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환, 담배 한 개비 안에서의 동래학춤, 코코리뉴스레터, 1997.10.20



 

허영만, 「담배 한 개비」, 「동래학춤」

허영만이 택한 두 작품과 한 권의 책


허영만은 96년 5월 한 권의 복간작(復刊作)을 발표했다. 

이 작품집은 대본소만화 체제가 사장사업(死藏事業)이 되고 서점용 만화가 대두(擡頭)되자 대본소용으로 제작된 작품들을 서점용으로 재간(再刊)하는 상황에서 나타났다. 서점용 만화 사업이 확장되면서 저작료를 내지 않아도 되는 일본의 87년 이전 작품이 바닥나자, 새로운 작품의 출간보다 출판비가 작게 나오는 복간작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 복간작에 열을 올리고 있는 출판사는 성인 주간지 《미스터 블루》의 세주문화사이다. 만화잡지의 일본화 경향에 일익을 담당하며 양대 체제로 눈부신 성장을 거듭한 대원동화와 서울문화사의 틈새기에서 우리 만화로 위치를 확보하고 하고 있는 이 출판사는 이현세의 작품을 중심으로 복간작업을 시작했다.

소구층에 비해 아직 그 구비 수준이 열악한 서점용 만화 시장 확대를 담당하고 있지만, 회화성(繪畵性)이나 내용성에서 구차함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일색인데다 복간으로 인한 인기작가 치중현상이 더해질 것이 뻔해 그리 찬사 받을 행위는 아니다. 하지만 썩은 물에도 기생물이 있다면 존재성을 지니는 이가 있는 법. 거기에 당대에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다면 그를 위한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하고, 복권(復權)을 위한 노력도 함께 있어야 한다.

허영만의 83년작인 「담배 한 개비」가 표제작이며 수록작으로 「동래학춤」이 삽입된 이 단편집은 90년대 그가 행하고 있는 작업들을 대변할 수 있는 문제작으로서 그 가치가 충분하다.

최초의 본격 성인만화 잡지 격인 『만화광장』에 연재되었던 「담배 한 개비」는 그가 지니는 이야기 구조와 작품성향을 대변하고, 70년대 어린이 잡지 부록경쟁에 휘둘려 32페이지로 제작 된 듯한 『동래학춤』은 대중작가로서 그의 작업이 예술로 임하기를 바라는 지향성을 지니고 있다. 


작가 허영만의 여정


47년 여수가 태생인 허영만 만화는 비극을 통해 재미를 전달한다. 그의 저변에 깔린 비극적 서사구조의 원형은 이념의 양극단을 오가던 50년대 우리 만화사와도 동일시된다.

이데올로기의 충돌에 의한 여수 반란사태의 문제성이 가시지 않은 정황에서 유아기를 맞이하고, 이념 확립의 궤를 일궈야 했던 그에게 대립 구도의 잔혹성은 큰 축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만화(정치, 시사만화)의 존립 여부가 대중을 선도하는 확성기의 기능 정도였던 50년대의 정황에서 그가 자생적으로 호흡하고 숙성 시켜야 했던 서사구조는 대중의 염원이기도 한 대립 구조의 승률 경쟁일수 밖에 없었다. 때기 만화 시절을 겪으며 대본소 만화의 구조 속에서 성장한 허영만 만화는 대립의 서사구조와 팽배한 일본(日本)만화의 영향 그리고 작가의 확립된 반(反)이데올로기 사이에서 격한 충돌을 보이고 있다.

기실 그의 만화가 한국의 만화문화를 단정 짓는 큰 틀인 이현세와는 다른 방향에서 소구되고 있음은 그 충돌의 성과물임과 동시에 무저항의 혼란 안에서 작가적 입지를 선정한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대본소 만화의 관념성

(대립의 서사 구조)

↗          허영만 만화         ↘

한국만화의 정체성     ←         작가적 성숙 틀

(만화 같은 망가)                  (반 이데올로기 정서)


이 세틀의 붕괴(崩壞)와 화합(和合) 또는 반론(反論)의 제기가 5백여편 이상의 다작을 한 작가 허영만의 창작 틀이다. 만화계 입문 30여년이 되는 그는 박문원, 엄희자 문하를 거쳐 이향원에 이르기까지 9년 가량의 도제식 수업으로 상당한 수준의 기술적 회화력을 지니고 있다. 이 기술적 회화력을 돋보이게 하는 연출력과 현실 회피적이고 개인 침잠적인 대사 사용이 그의 만화가 지니는 매력이다. 그의 만화가 지닌 미덕은 대립으로 시작된 갈등 돌파를 저변으로 두고, 개인성을 위한 싸움으로 반신(反神) 또는 아웃사이더를 기술하는데 있다.

