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환, 새천년의 잡상과 만화 저장 방식의 변화, 코코리뷰, 2007.2.1



네 자릿수 세기의 두려움

두 자릿수 연도표기에 익숙한 우리에게 네 자릿수 2000년은 우선 버겹게 여겨진다. 키 크기를 말할 때, 발 사이즈를 말할 때도 우리는 앞머리를 털고 뒤의 두 자릿수를 말한다. 키는 100cm, 발은 200mm의 기준치가 있기 때문이다. 크게 흔들리지 않을 기준이 있다는 것은 어떤 믿음을 제공한다. 이제 우린 그 믿음의 수치를 바꿔야 한다. ‘일천구백’으로 시작한다는 기준이 사라진다. 19에서 20으로 ‘이천’으로 변하는 새로운 천년. 버릇처럼 년도 표기를 두자리로 한다면 ‘00’이 된다. 아무 것도 없는. 만화에서 무엇엔가 홀렸을 때, 눈동자를 그리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두 숫자. 한글로 읽으면 ‘영영’. 나훈아가 조금 능글맞은 목소리로 부르는 이별가를 떠올린다면 즐거운 웃음이 나겠지만, 왠지 무언가와 ‘영영’일 것 같은 기분. ‘오래고, 오래도록’의 의미를 지닌 좋은 미사어구들은 모두 생각나지 않고, ‘다시는, 다시는’의 의미를 지닌 ‘영영’들만 머릿 속을 멤돈다. 100년 동안, 또는 1000년 동안 느낄 이유가 없었던 고민. 그 고민 속과 겉을 핥아 만화를 이야기하고 싶어진다.

새즈믄해의 만화는 어떤 모습일까? 감히 그 실체에 접근해보려는 노력을 기울여 본다. 어차피 백일몽으로 끝날 터인데 노력까지 거론할 필요가 있을까만은 지난 천년의 만화형식이 유지된다는 것 역시 공포스러운 일 아닌가! 

만화여, 인쇄기에 속지 마라

만화의 시작. 몇몇 만화관련 역사책들은 만화의 출생지점을 인쇄술의 출현으로부터라고 적고 있다. 또, 이 책들은 한결같이 만화의 원형에 대한 기록도 빠트리지 않고 있다. 대개 원시사회가 만들어낸 동굴벽화 등이 그것이라고 주장한다. 현대적 의미의 만화는 인쇄술과 땔 수 없다고 주장하며 만화의 역사가 약 100년 정도라고 정리하고 있다. 만화가 얼마나 오래 전부터 생겼는지에 대해선 개인적으로 별 관심이 없다. 그러나 문제는 인쇄술이라는 부분이다.

대량복제, 대량소비라는 대중매체의 특성을 온몸 가득 실천하고 있는 것이 만화여야 한다는 주장. 이 주장으로부터 만화의 발전 가능성은 줄어든다. 인쇄기를 통과해야만 만화가 되고, 작품이 된다는 인식은 자유로운 창작인력의 참여와 장르로서 만화의 성장을 막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미리 작은 결론을 밝히자면 20세기의 만화가 인쇄물로서의 대중매체로서의 만화라면, 21세기의 만화는 더욱 개인적인 작업 매체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미술품의 경우를 들먹일 이유는 전혀 없지만, 만화 역시 복제예술이라는 형식에서 벗아나 단일작품으로서 존재할 수 있어야하고, 그렇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 첫째 이유는 만화창작 인구의 확대를 들 수 있다. 창작인구의 확대를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은 역시 ‘동인지 판매전’ 등을 통해 드러난 아마추어 만화동인들의 활동이다. 이들 역시 ‘만화’의 고전적인 정의에 충실한 모습을 보이며 인쇄기를 통과한 만화책들을 발표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물위로 떠오른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면, 물아래에서 인쇄기에 들어가지 않을 만화를 그리는 이들은 더 많을 터. 또, 이들의 창작성향 중 하나로 분리될 수 있는 ‘전시용 만화 그리기’는 복제예술 이전의 만화, 그리고 그 이후의 만화의 모습들을 예측하게 한다.

이들의 활동 외에 책이라는 매체를 통하던 만화와 미술관의 벽이라는 매체를 지니고 있던 미술품의 경계가 점차로 모호해지고 있음을 들 수도 있다. 만화는 자기가 가진 고유한 영역이었던 종이를 탈피하고, 이제 벽을 향해 치받고 있다. 그것은 비단 극장의 벽, 텔레비전의 벽만은 아니다. 

기록되지 않아도, 다시 볼 수 없어도 만화 일 수 있다

종이를 벗어나 벽으로 진격하고 있는 만화가 새 천년 만화의 첫 모습이라면, 그 두번째는 휘발성 만화가 될 것이다. 이 휘발성 만화는 이른바 ‘만화퍼포먼스’라는 형태로 진행되어왔다. 여전히 몇몇 요상한 만화인들의 동네잔치에서나 보여지던 것이지만 이 역시 새로운 만화천년의 모습임에 확실하다.

만화는 종이를 통해 저장된다. 수용자는 저장된 것의 묵은 내를 통해 만화의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그 재미는 쉽게 보존할 수 있으며 필요에 의해 재독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 휘발성 만화의 정체는 그러한 만화의 기능을 제거한다. 보고 싶어도 다시 볼 수가 없는 것이며, 그 때의 감동을 어떤 식으로도 저장할 수가 없다. 그저 자신이 목격하는 것으로 기억되고, 회자되며 신화화된다.

