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월드에로카툰10.
유로티카의 대표적 작가 알포소 아즈피리
`싸워서 이기자`라는 뻘건 글씨가 쓰여 있던 연병장 담벼락에 기대어 <드래곤볼>에 등장하는 무수한 적과 싸우던 손오공을 기억했다. 사회에 나가면 손오공인 양 싸우고 또 싸워야 한다. 싸워서 이기고, 스스로 `레벨 업`을 해야 한다. 그러고 보니 내 주변의 그렇고 그런 사람들이 모두 전투영웅이었다. 동료 직원을 따돌리고 대리 계급장 하나 따겠다고 날밤을 새우며 회사 일을 했던 삼촌은 슈퍼맨이었고 시금치 깡통 같은 자장면 한그릇으로 점심을 때우며 팔소매를 걷어붙였던 아버지는 뽀빠이였다.
만화의 영웅은 자신을 보여줘야 할 대상에 따라 다른 모습을 한다. 아이들의 영웅은 어려움 앞에서 무조건 힘을 발휘한다. 청소년들의 영웅은 자기가 지닌 힘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다. 성인들의 영웅은 가족과 집단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는다.
그리고 또, 또 다른 영웅이 필요하다. 위의 과정을 거친 이들을 위한 영웅이다. 영웅만화를 좋아하는 일반 독자가 어른이 됐다면? 그의 영웅은 다른 모습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현실의 영웅이기도 하니까. 그는 영웅인 자신의 위치에 걸맞은 만화 주인공을 원할 것이다. 마치 슈퍼맨의 짝이었던 원더우먼 같은.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 태어난 알폰소 아즈피리는 유로티카(Eurotica)로 명명된 유럽풍 에로코믹스의 대가 중 한명이다. 이탈리아에서 작품 활동을 처음 시작한 이 작가는 유럽과 미국의 만화 미학적 전통이 혼재된 작품으로 에로코믹스의 계보 안에 들어왔다. 이후 SF 전투영웅과 팬터지 모험액션만화의 장르적 코드에 가학적 성애만화 요소를 접합한 <Lorna> 연작을 탄생시켰다.
<Lorna>는 미래사회에 사는 모험심 강한 금발의 여성이다. 그의 옆에는 영화 <스타워즈>에 등장하는 3-3po 같은 금색로봇이 있다. 로봇은 주인을 위기에서 구출해주는 조력자이기도 하지만 `타고 넘어야 할` 성적 대상으로 보이기도 한다.
여성을 제외한 모든 등장인물은 푸른색 돌연변이 같은 외계 생명체다. 이들은 얼굴을 드러내 보이며 주인공을 겁탈하고 주인공은 아주 당연스럽게 이들을 처단한다. 그러나 작가는 아예 얼굴이 없는 생명체를 등장시키기도 한다. 처단할 대상은 없고 성애만이 존재한다. 성기능을 강조하기 위해 조작된 겁탈자 이미지는 독자의 `자기 동일시` 효과를 위해 마련된 장치이다.
주변의 잡음을 모두 차단할 것 같은 세밀한 컬러 그림과 지문을 통해 서사를 전달하는 일반적인 유럽만화와 달리 <Lorna>의 세계에서는 진지함과 가벼움이 공생한다. 사실감을 더하기도, 버리기도 하고 독자를 만화 속에 참여시키기도, 바깥으로 내몰기도 한다. 이것이 현실의 영웅이 된 이들이 찾는 영웅만화다.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굿데이, 2002-02-05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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