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환, 용음봉명의 추공, 씨네버스, 2001.07.03


캐릭터버스 5


추공, 지울 수 없는 한 점의 흔적 


얼굴에 점이 난 사내 

추공은 한국 창작 무협만화의 대가 이재학의 작품에 고정 출연했던 캐릭터이다. 허리우드 서부영화의 대표적인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모델로 했다는 이 캐릭터는 1981년 무송이란 이름으로 처음 이재학 유의 만화에 등장, 무룡으로 바뀌었다가 추공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지금은 고인이 된 작가가 이스트우드를 모델로 했다고 굳이 설명했을 만큼 추공은 아무렇게나 버려져서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의 동물 같은 느낌을 지녔다. 항상 입고 있는 검은 장포 처럼 길게 늘어트린 머리칼과 날카로운 듯 우수에 젖은 눈동자, 살짝 올라간 턱 끝의 거만함만큼이나 스스로에게도 관대하지 못한 절대 고독감. 추공은 여럿이 함께 있을 때보다 적을 앞에두고 혼자 있을 때 더욱 강해 보이는 그런 사내이다. 

그러나 이재학의 무협만화가 일본과 미국에 소개되면서부터 추공의 모습은 조금씩 날렵해졌다. 거칠게 외공을 키우며 복수의 일념을 키워 온 화신이라기보다는 정제된 내공의 기로 천하에 나선 기품있는 무예가의 모습이다. 그러나 말쑥해진 외형에도 불구하고 왼쪽 눈 밑에 난 커다란 점은 사라지지 않았다. 일본의 만화잡지 ‘애프터눈(고단샤)’에 연재됐던 <용음봉명>에서 역시 추공의 눈 밑에는 점이 있다. 만화의 주인공에게 과거사의 상징으로 주어지는 이상한 문양의 점이나 문신 등은 즐겨 차용되는 소재이긴 하나 추공의 경우처럼 얼굴에 점이 있는 경우는 전무하다. 

만화의 주인공이 외형적 차별성을 부여받는 것은 작가 개개인의 회화적 조합에 따른 차별성과 헤어스타일, 안경 등의 악세사리, 복식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최근 큐트형 눈빛과 역삼각형 얼굴을 한 신세대풍 주인공들이 새롭게 등장하고 있지만 여전히 굵은 눈썹과 음영이 드리운 눈매, 날카로운 콧날과 일자 입술, 근골형의 턱선 등을 한 인물이 무엇인가 원하는 것(이야기의 소재)을 끝까지 추구할 수 있는 주인공의 외형으로 선택된다. 이에 비해 날카로운 턱선과 길어 보이는 얼굴, 눈가의 점 등의 이미지로 조합된 추공의 외형은 정직한 신념을 지닌 주인공 상이라기 보다는 비이성적이고 개인적인 의지에 이끌려 주변을 어지럽게 하는 반영웅적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일반적인 작품에서라면 주인공에 반하는 인물상에 적합하다. 


최고의 사내가 지니지 못한 것 

1995년 일본에서 편당 2천 여 만원의 고료를 받으며 연재됐던 <용음봉명>은 불교를 말살하기 위해 결성된 비밀 결사조직 혈마사와 포교를 위해 중국에 온 남인도의 왕자 달마의 대립으로 시작된다. 이 싸움의 생존자가 800년 후 중원에 재등장하게 되고 이를 막을 수 있는 용음의 후계자로 최고의 두뇌인 청수신골과 최고의 육체인 소양신맥을 타고난 추공이 선택된다. 천부적인 무사의 신체로 중원의 선택을 받아 최고의 무공을 지니게 되는 추공이지만 아버지에게는 버림받고 어머니와는 일찍 사별했다. 이처럼 이재학 유 무협만화에서 반복 적용되고 있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명리와 출세를 위해서라면 혈육마저 부정하는 비정한 인간세계’인 무협의 공간에서 자식을 버린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이끌어낸다. ‘비정무림’이라 칭하는 이재학 유 무협만화의 주인공 추공이 지닌 결여태-그의 이름은 가을의 빈 하늘이다-그 충만한 무공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심중의 무엇이 곧 부정(父情)이다. 주인공에게 어울리지 않을 법한 외형과 눈 밑의 커다란 점은 그가 지니지 못한 결여의 흔적이 외부로 표출된 것은 아닐까? 아버지가 곁에 있지 않은 주인공의 성장배경은 정직하게 사는 것보다는 이치에 맞게 사는 법을 배우기에 쉬었을 것이고, 아버지의 존재에 대한 부정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와 자신의 삶에 대한 보상심리가 복수의 일념을 키웠을 것이다. 결국 중원을 수호하는 전사로서의 대의와 아버지를 멸하겠다는 개인의 의지에 대한 혼란이 주인공 추공의 반영웅적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그의 얼굴에 외부로 드러날 정도의 큰 점을 갖게 한 듯 하다. 


TIP : 무협과 검협 

국내 창작 무협물의 전통은 60~70년대 와룡생의 작품이 번역 소개되면서 명・청 혼란기를 무대로 한 아류작들이 양산되고 김용의 <영웅문>을 전후로 사마달, 검궁인, 진산, 좌백, 용대운 등의 작가에 의해 그 토대가 구축되었다. 신체의 수련을 중심으로 외피적인 형태에 머물렀던 국내 무협만화는 이재학, 하승남, 황제 등에 의해 ‘무협지 유 무협’의 외형을 흡수했고, 독자적인 장르문법을 구축해냈다. 중국 무협번역가 박영철은 `중국의 무협소설은 당나라 때의 전기로부터 시작하여 무협과 검협이라는 두 노선에 따라 나란히 발전해 왔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신체 연마를 통한 대련이 주가 되는 무협물은 사실성을 지니고 있고, 검선의 경지를 논하는 검협 유는 사실성보다는 낭만성과 괴이함을 느낄 수 있다. 국내 무협장르만화의 대개는 검협 유로 과장과 과잉의 에너지가 넘쳐난다. 


글/ 박석환 www.parkseokhwan.com


씨네버스/ 2001-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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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평론가 박석환 홈페이지. 만화 이론과 비평, 웹툰 리뷰, 인터뷰, 보도자료 등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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