만화매체의 허구성이 만들어 내는 이야기 구조의 매력을 대립물과의 이해 해결에 활용하지 않고, 주인공의 자아 확립 여부에 둠으로서 작가의 고뇌를 대변하고, 둘 중 하나를 택해야하는 정서적 갈등 폭을 만들어 낸다. 이것이 독자의 몫이 되면서 사실적 이야기 구조를 이끌어 간다. 여기에 더 많은 허구를 삽입하는 것으로 연재 만화 또는 시리즈 만화가 지니는 종결의 난항까지를 해결한다. 독자도, 작가도, 편집진도 강력하게 원하진 않지만 필요한 것으로 간주한다. 필요의 ‘위치 찾기’에 의한 노력이 허영만을 회자되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곳 ‘재미’라는 필요 인 것이다.


74년 「집을 찾아서」로 데뷔한 그는 대본소 만화의 구조 틀을 융해시키고자 또는 산업적 팽창의 욕구에 의한 전략으로 등장한 「제2회 소년한국일보 신인만화가 공모전」에 입선하면서 데뷔한다. 『각시탈』등의 초기 만화시절 사전심의라는 큰 이해구조를 독점하고 있던 산업가들에 의해 민족주의적 성향이 짙은 작품을 생산한다.

단일 굵기의 굵은 터치가 주종을 이루던 70년대 후반기 한국만화는 활동성의 매력을 살리기 위한 노력으로 일본 극화체가 지니는 터치의 ‘깊고 옅음’을 받아들인다. 허영만은 당시 일본 만화 표절 논의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만화가 이향원의 문하에서 그 기능을 자기 것으로 소화해냈다. 『이겨라 밴』 등의 명랑만화를 그리던 이향원은 데츠카 오사무의 영향하에 있던 일본만화의 간결하고 담백한 선을 답습했고, 츠바 데쓰야식의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허영만의 초기 성공작이었던 『각시탈』은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당시 붓터치가 가미된 극화풍으로 인기몰이에 한창이던 김민 유의 터치를 더해낸다. 허영만은 아동만화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는 둥근 선과 큰 눈을 성년극화의 8등신 캐릭터에 성공적으로 도합해 이강토라는 캐릭터를 창출해냈다.

그러나 80년 중반부터 수그러들지 않는 일본화풍의 지대한 영향과 아동잡지 연재를 위한 노력으로 인해 이향원식의 화풍을 답습한다. 간결한 구조의 화풍으로 독자의 캐릭터 도출력을 강하게 하고 프레임의 다변화와 영화적 기법의 차용 등으로 이야기 맥락을 채워 나아갔다. 컷 수의 증가로 기존 3, 5권으로 편집되던 작품의 분량을 10권 이상의 대작으로 늘려 갔다. 이어 대본소 구조를 성공적으로 이끈 만화 산업인들에 의해 독점적 소구력을 행사할 수 있는 -해야하는- 작가가 된다.

80년대 허영만 만화의 고정(固定) 캐릭터 사용은 생명력 연장과 타작품으로의 분계(分界)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방향성으로 제시되기도 했다. 초기 대본소 만화 체제의 성장을 도왔던 일본 극화체 만화의 정립과 80년대 스타작가 이현세의 등장으로 스포츠신문에 국한되던 극화가 어린이 만화에까지 심층적으로 확대됐고, 그 확대의 한 여파를 허영만이 담당했다.

