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환, 만화방에 갔다, 만화시비탕탕탕, 1999


칠십 몇 년도에 


높게 걸린 태양 빛이 비닐 썬텐 사이로 힘겹게 기어들어 온다. 

찌그러든 소파 위에서 꼬무락거리며 오르락 거리는 먼지를 잡아낸다.

10평도 되지 않는 공간에서 그윽한 떡볶이 냄새를 참아내며, 아깝게 넘겨보던 책 한 권.

일곱살 적의 나는 그 곳을 나서며 매일 새로운 사람이 됐다.

땡이가 되고, 훈이가 되고, 탁이 됐다. 


팔십 몇 년 엔가


그 후로 10년이 지났을 때, 그 내들이 있음을 알리는 빨간 글씨의 입간판이 보이지 않았다. 묘한 기운에 반기를 들 듯, 고개 들어 본 하늘가에 그들이 있음을 알리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

너무도 비밀스런 계단을 향해 올라야 했고, 그 옛날에 제공되던 국판의 판형은 보이지 않았다. 신국판의 얇은 책들을 손에 쥐었을 때 그들은 나만큼이나 성장한 모습으로 나섰다. 짧게 자른 스포츠 머리의 모습은 간데 없이 사라지고, 더벅머리의 사내들이 내 영혼을 이동케하던 자리에 올라 서 있었다. 잠시간의 당혹스러움이 다른 책을 두리번거리게 했으나, 이내 그 더벅머리 사내의 강대함에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그들이 2층으로 숨었을 때, 처음엔 그것이 서운함이더니 이내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을 만나는 것이 더 이상 자랑스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그들을 2층에서 만나기로 했고, 그들은 내 다가감에 반갑게 새로운 모습을 보여줬다. 그 새로움은 내 죄의식을 유쾌함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었고, 고루한 한정적 사고의 영역을 벗어나 새로운 선(善)과 정의를 나열할 수 있게 도왔다.

그때 ‘오른’으로만 이동하던 내 시선과 고개 짓이 ‘왼’으로 이동하는 훈련을 쌓게 됐다. 


팔십 몇 년, 그때에


급변하는 정황들에 대한 대처력이 생성되고 있을 즈음에 난 또 한 번 그들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지하에 숨어 웃고 있는 그들을 발견하는 것이 어렵진 않았다.

더벅머리 사내는 이제 너덜너덜해진 슬픈 눈을 강하게 만 치켜 뜨고 있었다. 그 눈을 더 이상 응시 할 수 없을 것 같아 그들 중 다른 하나를 찾으려 했다. 서가의 한 쪽에 낯선 책들이 꽂혀있다. 거기엔 경험을 금지 당한 인식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국적이 달라 다르게 표현되는 성과 폭력.

그들의 벗은 몸과 행위들은 ‘이야기’에 대한 새로운 전형을 알려왔다. 

그때 안쪽의 문 하나를 경계로 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있었지만 너무도 설명적인 그림들이 실제와 같은 모습으로 움직였다. 실재하는 영상들. 자막도 없이 펼쳐지는 진기명기였다. 하지만 이해 할 수 있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노랑머리들의 움직임이 즐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90년이 되면서


그로부터 얼마 후 그들과의 접촉을 계획했지만 그들은 더 깊은 곳으로 숨었는지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찾아낼 수 없었다. 대신에 일주일에 한 번씩 서점으로 갔다. 달랐지만 비슷한 모습을 한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닐봉지 안에 갇혀 있어 확인 할 수도 없었지만, 꼭 그들이 아니어도 별무상관이란 생각이 들어 이들을 이제 그들이라 정하기로 했다.    

70년 초부터 만화가 만들어 낸 주변의 문화들과 함께 성장한 화자를 통해 만화방에 대한 느낌을 서술해 봤다. 화자는 70년대 생이며 현재 스물 여섯 이후의 청년이 되어져 있을 것이다. 청년은 소위 대본소 또는 만화방이라고 얘기되던 곳에서 커 갈수 있는 인지력을 구비했으며, 사회가 원하는 기호와 정황들을 설명 받았다. 퇴폐적 구도를 취하는 곳에서 순수가 죽어지는 모양을 쳐다봐야 하는 당혹스러움도 느꼈겠으나, 세상이 그와 다르지 않음을 깨달아 가면서 강한 청년으로 변모했을 것이다. 청년은 만화방이라는 공간에서 자유로운 정서를 구축해내는데 성공 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를 키운 만화방이 이제 사라지고 있음에 쓴웃음을 짓고 있다. 


