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환, 코어와 고어 장르의 결합을 통한 이현세의 독자층 확장 노력, 히스테리, 1997.07.21


 

 


-이현세, 『천국의 신화』- 



필자가 이현세를 처음 마주한 것은 `보물섬`에 연재되었던 『검객 스카라무슈』를 통해서였다. 이후로 이현세라는 이름은 필자의 만화인 명부 중 최상 위에 위치했다. 소위 명랑체 만화가 주는 일편향적인(?) 유희 안에서 빠져나온 뒤 줄곧 만화 읽기의 즐거운 괴로움을 느끼게 했던 작가가 이현세였다. 

이십대 중반인 필자의 반생 위에 군림하고 있던 작가. 그의 필치와 화려한 행보에 존엄의 시선을 드리우기도 했었고, 그것이 과하게 표출될 땐 시기와 치기 어린 비난을 불사하기도 했었다. 한 권도 빠뜨리지 않은 이현세 작품목록을 만들겠다는 생각은 전작을 섭렵하게 했었다. 그러다가 어느 핸가 도저히 그의 행보를 따르지 못하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가 읽을 수 있는 텍스트보다 많은 작품을 내놓았던 이현세. 

그에게 빠져있던 시간동안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멀리하고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나를 태만하게 만들었으며 어리석은 골수분자로 포장해버렸는지 그제야 느꼈다. 그리고 둘러본 주변의 만화는 이현세에 대한 열정을 후회스럽게 했다. 

80년대 후반, 그를 제외한 우리만화의 모습은 필자를 격한 흥분으로 몰고 갔다. 그리고 그 흥분의 원인들을 주변에만 위치하게 한 것이 이현세가 지니는 카리스마(다작생산) 탓일 거라 믿어버렸다. 필자는 어렵게 이현세를 부정했으며, 반 이현세론자가 되자고 다짐했다. 

아직도 이현세와 그의 작품은 강한 유혹과 기대를 지니는 것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이현세가 사랑하게 도운 우리만화가 보다 필자의 가슴을 이끌고 있다.



『천국의 신화』와 `우리 만화판의 신화` 이현세의 입장(立場) 


만화가 대중매체로서 대중 설득력을 지니게 된 후 그처럼 많은 모양으로 변화한 작가는 전무 할 것이다. 언론매체의 스타 지향성과 우상숭배의 그늘에 가린 대중심리가 자웅일체(雌雄一體)되어 만화보다 더한 만화적 인간으로 기록될 작가가 이현세이다. 만화에 대한 담론이 활성일로에 접어들 때 그의 이름 앞에는 수많은 수식과 찬사가 뒤따랐다. 개척자로서, 모험가로서, 꿈꾸기를 멈추지 않는 작가로서. 

그는 80년대 이현세류 내지는 까치풍이라는 계보를 형성해낸 만화 판의 대들보인 것이다. 이제 그의 작업은 만화 매체의 진두지휘자로서 타자(他者)를 함묵케하고 동참하게 하는 존재감을 지니고 있다. 그런 그가 90년대 들어서 다작생산(多作生産)의 굴욕을 벗기 위한 노력-쇼비즘에 멈추고 말았지만-을 보이고, 캐릭터 사업과 만화 작가의 위상 높이기에 힘을 기울였다. 

만화 문화 정착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타 영상매체-영화 귀천도-의 초고로서 만화 원고를 내 놓았다. 만화의 보존성을 높이기 위한 씨디롬 작업에 참가하고 만화관련학과 교수로도 활동한다. 그리고 상당수의 지분을 지니고 있는 세주문화사를 통해 우리만화의 유통시장 개혁과 활성에도 일조하고 나섰다. 거기에 그 누구도 확신하지 못할 한국의 상고사(上古史)를 다루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의 행적은 여태 그랬던 것처럼 수많은 추종자(追從者)들을 이끌어낸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자신이 예시한 곳-`후회`라는 산문을 통해-에 위치하지 못하고 있다. 주변이 만들고 있는 스타 작가로서의 위치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그의 권능함을 따르던 자들이 폭사-『아마게돈』의 상업적 실패-하고 그 마저 시대가 주는 호기(好期)에 너무 심취 당하고 있는 형상을 보이고 말았다. 


『천국의 신화』 역시 이현세라는 이름 아래로 포진한 이들이 많다. 스토리 작가 이근배가 스크립을 짰고 해냄 출판사가 그 어처구니 없는-한질 100권-계약을 체결했다. 『토정비결』의 소설가 이재운은 현대 극화가 말을 아끼고 행동 묘사를 통한 지면배열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것과는 상이하게, 이해시키지 못할 그림에 대한 도움말을 말미에다는 작업과 기획, 감수에 참여했다. 이현세의 근작 중 대부분에 터치력이 차용되고 있는 이상세의 흔적이 여실하고, 책의 서두에 밝힌 세 명의 어시스트들도 훌륭하게(?) 위치를 들어낸다. 


