혈 된 초짜 만화가들은 예상 밖의 히트작을 만들어냈다. 「아이큐점프」의 이충호 박산하, 「소년챔프」의 지상월 소주완 이명진 등이 이 시기에 등장했다. 이들은 데뷔작 격인 작품을 우리만화의 대표작으로 만들었다.
이충호의 작품은 캐릭터의 상품화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만화와 캐릭터산업의 연계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지만 우리 만화 중 캐릭터상품화가 가능한 작품은 손에 꼽을 정도. 허영만의 『무당거미』시리즈를 본 후 만화작가가 될 것을 결심했다는 이충호는 85년 공모전 입선을 계기로 산업디자인과에 입학 독자적인 작가 수련기간을 가졌다. 이후 아동만화를 주로 창작해 온 최신오의 문하생활을 거치며 작품 활동 준비를 마쳤다. 작가 수련기간의 궤적을 통해 이충호 만화의 높은 캐릭터 상품화 가능성의 배경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이충호의 첫 번째 히트작인 『마이러브』는 판타지를 가미한 연애만화 성격을 지닌다. 허영만의 드라마성과 최신오의 깔끔한 펜터치, 디자이너로서의 학업과정은 이충호 만화를 색다른 캐릭터만화로 읽을 수 있게 한다. 『마이러브』에서 보여준 연애 심리 묘사와 개그 연출을 바탕으로 등장인물의 캐릭터성을 높인 후속작 『까꿍』은 아동용 판타지대전만화의 모범 사례를 만들어 냈다. 일본만화 『드래곤볼』의 설정을 차용했다는 비판도 있으나 작품 자체의 재미와 높은 완성도는 이를 논외로 여기게 할 정도이다.
두 작품의 연이은 히트로 이충호는 90년대 가장 각광 받는 젊은 작가가 됐다. 그러나 1999년 시공사의 아동용만화잡지 「쎈」의 창간과 함께 서울문화사에서 박산하와 같이 자리를 옮긴 이충호는 왕년의 인기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쎈」에 연재했던 『눈의 기사 팜팜』은 잡지 폐간과 함께 도중하차했다. 시공사는 「쎈」을 폐간하고 준성인지로 컨셉을 바꾼 격주간지 「기가스」를 창간한다. 이충호는 이 잡지에 신작 『브라인드 피쉬』를 연재하면서 기존 아동용 작품에서 볼 수 없었던 강력한 폭력묘사를 보여주는가 하면, 펜과 톤을 사용하지 않고 연필의 굵기와 농담만으로 그림을 그리는 등 색다른 시도를 보여주었으나 좋은 반응을 얻어내지는 못했다.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만화계 자체가 불황국면으로 접어든 까닭도 있겠으나 데뷔 초창기부터 대표작가로 활동하며 10여 년을 질주하는 사이 참신함이 빛을 발했다는 지적도 있다.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만화규장각, 부천만화정보센터, 2002. 11. 20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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