미술관의 한쪽 벽을 빌려, 만화관련 전시장의 한켠에서 기습적으로 벌어지던 휘발성 만화는 아직 몸의 사용, 신체의 표현으로 국한되고 있는 듯 하지만, 곧 더 새로운 날개 달기가 이루어질 것이다. 만화퍼포먼스, 휘발성만화의 대중적인 모양새는 코스튬플레이(만화분장)의 미래까지도 보여줄 것이다. 모델쇼 형식의 코스프레 역시 무대극의 한 형식으로 자리잡아 갈 것이다. 

디지털이라는 큰그릇, 먹기 좋아진 만화

새로운 천년의 만화를 예고하면서 거듭 강조하고 있는 것이 만화의 저장형식. 이 변화는 지난 천년의 만화에 새로운 흐름이 될 것이다. 이젠 흔한 것이 돼버렸지만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인터넷. 이 인터넷의 출현 역시 종이저장매체의 대대적인 변화를 예고한다.

기존의 컴퓨터가 단순한 저작도구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면, 인터넷의 기능을 가진 컴퓨터는 당당한 멀티미디어가 됐다. 이 멀티미디어의 기능이 만화의 변화에도 한 몫하고 나섰다. 그 첫 모양은 기존의 만화작품을 데이터화시켜 보여주는 방식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는 우둔한 발상에 지나지 않았다. 인터넷 문서의 제1원칙 중 하나에 만화가 작용하지 못한 까닭이다. ‘10페이지 이상은 모니터로 보려하지 않고, 100페이지 이상은 인터넷을 이용하지 않는다.’ 이 원칙에 의하면 기존의 만화는 가볍게 1000여 페이지를 넘는 대작(?)들. 호기심이 아니라면 접근할 이유가 없는 형식이 된다. 이에 반해 오히려 신문의 연재만화들은 나름대로 ‘클릭’ 수를 넓혀가고 있고, 젊은 작가들의 짧은 단편만화들 역시 방문객 수를 늘리고 있다.

인터넷 속의 만화, 속도는 문제가 아니다

짧고 간결하게 모뎀의 속도와 모니터의 크기를 고려한 인터넷 만화의 형식이 새롭게 자리잡아가고 있다. 이는 고속통신망의 가입자 수가 늘어나면서 ‘기존의 만화에 인터넷이 적응하고 있다’는 식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역시 다른 생각을 필요로 한다. 매체에 걸맞는 창작품이 있기 때문이다. 또, 고속통신망은 빠르게 보고 싶다는 수용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지, 오래도록 많이 보고 싶다는 기대와는 거리가 멀다. 즉, 인터넷 만화는 기존의 만화형식을 수용하지 않고, 새로운 만화형식을 출현하게 할 것이다. 그 단적인 증거물들이 최근 유행하고 있는 ‘플래시’, 또는 ‘쇽웨이브’ 등의 프로그램을 이용한 만화들이다.

이들 프로그램은 인터넷상에서 움직이는 이미지들을 만들어내는데 활용되는 명품들이다. 일전 한 논고를 통해 ‘출판만화의 미래는 애니메이션이 아니다’라는 주장의 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프로그램을 이용한 만화들은 마우스의 이동이나 클릭과 함께 그림이 움직이거나 변화하고, 색깔 등이 변화하며, 단계적으로 칸의 그림들이 뚜렷해지는 등의 형식을 보여준다. 출판만화에서 독자의 상상을 통해서 가능했던 운동성과 사실성이 더욱 구체화되는 것이다.

‘영영’ 간다니 가라

하지만 그 역시 만화 읽기의 고전적인 독자층과 재미를 앞지르지는 못할 것이다. 단 종이만화의 독자층 밖에 있던 새로운 독자층의 확보를 위해서, 그리고 국내시장에서 죽치고 앉아 있는 우리만화, 우리문화의 보급을 위해서는 실험적인 창작인들의 참여가 기대된다. 

종이인쇄물에 안주하고 있는 만화가 아직 위험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초기 창작비용에 비해 지독하리만큼 싼 책값에도 불구하고 1/10 정도의 가격에 빌려서 읽는, 그것도 순식간에 몇 권씩을 읽어버리는 소비자가 있다. 소비자들의 요구와 자신의 잇속을 고려해 최대로 싼 종이에 딱 읽고 싶어질 만큼만 공을 들인 작품들을 생산하는 작가와 출판사가 있다. 이 상황 그대로 새천년이 오고, 종이의 대체물을 생산하지 못한다면 만화는 ‘나무 한 그루 베어 만들기에’ 정말 아까운 문화창작물이다. 다른 이가 그렇게 말하지 않더라도 우리 만화인들이 그렇게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또는 너무 큰 필요에 의해 저장형식의 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 물론, 이 주장은 지극히 미시적인 것이다. 더 넓게 그것에 꿈을 발라 말하자면, 만화는 스스로 인쇄매체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예술이라는 지독히 주관적인 틀을 벗어나 총체적이고 대안적인 문화영역으로 성장하고 있다. 이 성장을 적극 지지하는 대중의 보이지 않는 힘, 그 보이지 않는 요구와 기대치는 이미 종이를 벗어나 있다. 새천년을 맞는 만화인들 역시 그 피하지 못할 중력 앞에 서게 된다. 거부할 수 없는 중력의 힘이 우리를 이끌어 갈 것이다. 


 코코리뷰, 한국만화문화연구원, 1999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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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환(만화평론가, 한국영상대 만화콘텐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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