종전보다 보강된 배경 묘사와 세심한 터치가 수준작의 반열에 올려놓으려는 지향성으로 보인다. 제책 역시 무게에 걸맞은 호화로움을 뽐내고 있으며, 뒷표지에 실린 언론의 예찬은 전폭적 지지의 국면을 보이고 있다. 이것이 일국(一國) 최고임을 시인케 하는 이 작가의 성공적인 의도들이다. 

아직 그 끝을 알지 못하는 작품에 대한 평가는 이르지만, 유례없는 지반을 형성하고 있는 작품의 함량(含量)을 예측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이 글은 총권 4편까지에 국한된다.



소프트코어와 하드고어 장르의 대두

 

20대 전후의 만화 작가 진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90년대 만화판은 포화상태에 이르고 있다. 만화 전체를 아우르는 수준작을 쉽게 찾을 수는 없지만, 선화(線畵)와 그림 연출만으로 치자면-그것이 캐릭터의 도용이나 왜색이 짙은 구성 요소로 채워지고 있다 하더라도-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들이고, 독자를 향한 밀착성 유지도 탐복 할 만한 수준이다. 하지만 아동만화와 성인만화의 변별점이 섹스와 폭력묘사만으로 국한된 우리 만화의 현실은 작자들에게 의도적 알몸씬을 연출하게 하거나 활동성을 지닌 폭력장면묘사에 치중하게 한다. 

성인물의 경우 장면 묘사의 태반이 이불보로 가려진 알몸들의 갈등에 연유하고 있으며, 아동지 연재물의 경우는 폭력대결을 통한 네러티브의 전개가 한 무리를 형성하고 있는 지경이다. 주간 소년 연재 만화가 컴퓨터게임과도 같은 설정을 지속시켜야 팔린다는 절박성을 유지하듯, 성인 주간물 역시 강도가 더해지는 섹스씬만을 점층화 구조로 보이고 있다. 

일본의 경우 80년대 이후 포르노(hard core)와 폭력물(hard gore)의 혼합장르가 돌출 되었고 이미 활성화 되어있다. 하드코어포르노(hardcore porno) 물의 양산이 금지되고 있는 국내 만화 계의 슬픈 대안은 고어 장르와 소프트코어(softcore)의 결합일 것이다. 

80년생 독자는 이미 불법 복제출판 된 일본만화-『공작 왕』, 『북두의 권』 등-를 통해 고어 장르에 대한 훈련과 일독(一讀)이 끝난 상태이다. 이에 우리 만화가 바탕을 깔고 있는 것은 심령만화와 순정체만화의 사이키델릭한 변용이었으며, 『소마신화 전기』유의 영웅격투물 또는 무협환타지물의 제시였다. 

시장은 훈련된 독자들에 의해 쉽게 형성됐다. 그 바탕에 일본의 정서-島國根性, 脫亞入歐정서, 軍國主義, 사무라이정신 등으로 혼재된(소위 야하고 폭력적이라는 기저정서)-로 가능했던 만화적 표현들이 관용화된 규칙처럼 우리만화의 표현법으로 활용되고, 신의를(?) 버리지 못한 독자에 의해 익숙해졌다. 이러한 형태의 만화(과 포르노적이고, 과 폭력적인)가 일가(一家)를 이루며 신국면을 제시하고 나서자 사전심의로 `적당선의 표현`이라는 규칙을 지니고 있던 대표작가들은 소외되기 시작했다. 

만화의 문화사적 위치가 상승하고있는 지점에서 인지도를 형성해낸 작가층은 활성국면에 있는 만화문화의 대변자로 나설 수는 있었으나, 독자의 감성을 따라오지는 못했다. 이에, 앞서 제시한 슬픈 대안을 들고나선 이가 대표중의 대표작가 이현세이며 그 작품이 『천국의 신화』라 하겠다.




『천국의 신화』와 청소년 독자 


전혀 별개의 사실들로 읽히기도 하고, 종잡을 수 없이 어우러진 여러 문명의 에피소드 나열로도 읽히는 이 작품은 아직 평가의 단계로 진입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유일무이한 상고사의 서술이라는 점과 여가 문화 안에서 늑장을 부리고 있는 우리만화의 결과물이라고 말해야 할 때, 이현세의 흐트러짐(?)이 완결작까지 이어져서는 안 될 것이기에 논의를 제기한다. 