80년대 인쇄매체 만화 제작 환경이었던 분업화된 제작공정을 받아들이면서 이강토는 다시 변신한다.  당대 만화 캐릭터의 한 유형인 도식화된 인상의 배치와 굴곡 있는 인체 데생은 분업화 작업에서 생길 수 있는 후리선을 배제하고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방편이었다. 하지만 허영만은 만화문화의 폐해로 기록되어지는 공장제(工場制) 작품생산에 한계를 느끼고 스스로 행해 온 작업들에 대해 반성하며, 대본소 체제 만화와 결별을 선언한다.

조운학이라는 이름의 작가가 그의 대본소 만화환경을 넘겨받았으며 현재는 독립적인 위치를 구가하고 있다. 허영만은 그의 작품들을 통해 자아 몰입에 대한 두려움들을 제시했었고, 양극단으로 비견되고 대두되는 상황에서의 결정에 우유부단한 주인공을 등장 시켰다. 이 작업의 파생물인 이강토는 그와 같은 시기에 작품활동을 했던 이현세, 박봉성, 고행석, 박원빈 등의 캐릭터와 같으면서도 같지 않은 존재감을 지니게 했다. 

그가 만화평론가 손상익의 서를 통해 발화한 “이데올로기는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일 따름이다. 사상적인 문제로 사람의 생명까지 빼앗고 빼앗겼던 암을한 시대는 다시는 반복되지 말아야 할 역사이다.”라는 화답은 작가적 정체성을 대변하는 말과도 같다.  


허영만 읽기와 두 작품 보기


「담배 한 개비」


허영만은 『담배 한 개비』를 통해 그가 지니는 반골성향 또는 비판적 보헤미안의 정서를 드리운다. 당대 만화의 구조 틀을 벗어나 있는 이 작품의 특징은 첫째로 이야기 구조의 압축성을 들 수 있다.

80년대 초 대작 성향이 컸고, 거대 담론에서 완전하게 비켜서길 갈구하던 대중이 만화를 찾고 있었다면, 그의 250여 페이지 짜리 단편은 이에 저항하는 제스처였다. 물론, 조심스럽지만 의욕적으로 시작 된 『만화광장』의 출간에 붙여진 작품인 탓에, 소구대상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에 시도 될 수 있었던 현상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넘어가기엔 그가 끌어들인 스포츠 영웅은 너무도 보잘것없고 나약한 대중 일뿐이었다.

둘째로 대립자의 부재를 들 수 있다. 한국만화의 큰 특징은 권력의 상징성을 지닌 대립자의 도출이다. 거기에 대립자가 눈을 지니지 못하게 하는 사고 틀도 유지하고 있다. 마동탁의 안경이나 장미의 안경 또는 한동수의 안경 등이 그것이다. 이 작품에도 역시 안경을 낀 인물인 대립자가 등장-달수의 장인-한다.  하지만 그의 위치는 작가의 지면관여(誌面關與)와도 같은 맥락에 있는 이해자 또는 주인공 개도자의 모습 일뿐이다. 허영만은 이 작품을 통해 그의 철학을 드리운다.

외적 대립자의 도출이 아닌 내적 대립자 즉, 자기 자신의 문제이기도 하고 그가 택한 ‘어떤’의 문제이기도 한 것의 심층적 갈등 틀. 대립자의 파괴로 자신을 확대시키는 것이 주류 작가들의 성향이었고, 그가 살아 온 현대사의 이해 관계였다면 허영만은 이에 반하는 주인공 자아의 파괴로 자신(또는 주인공화된 독자)의 사고 틀을 확대시키는 쪽에 선다. 물론 책이 덮여 질 때까지 옳고 그름의 판단은 없다. 무엇이 좋았고 무엇이 나빴다고 말하는 인생을 만들지 않는다.

세번째는 그의 작품이 지니는 소박성과 뛰어난 구도 연출, 낭만적 회화성이다. 허영만은 주류작가들이 지니고 있는 낭만성향이 짙은 주인공들을 이끌고 있지만, 타작가들의 캐릭터에 비해 완전히 다른 도시적 이미지와 현실성향까지를 어우른다. 그의 작품에 보헤미안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주류작가들의 낭만적 주인공들에 대한 현실비판으로 이해해도 좋을 듯하다.

