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환, 베가본드의 타케조, 씨네버스, 2001.06.26


캐릭터버스 4


스포츠 경기에 출전 한 사무라이

가수 백지영이 돌아왔다. 백지영은 무대에 올라 스타가 되기 위해 노력했고, 결국 다른 이들의 손에서만 옮겨지던 별을 손에 넣었다. 그러나 ‘사생활’이 담긴 비디오가 인터넷을 통해 순식간에 퍼져 ‘몰카와 오현경’에 이은 또 하나의 인터넷 신화를 만들고 사라졌다. 하지만 백지영은 새벽 이슬에 녹아 버리는 별의 인생을 거부했다. 인터넷에 대한 피해의식이 클 것이라고 믿었으나 보란 듯이 새로운 인터넷 업체의 광고에 출연해서 바다 앞에 당당히 선 모습을 보여줬고, 자신의 좌절 신화를 ‘지나가던 개에 물린 것’이라고 묘사한 포스터의 음반을 발표했다. 백지영을 통해 이 남자를 보겠다는 의도는 어쩌면 당치 않을 수 있으나 백지영과 <배가본드>의 사무라이 타케조는 닮았다. 


나를 죽일 셈이라면 내가 죽여준다 

일본을 대표하는 소설가 에이지 요시카와 원작의 소설 <미야모토 무사시>의 이미지로 더 익숙한 미야모토 무사시는 십수검술의 달인 신멘 무니사이의 아들로 태어나 17살 때 세키하라 전투에 군졸로 참전했다가 패잔병이 된 후 마을에서 내 쫓긴다. 이때부터 미야모토 현의 타케조(한자 표기가 무사시와 동일하다), 미야모토 무사시라는 이름의 낭인으로 숱한 무사들과 대결을 하며 병법서 <오륜지서>를 남긴 실존 인물이다. 

데뷔작이나 다를 바 없는 농구만화 <슬램덩크>로 일본뿐 아니라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만화가 타케이코 이노우에가 두 편의 소품 이후에 선택한 작품이 미야모토 현의 타케조 이야기이다. <슬램덩크>의 크나 큰 성공과 이른 완결, 그리고 가벼운 소품으로 이해됐던 농구만화 <버저비터>와 <리얼>은 ‘큰 전쟁을 치른 무사처럼 기력이 쇠진해 버린’ 신예작가의 좌절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에 불과했다. 농구만화를 했다는 이유로, NBA 마니아라는 이유로 미국을 유랑하며 <배가본드>(bagabond ; 방랑자)의 타케조 마냥 떠돌던 이노우에. 그는 타케조의 이야기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성공신화를 만들어줬던 대중이 다시 패배 신화 속에 자신을 처넣기 전에 일순 일순을 극한 두려움과 두려움의 극복으로 정진했던 스스로의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자신이 내뿜는 살기에 스스로가 압도당할 정도로 강하게 ‘승리’를 추구하는 검술의 천재. “나를 죽일 셈이라면 내가 죽여준다”며 자신의 신념을 위해 목숨을 걸고 검 앞에 선 17살의 타케조. “사선을 넘었을 때 죽음과 삶은 맞닿아 있고 죽음을 직시했을 때 삶이 어렴풋하게 보인다”는 것을 깨달은 타케조는 이노우에의 페르소나(parsona ; 분신)임에 분명하다. 그리고 그 타케조의 깨달음은 신화 속의 여자로서 사살됐던 백지영의 회복과 닮았다. 


현대의 대전 서사 리그전과 토너먼트 

전국시대가 끝나고 도쿠가와 막부 체제가 확립되는 400년 전의 일본. 그 과도기에 실존했던 인물 타케조는 요시가와의 소설을 통해서 신화화됐고, 이노우에의 만화를 통해서 재창조되고 있다. 이노우에 식으로 제시된 타케조는 <슬램덩크>의 주인공들을 혼합해 논 듯 한 느낌이다. <슬램덩크>에 등장하는 농구 천재들이 전국대회를 목표로 빨간 공 하나를 두고 격전에 격전을 거듭했다면 <배가본드>의 검술 천재들은 칼 뒤에서 죽음을 눈앞에 두고 두려움과 공포를 밑천으로 사투를 반복한다. 한 국내 평론가가 <슬램덩크>의 서사가 무협소설의 서사를 닮았다는 논조를 펼친 적이 있으나 이는 TV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현대의 대전 서사인 ‘스포츠 리그전의 서사 구조’를 그대로 옮겨왔다는 쪽이 더 설득력을 지닐 듯 하다. <슬램덩크>가 재대결이 가능하고 모든 이에게 가능성은 열려있다는 학원물의 교훈성을 담보하고 있다면 <배가본드>는 단 한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패자부할전이 없는-토너먼트 방식의 경기이다. 목숨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되지만 ‘성취를 얻기 위해서 하는 일에 목숨 정도는 걸어야 하지 않나!’ 라고 답하는 것이 <배가본드>이고, 학원물을 비껴선 이노우에의 신념이며 타케조의 철학이다. 책장을 넘겨야 한다는 노동의 신호를 느끼지 못할 만큼 한 장 한 장이 전혀 무겁지 않게 넘어가는 이노우에 식의 만화. TV의 스포츠 경기를 보듯 가슴만 움직이게 하는 만화. 두 시간 여에 달하는 ‘각본 없는 드라마’인지라 ‘OO팀이 강하군’이라는 인식만 심어주는 스포츠 경기 같은 만화. 타케조는 여기에 등장하는 선수이다. 성취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한 타케조의 플레이는 또 하나의 신화를 예감케 한다.  


글/ 박석환(www.parkseokhwan.com)


씨네버스/ 2001-06-26 게재

이미지 맵

Parkseokhwan

만화평론가 박석환 홈페이지. 만화 이론과 비평, 웹툰 리뷰, 인터뷰, 보도자료 등 게재

    'Critique/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