만화방이 사라지고 있다.


청년의 성장기를 풍요로운 볼거리들로 채웠으며, 넒은 인식욕과 즉시적인 기호 표현력에 도움을 주었던 그 만화방이 없어지고 있다. 아니 국내 만화 산업의 온갖 폐해를 뒤집어쓰고 망가져 버렸음이 확실하다.

정부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문화 산업으로 얘기되며,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고 있는 만화. 하지만 그 만화의 생명을 변호하고 있던 만화방이 사라진다. 정부의 유해업소 규제와 민간단체, 언론의 과도한 ‘만화방 죽이기’의 동조가 이루어낸 현실이다.

그렇게 90년을 전후하며 만화방은 죽어갔다. 어린이, 청소년과 연관되는 모든 폭력적 의심들 속에서 ‘결과의 장’이 된 만화방은 죽어 버렸다. 영세함이 악화를 창출하는 동인이 됨을 업자들은 시인하며 사살 행위에 반기조차 들지 못하고, 맥없이 고꾸라졌다.


서점용 판매시장은 실패했다


90년대 초 ‘만화방 만화’가 국내 만화시장과 만화작품 내외에 끼치는 악영향에 대해서 떠들어대던 만화이론가나 평론가들은 이들의 제사상에서 새로운 방안을 모색하고, 진흥책을 제시했다. 그들은 만화방용 만화가 공장제식 생산라인을 통해 만들어지고 있음을 지적하고, 이는 만화작품의 질적 하락을 가져온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빌려보는 만화방용 만화의 소비시스템은 한국만화의 산업적 발전에 해악을 끼치고 있음을 강조했다. 우리만화의 발전은 판매용 소비형태로의 변화를 통해 이루어짐을 강조했다. 각종 통계와 수치를 통해 개진한 이러한 논지들은 사실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들이 작성한 순서도는 앞뒤가 바꼈음을 인식해야 한다. 이들이 지적한 것 중 작품량에 대한 것이 먼저 문제로 지적된다. 만화방용 만화를 대체 할 만한 서점용 만화의 선 생산이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 그 이유는 물론 일본만화의 시장 장악에 기인한다.


서점에서 판매되는 만화책의 종류는 3가지로 구분 할 수 있다.

첫째, 만화 전문 출판사의 잡지 연재물이 단행본으로 판매되는 경우.

둘째, 일반 출판사에 의해서 출판되는 교육만화, 실용만화. 

셋째, 판매용과 대여점용으로 출간되는 출판물(일반적으로 시장에서는 이를 ‘코믹스’라 부른다)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이들 작품은 가격경쟁에서나 종 수 경쟁에서 일본만화 불법복제물이 형성한 서점시장을 장악하는데 실패한다.

작품의 질에 대한 문제도 가볍지 않다.

만화방용 만화의 대량생산체제가 잡지 연재를 통한 소량생산체제로 전환되면 양질의 작품이 나올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이 역시 기대로 끝났다. 이는 최근까지도 만화평론의 텍스트가 되는 작품중 대부분이 만화방용 출판 만화 시절의 것이라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잡지연재물의 경우 작가에게 연재 시와 단행본 출간 시 두 번의 고료를 지불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당연히 작가는 다작을 할 이유가 없어지고 작품의 질은 좋아져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잡지 연재시 작품 스토리에 변형이 가해진다는데 있다. 연재 중 작품에 대한 평가가 즉시에 이루어짐으로 임해 인기가 있는 작품은 스토리를 늘려 잡고, 인기가 없는 작품은 서둘러 끝내버린다. TV연속극의 고무줄 방영과도 같은 논리다. 이런 식으로 단행본으로 출간된 작품들은 대개가 내용을 종잡을 수 없다. 용두사미식 전개가 많았던 때는 오히려 좋은 작품이 많았던 때로 생각될 지경이다. 이야기는 인기에 따라 쉴새없이 변화한다. 때로는 작품의 성격이나 장르까지도 연재 중 뒤바뀐다.