대중작가로서 인지도를 지니는 맥락은 만화에선 캐릭터이다. 하지만 이 캐릭터의 변모는 작가적 위치의 위험부담감을 크게 한다. 그러나 현실성에 대한 고민이 많은 작가는 인지된 현실을 수용하고 자신의 대변자인 캐릭터에 그것을 조합시켜 낸다. 허영만의 작품에서 변화의 폭이 많은 주인공 이강토(변달수)는 그런 작가 정서의 소산이다. 


작가는 작품의 도입에서 주변의 개입에 의해 몰락되는 주인공을 구성해 낸다. ‘잡념을 없애게 해주십시오. 넘어야 할 산이 많습니다. 주먹 이전에 정신력의 싸움입니다. 이런 일로 신경을 쓰게 되면….’ 지혜와의 결혼을 승낙 받기 위한 장인과의 대립에서 ‘경솔하고 성급한 친구’인 달수는 결혼을 승낙 받지 못한다. 스스로 자기 위안을 행하고 있는 달수는 더욱 도발적이고 강성을 지닌 지혜에게 이끌린다.

‘챔피언 벨트보다 벙긋벙긋 웃는 손주 얼굴이 더 효과적일 거야.’ 달수는 지혜의 확신에 대한 보상처럼 신인왕이 되고 챔피언 결정전에 지명된다. 지혜는 임신 삼개월의 몸으로 달수를 찾아온다. 작가는 주인공의 잡념으로 지혜와 태아를 개입시키고 달수의 도전은 1회 KO패로 끝나고 만다.

잔기침을 유난히 길게 하는 지혜는 ‘시합 중에 자꾸자꾸 아기 이름만 떠오르고...’라며 안겨오는 달수를 맞이한다. 관장은 재기전을 잡고 지혜와 헤어질 것을 요구한다. 달수는 잡념의 근원을 없애기 위해 태아를 지우자고 제의하고, 지혜는 자살을 기도한다.

병원에 실려간 지혜의 긴 기침은 결핵(結核) 3기로 알려지고 제왕절개 수술 중 복막염이 재발해 죽게 된다. 달수는 시합 전 소식을 접하고 4회 TKO로 패하고 만다. 그리고 한차례 더 치러진 시합에서 ‘죽은 지혜의 유아를 받아 안 듯이’ 결핵을 옮겨 받았음을 알게 되고 선수생활을 포기한다.

작가는 7년 후 달수의 복권(復權)을 위해 권투이력의 대물림을 계획하고 장인이 인큐베이터 안에서 키운 아들 두오를 개입시킨다. 폐병장이 걸인의 모습인 달수는 동년의 아이들보다 더 연약해 뵈는 아들 두오에게 권투를 가르치려 한다. 작가는 두오와 달수의 관계 개선을 위해 가족사를 이끌 결핵을 중앙으로 부각시킨다. 장인은 어린 두오의 고생을 보다 못해 서울로 데려가고 달수는 두오를 찾으러 기차역으로 나갔다가 피를 토하며 쓰러진다. 달수는 두오를 찾아 서울로 가려고 준비를 해 놓고는, 목을 메 자살을 한다.

달수의 장지(葬地)‘에서 ‘결국 그가 멋대로 살아버린 자유의 궁극엔 그와 같은 고독과 파멸이 준비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 면역이 되어있지 않을 뿐 … .’ 친구인 제천을 빌려 마지막에 참가한 작가의 소리는 이 극의 종결이 주는 의미를 되짚으려하고 있지만, 일반성향을 지닌 독자의 호흡으로 양보하고, 장인의 눈을 통해 달수가 나무꾼 설화를 빙자해 지혜에게 올라서고 있음을 형상화한다.

도입부에서 작가가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를 믿고 있는 지혜’를 끌어들인 것처럼 이 극화가 전래동화에 대한 재해석임을 강조한다.

‘그래. 그래. 아무렴 목숨이 탈까 … 목숨이 탈까.’ 장인이 달수의 이해를 도모하고 있는 듯 하지만 작가는 두 축의 경계를 얼굴을 가르는 눈물로서만 이끌어 내고 자신감 있는 엔딩 타이틀을 만들지 않는다. 그것은 ‘이때였다’로 이어질 마지막장을 위한 배려로서 드라마를 이끄는 작가의 연출력을 돋보이게 하는 대목이다.

