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박석환의 만화요만화/1998-10-14 게재
만화시비탕탕탕/ 초록배매직스/ 1999 게재
[박석환의 만화요만화]
일상만화
‘우리다운 이야기’담는 그릇/익숙한 장면 보는 즐거움 커
1세기전 극단의 예술,새로운 예술에 대한 빈곤함을 느끼던 시인이자 극작가인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도덕은 세상에서 가장 좋은 사업’이라는 다소 비판적인 화두를 던지는 프랑크 베네킨트(작가·가수)를 만났다.다시 돌아온 세기말 브레히트의 감성이 어떤 것이든 간에 베네킨트의 선문답에 대한 답은 동일하다.신세기에 대한 혼란과 두려움이 무엇이건 ‘가장 좋은 사업’은 역시 ‘도덕’이고 ‘일상’이라는 것이다.
최근 일상 속의 소재를 만화화하는 작가들이 늘고 있다.일상만화는 일상 속에 드러나는 사람간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자칫 진부한 사랑타령에 머물기 쉽다.그러나 중견만화가 허영만 등과 일련의 순정만화작가들은 이런 함정을 피해가며 일상의 만화적인 모습들을 훌륭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신인 만화가 변병준의 첫번째 단편집 ‘첫사랑’은 일상만화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작품집이다.20여쪽 내외의 단편들로 구성된 ‘첫사랑’에서 우리는 주변의 익숙한 등장인물들을 만나게 된다.‘첫사랑’ 속 등장인물들은 보편적 윤리에 자신을 가두고 있다.작가는 이런 등장인물들에게 ‘눈치보며’ 살지 말 것을 권유한다.그리고 이탈의 장소로 주인공과 독자를 함께 데려간다.그런 이탈 역시 아주 소박하고 일상적인 것들이지만.
여자친구를 서울에 두고 지방에서 서적외판원을 하는 사내.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실적을 올려야 하지만 쉽지가 않다.사는 것의 무료함에 한번쯤 자살을 꿈꾸는 많은 이들처럼 사내는 비타민제로 자살연습을 한다(‘싸나이가 울다’).외동딸을 출가시키고 보고픔에 목이 마른 섬마을 할머니.편지가 늦을세라 사돈댁 대문 앞까지 달려가서는 “제일 가까운 우체통에 넣었으니까 내일 아침이면 편지를 받을거야”라며 돌아선다(‘어느 섬마을 이야기’).
자연과 동화된 채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을 사진에 담는 사진작가가 첫사랑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도 피사체와 닮아가는 과정(‘재남리의 첫사랑’) 등 때로는 혹독하고 때로는 나른할 정도로 권태로운 일상의 소담스러움이 한편의 동화처럼 전개된다.몇몇 독자는 만화적인 것을 일상에 대한 극한의 과장으로 믿고 있다.그리고 그런 대중을 위해 만화가들은 극도로 과장된 표현과 묘사들을 보여준다.하지만 우리보다 자유로운 창작환경에서 생산된 외국작품들과 경쟁하기란 쉽지 않다.
결국 ‘우리다운’ 이야기가 필요하다.일상만화의 출현은 우리다운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소담한 그릇이다.아직 그것이 투박하더라도 작가들과 독자들의 고운 손길과 관심이 아름다운 빛깔을 지니게 할 것이다.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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