작품평론의 텍스트로 삼을 수 있는 작품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런 작품들이 산업적인 측면서 회자되고 있음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작품 자체만을 보자면 좋아진 게 없다. 물론, 그림 테크닉은 몰라보게 좋아졌다. 

최근 만화 전문 출판사들은 서점 시장에서의 패배를 옛 추억이 가득한 만화방에서 만회하기에 여념이 없다. 하지만 이미 만화방은 흔적뿐이다. 대신 이들을 위해 만화방의 변종형태로 만들어진 책대여점이 있다. 


만화전문출판사들은 서점용 만화시장에 대한 불신을 천명하고 나섰다. 코믹스라고 불리는 작은판형의 작품들을 만화책방과 책대여점 그리고 서점 판매용으로 생산한다. 국내 만화 출판사의 양대 산맥이라고 할 수 있는 서울문화사와 도서출판 대원도 이에 합류 예전의 만화출판시스템에 대한 향수를 드러낸다. IMF이후 소자본 유망업소로 떠오르고 있는 책대여점도 이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요소가 됐다. 물론, 이런 현상은 양성적인 만화시장을 형성하는데 고질적인 병폐가 된다. 하지만 만화작품의 내적 충실도는 특정 시스템이나 체제에 의해 단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제작 시스템에 의해 악화가 재생산되는 구조는 일정부분 맞아떨어지는 추론이기도 하다. 인기작가의 다작 생산이 줄어들면서 많은 신생 작가 진들이 다양한 작품 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이를 위해 이미 형성된 시장을 파괴하고, 알려지지 않은 시장에 당위성을 심는 노력은 무모하다.

현행 시점에서 서점용 만화, 잡지만화 시장에 대한 진정성 논의도 필요하다. 그들은 시장 진입과 탈환을 위해 전략적으로 만화방을 탈법화 공간(세균 온상지대)으로 몰아세웠었다. 일부 만화평론가, 이론가들의 논의를 내세우며 만화책 만화=악화, 그들의 만화는 양화임을 공공연하게 발표해왔다. 이로 인해 최근 일반의 인식 역시 이와 동일하게 굳어지고 있는 추세다. 그러나 속단할 수 없다.

기존에 광범위하게 형성되어있는 만화방을 차단하고 만화인구의 확산과 산업적인 성취는 불가능하다. 문화, 산업적 당위성 이전에 사회적 당위가 형성되지 못한 것이다.

우리가 쉽게 예를 들고 따라야 한다고 말하는 선진 외국의 경우와 만화 선진국 일본에는 흔히들 만화방이라는 시장이 없다고 얘길 한다. 하지만 그들의 만화와 우리만화의 단순 비교는 오류에 가깝다. 먼저 구미 선진 만화가 지니는 분량을 영상물에 비교한다면 뮤직비디오나 단막극에 가깝다. 하지만 우리가 읽는 만화책은 거기에 비하면 거대한 서사극에 다름 아니다. 즉, 창작/구독 성향 자체가 변화하지 않는 한 보통 10권 이상이 되는 책을 사서 보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물론 이 역시 단순한 비교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일본의 경우도 경기 침체가 본격화되고 사회적 거품이 제거되면서 중고 만화책방과 대여점이 다시 생기고 있다.

요사이 번성중인 책대여점은 앞선 이들의 인식이 얼마나 치졸한 것이었는지를 가늠하게 한다. 만화방의 영업 형태 변경을 통한 새로운 시장과의 접목을 꾀하는 길을 먼저 제시했어야 했었다.

거품으로 형성된 경제기반을 토대로 수치에 따른 선진문화를 수용하는 것이 그리 급한가?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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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평론가 박석환 홈페이지. 만화 이론과 비평, 웹툰 리뷰, 인터뷰, 보도자료 등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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