‘갑자기 뒤에서 달수의 기침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 그것은 지혜가 남긴 선녀의 두레박이기도 했다.’ 작가는 어린 두오에게 결핵의 가족사를 지니게 하고, 독자에게 되풀이 될 인생을 적어 내게 한다.


「동래학춤」


『각시탈』의 발표시기 전후일 것으로 추측되는 이 작품은 허영만 스스로도 연대(年代)를 알 수 없을 만큼 인지도가 낮은 작품이지만 그가 이 작품에 자신의 작가관이 개입 되어있음을 공표하고 복간작업을 하는 등, 시사하는 바가 큰 작품이다. 엉성한 배경묘사와 터치 등이 작품감상을 저하시키는 원인이기도 하지만 대본소만화 중기의 활로를 개척해낸 작가의 보다 개인적인 작업을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일제시대 곡마단이 시장문화의 활성과 외래문화 도입으로 대중의 중앙에서 쇼비즘을 연출하고 있을 때, 동래학춤의 전수자인 강토는 서커스에 심취해 있다. 공연시간이 됐는데도 한 사람도 없는 객석을 보고 ‘진정한 예술이란 관중의 숫자와 무관하다’는 아버지에 이끌려 공연을 준비한다.

꼭 한사람이 참여한 공연은 ‘한심하기 짝이 없’이 시작된다. 학춤을 추는 아버지는 ‘벌써 한 달째 매일 와 주’는 멀쑥한 차림의 노신사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아버지는 그의 정체(正體)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그저 동래학춤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아껴만 주신다면’으로 만족 한다.

강토는 ‘국수가락 잡수시고도 흐뭇해하시는’ 춤꾼 아버지를 이해 할 수가 없다. 다음날도 한사람뿐인 관객을 두고 하는 공연은 계속 됐고 ‘학춤을 모르는 천명의 관객보다 배고프지만 나는 주저 없이 이쪽을 택하겠다’며 회한의 눈물을 흘리지만 강토는 서커스 외에는 관심이 없다.

강토의 문제로 밤을 지새우고 있던 아버지는 일본군에 쫓기는 독립군을 보호하려다 사살된다. 작가는 일군의 만행을 중앙에 위치케 했으나 그들에게서 잔인성을 도출해 내지 않고, 객관적 시각을 유지한다. 이들을 지휘한 이시다 구니마쓰 헌병대좌는 동래학춤의 유일한 관객이자, 이해자였던 멀쑥한 차림의 노신사였다.

학의 파닥임은 끝나고 강토는 술로 연명하는 세월을 보낸다. 멀쑥한 노신사는 총독부에서 나온 높은 사람들과의 술좌석에 동래학춤이 곁들여지길 원하고, 살의를 품은 강토는 단도를 숨기고 춤을 춘다. 아버지에 비해 딱딱한 느낌의 춤사위를 펼치고 있는 강토를 보며 동래학춤의 이해를 구하기 위해 내빈에게 설명하고 있는 이시다.

악의에 찬 춤사위 곁으로 아버지의 시신과 멍석에 앉아 춤을 지켜보던 노신사의 모습이 중첩되고, 강토는 이시다를 향해 아버지의 눈물과 자신의 감정이 합의 된 칼을 내리친다.

칼은 사람들의 단발마에 이어 식탁 위에 찍혀지고 강토의 동래학춤은 새로운 전형을 구사하며 끝을 맺는다. 노신사는 강토의 춤에 대한 당위를 인정하고 동래학춤의 진지성을 설명한다. 강토는 동래학춤을 버릴만한 용기도 없거니와 이어나갈 마음가짐도 지니지 못한 스스로에게 지쳐가고 있다.

이시다는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강토에게 ‘예인’이란 칭호를 적은 편지를 보내고 동래학춤의 전수에 대한 입장을 지니게 한다.

강토는 아버지와의 정신적 교감을 통해 학춤을 연습하지만 봐줄 한사람의 관객이 없음에 아쉬워한다.

‘강토야 너는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 춤을 추느냐? 진정한 예술은 주관적이어야지 객관적이어서는 안된다. 진정한 예술의 극치는 외로움을 이길 줄 아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소유물이다. 날개를 펴고 춤을 춰라. 학춤을 춰라.’

