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환, 전자책 속에 애니메이션을 담아라, 씨네버스, 2001.03.27

2019. 1. 7. 00:32Dissertation/보고


전자책 속에 애니메이션을 담아라


대한민국 미술대전 대상 수상작가 강애란(이화여대 교수)이 금산갤러리와 아트선재센터에서 ‘디지털 북 프로젝트’(3/23-4/3) 전시회를 개최했다. 컴퓨터와 인터넷의 급속한 발전 앞에 변화될 책의 운명을 어찌할까 한탄하는 것인지, 정물로서의 책과 무정형으로서의 디지털 북을 대비시켜 ‘뭔가’를 전달하려는지, ‘책이 없어진 상황을 함께 고민하자’는 작가의 의도가 고약타. CD를 집어넣거나 엔터 키를 누르는 것으로 고민을 해결해보려 드는 컴퓨터 세대를 고달프게 한다. 


이 책을 보시려거든 전원을...

실재하는 책과, 이미지화 된 책, 그리고 데이터로서의 책을 혼란스럽게 교차시켜 논 전시에는 감상의 전재 조건이 되는 정물로서의 이미지가 설치돼 있다. 작가가 제시한 미래의 전자책은 무색 무취 무형으로 전자공간을 떠도는 현재의 전자책(파일 형태의)과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우스개로 말하자면 서부영화에서 목사로 분장한 총잡이가 성경책을 총집으로 사용하던 것처럼 작가는 책을 브라운관의 케이스 정도로 활용하고 있다. LCD창뿐만 아니라 형광색 글자에서 빛이 발하는 이 책은 어딘가 키취적인 냄새가 물씬하다. 즐거운 발견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LCD 창과 빛. 어딘가 코드가 있고 전원을 켜야 이 책은 제 기능을 수행한다. 이보다 더 전자책을 극명하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전원을 켜지 않고 볼 수 없는 책. 전자책의 독특함과 위대함을 읊조리기에 숨이 가쁜 현대의 정물들에게 작가의 직접적인 발언은 ‘똥꼬 깊숙이 쑤시기’식 반발이다. 종이책에 생명을 주는 것이 인간의 노동이긴 하지만 전자적 노동력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니. 책을 읽는 행위가 수많은 사람들과 지하철을 타고, 전광판을 바라보는 것과 같은 것으로 바뀌지 않는 한, 하다 못해 전자책 단말기(device)에 태엽이라도 장치하지 않는 한 정전과 방전에 대비하지 못하는 전자책은 폐지만 못한 것이다. 


책 같은 전자책에 전원까지 필요하다니...

한창 난리법석을 떨다가 잠수상태에 빠진 최근 개념의 전자책은 크게 세 가지. 온라인 상에서 볼 것인가(스크린북, 웹북이라고 한다), 인터넷에서 다운을 받아서 특정 보기 프로그램을 통해 PC에서 볼 것인가(MS Reader, Acrobat ebook reader 등이 있다), 아니면 특정 기기(전자책 단말기, PDA 등)에서 볼 것인가 이다. 

특정 보기 프로그램을 통한 전자책 살포 작전은 일단 양대 프로그램의 파일 형식 표준화와 전체 시장의 규모 자체를 신뢰하지 못하는 사업가들, 찌라시 수준의 책도 돈 내고 사면서 전자책은 백과사전도 공짜로 가져야 한다고 믿는 네티즌들 덕에 글러먹었고, 특정 기기를 통한 전자책 발전 방향은 갈수록 기능을 더 해 가는 이동전화와 갈수록 싸지는 노트북 사이에서 허덕이는 중이다. 또, 이 시장의 미래 비전을 확신했던 미국과 한국의 초대형 작가 스티븐 킹과 이문열의 작품이 중도하차하면서 전자책은 어두워졌던 종이책을 밝게 비추는 플래시 꼴이다. 

‘TV 앞에서도 신문은 살아 남았다’는 응전의 선언을 다시 외치게 할 만큼 무섭게 번졌던 전자책 열풍. 기실 이 열풍의 확산이 멈춰버린 것은 디지털 미디어로서의 전자책에 대한 인식 부족 탓이 아닐까?


애니메이션화 된 활자들

종이는 미디어의 특성상 장과 면을 나눈다. 태생적으로 장면 분할을 하게 돼있다. 그 안에 글이 있다면 문단의 조절이 있겠고, 그림이 있다면 이미지의 조정이 있겠다. 즉, 선형적인 이야기 구조를 통한 시간의 흐름을 가장 극명하고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미디어가 곧 종이인 것이다. 연속 촬영 기술의 등장은 이 종이 미디어의 표현 방식과 다른 쪽에 있다. 전자책은 종이 미디어가 아닌 흐르는 미디어, 영상 미디어의 자손에 가깝다. 인터넷의 최대 수혜자가 검색 사이트라는 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디지털 상에서의 활자는 텍스토보다는 이미지로서 보여지고 있다. 가장 빠른 이야기의 전달을 위해 웹애니메이션이 이미지화 된 활자를 주요 표현기법으로 활용하는 것도 한 예가 될 것이다. 

최근 일본의 한 사이트는 ‘시츄에이션 북’이라는 컨텐츠를 발표했다. 장과 면의 분할로 페이지가 넘어가는 방식이 아니라 롤플레잉 게임처럼 옆으로 이미지가 이동하면서 그림과 글을 통해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효과음과 음악이 삽입되어 있고, 특정 활자에 애니메이션 기법을 적용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등의 시각 효과를 도입했다. 

국내의 한 전자책 업체는 유아용 동화에 애니메이션 기법을 도입 ‘멀티미디어북’이라 소개했다. 프랑크푸르트 국제 도서전에서도 주목을 받은 이 업체의 작품은 장과 면 안에서 이미지들을 선택적으로 이동하게 만들어서 페이지를 넘기는 것과는 다른 시간의 개념으로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낸다. 

디지털 시대에 활자가 새로운 역할을 강요당하는 것처럼 서로 다른 미디어의 융합이 전통적인 장르의 개념을 초토화시켰다. 책은 영상화되고, 영상은 금기 시 됐던 활자를 천연덕스럽게 써먹는다. 상호 작용성이라는 디지털의 법칙은 문학과 영화, 만화와 애니메이션, 감상과 게임의 경계짓기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단,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특징은 이들 장르의 고유함을 감싸쥐고 독자 또는 사용자와 최초로 눈맞춤을 하는 접촉자로 성장했다. 


(끝)



그림 설명


 


1. 비디오 플레이어 기능을 삽입한 전자책(강애란의 설치작품)

2. 최근 어도브사로 인수되면서 글래스북에서 아크로벳이북리더로 이름을 바꾼 대표적인 전자책보기 프로그램 www.glassbook.com 

3. XML기반의 전자책 단말기 www.hiebook.com

4. 애니메이션 기법의 활용으로 전자책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인터넷 컨텐츠 www.wisebook.com

5. 애니메이션 화된 활자의 사용으로 이야기 전달의 효율성을 높이고 있는 인터넷 컨텐츠 <모험왕>

www.coj.co.jp 

6. 추리소설과 3D게임의 후손 쯤 되는 변종의 인터넷 컨텐츠 <명탐정> www.joykorea.net

7. 시츄에이션 게임 또는 자기 자신을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이야기를 선택적으로 진행하는 맞춤북 같은 형태의 인터넷 컨텐츠 <문포레스트>www.joykorea.net



씨네버스/2001-03-27 게재

잘가라종이만화, 시공사, 2001 게재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