아버지의 정신적 관여는 작가의 지면 관여로 대체 되고 신명난 춤사위를 펼치는 강토 앞으로 얼굴을 보이지 않는 관객이 수를 더 해 형상화된다. 수십 수백의 아버지가 관중이 되고 박수와 웃음이 이어진다. 강토의 만족감에 그득한 웃음과 눈물이 마지막 장 위에 올라선다.   


「담배 한 개비」 위에서의 「동래학춤」은 아직 시작되지 않고


이 한 권의 책이 허영만 작품세계를 관통하고 있다고 말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의 작업 경향에 대한 단초를 제공하고 있음은 확실하다 할 것이다. 「동래학춤」은 허영만의 창작 동기 설정과 예술관에 대한 소편이다. 화자인 아버지와 강토를 작가의 심경 토로를 의한 장치로 만들고 동래학춤의 유일한 관객을 높지 않은 목소리의 대중적 관심, 또는 예술 사대주의에 처한 저변의 시선을 환기시키려는 구도로 사용한다.

허영만 자신의 변과 같이 이 작품은 허영만의 작품세계를 이끄는 큰 흐름이다. 그가 일본인 관객을 배격할 수 없음은 허영만 만화의 원류를 인정한 것이며, 그를 위한 연습으로 인해 새로운 관객을 확보함은 자기 만족에 처할 때 아름다울 수 있는 예인을 보이는 것이다. 이는 그가 택하는 작업성향 중에 일본색 짙은 캐릭터와 선화에 대한 대중 작가적 고충을 설명하는 것일 수 있다. 

「담배 한 개비」는 그가 캐릭터의 수정을 거친 뒤 의욕적으로 시작한 성인만화로서 차후 지니게 되는 허영만의 명성을 뒤받침 할 수 있는 작품이다. 그의 존재함이 특출남은 『담배 한 개비』에서의 기묘한 연출력과 자아로의 침잠과도 관계가 깊다.

주인공이 영웅으로 화하는 방법에서 사실성과 화합하며 만화를 극화이상의 개념으로 이끌어 간 것이다. 이는 일반의 성향을 벗어난 작법으로 지속되는 몰패주의(沒敗主意)와도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그가 한국 만화계에서 리얼리즘을 공포할 수 있는 유일한 상업작가임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기도 하다. 

하지만 근간 주간지 만화에 국한되고 있는 그의 작업은 연재 만화의 특수성과 일반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비트』의 구성은 동시기에 너무도 큰 파장으로 다가서 버린 학원 경파물-『진짜사나이』, 『짱』등-에 의해 의미소를 잃어가고 있고, 엘리베이터 액숀게임으로 지속되고 있다. 『세일즈맨』과 『오늘은 마요일』도 작품의 소재가 지니는 문제의식과 이야기 전달이 충분함을 넘어서고 있는데도 에피소드 중심으로 극을 늘려가고 있는 느낌이다. 그의 작품들 중 상당수가 용두사미 격으로 끝나고 있음에 대한 걱정들이 지속적으로 재기되고 있지만, 이번의 경우도 그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가 원한 것 중 「담배 한 개비」의 선상에 있는 작업들은 상당수준의 성공도를 보여오고 있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평준작 외에 진정한 의미의 마스터피스가 만들어지지 않고 있음은 「동래학춤」의 시연이 아직도 미루어지고 있음을 보게 한다. 이는 허영만 개인의 만화작업에도 긴 파장을 일으킬 것이 확실하지만 한국 만화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어쩜 그가 아직 추고 있지 못한 동래학춤으로 인해 독자의 즐거움은 보장되고 있는지 모른다. 우린 꼭 그 춤을 지켜봐야 한다. 그의 준비가 너무 늦어지지 않게 경계하며 지켜봐야 한다. (끝)


한국만화문화연구원, 코코리뉴스레터, 1997. 10. 20 게재

박석환, 만화시비탕탕탕, 초록배매직스, 1999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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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평론가 박석환 홈페이지. 만화 이론과 비평, 웹툰 리뷰, 인터뷰, 보도자료 등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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