글과 그림의 다름을 그가 모르진 않을 터이지만, 환영과 사실의 차이처럼 당혹스러운 것에 이현세적 상상력이라는 척도를 제시하고 있음은 쉽게 합의 될 수 없는 논란거리이다. 의사 표현의 수단과 생식을 위한 본능 지향적 섹스, 의복 착용의 활용성, 제천의식과 도구제작, 가족구성원에 대한 배려 등, 입증되지 않은 표현 역시 막아야 할 것이다. 더구나 환웅의 대장정이 일본 만화의 전쟁 영웅 서사물처럼 느껴지고 있음은 어찌해야 할까? 보지 말아야 할 것들을 너무 열성적으로 보아온 필자의 그릇된 선입견일까? 


동기부여에 결합되지 않는 연출의 실수일수도 있겠으나,-기실 필자는 실수일수는 없으니 의도한 것이라 가정하고있다.-지속성을 띄고 배치되는 sado-masochism적 섹스(이미 그 본능적 유희를 느끼고 있는)와 살육의 표현 등이 『천국의 신화』가 코어/고어의 혼합장르로 읽혀지게 한다. 연출의 힘을 빌린 공포의 유발이나 단죄(斷罪)의 형상을 이끌지 못하고, 결과론적인 정지 묘사의 형상화와 의도적 잔인성의 개입이 남발하는 것이다. 

엉덩이를 보이고 허리를 숙이는 뒷모습의 여자가 성적인 의중(意中)을 품게 한다는 것이 당대의 풍속이라고 억지로라도 믿으며, 불거지는 아랫도리를 잡으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수간(獸姦)을 고결하게 행하고, 어린 호모의 만족스러운 웃음이 표현된 이 작품을 상고사의 정리라 믿을 수 있는가? 이는 소프트 코어와 고어 장르의 혼합에 대한 이현세의 훈련이고, 더 이상 까치의 힘에 의존하지 않는 청소년 독자층에 대한 유혹일 뿐이다. 

상고사를 다루었다는 언론 일각(一角)의 과찬과 이현세의 주독자층인 성인들에 의해 『천국의 신화』는 교육성을 지니는 작품으로 일반에 이해될 것이며 자녀선물용-또는 권장도서-으로의 가치를 지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역사환타지물에서 이현세의 새로운 만화성향(漫畵性向)이 성공한다면, 그간 성인물에 중점을 두면서 사그라들었던 독자층의 확장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현세는 애니메이션 『아마게돈』의 실패이후 `개인적으로 담담하다.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는데 대해 후회스러울 뿐이다. 다만 나를 믿고 투자해 준 분들에게 미안하다. 그리고 『아마게돈』을 기점으로 해서 애니메이션에 뛰어들려고 했던 분들에게 미안하다.`라고 말했다. 

지금 만화판에는 환타지의 시대가 도래했다. 그가 또, `뛰어들게` 할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만화전문지들을 통해 대하역사환타지물의 기획이 속출하고 있는 실정이긴 하다.-새로이 등장하는 독자층까지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 하는 듯한 움직임이 곱지만은 않다. 



난제(難題), 이현세 


이현세의 캐릭터 까치가 한국 만화계의 가장 우열(優劣)한 존재로 부각된 것은, 한시기에 부응하는 표정을 굵은 터치 뒤로 숨길 수 있었던 재기(才氣)와 연출의 힘이었다. 그 재기조차 다른 일손들에게 양보하고 있는 이현세와 까치는 이미 의미소를 상실하는 허울일 뿐이다. 이현세의 현재 독자층은 그리 넓지 않다. 이현세 논의는 만화 자체의 담론화 형성에 의해, 만화의 대명사로서 굳어진 인식의 덕 이상을 지니진 못한다. 그의 마지막 독자층인 70년생 마저 이미 새로운 볼거리를 찾았고, 그에겐 80년생 독자층이 없다. 

이현세의 하드고어 장르에 대한 확신과 상고사를 통한 위장은 성공적이었으나, 이 장르의 일본만화적 표현들에 매료된 독자층을 다스릴 수 있을지는 의문시된다. 

만화영화 『아마게돈』에서 조차 정위치-소구 대상에 대한 이해-를 취하고 있지 못한 그의 캐릭터들이 더 이상 세대의 확장을 이루진 못할 것이다. 이현세의 고정 독자층인 30대 이상 성인층은 그가 내민 새로운 만화작법에 의아함을 표할 것이고, 이미 일본만화로 훈련된 20대 이하 독자층은 미약한 이현세만화의 이면을 확인할 것이다. 

그가 멀티플레이어로서 90년대 들어 수없이 행한 것들의 대개가 언론을 지나 대중까지를 이끌지 못했던 처럼, 일본만화의 한국화 노력에 동참해있는 『천국의 신화』 역시 우리만화의 실패작중 하나로 표기될 공산이 큰 것이다. 


만화천재라 평가받는 이현세는 우리만화의 대형 파수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와 기존 작가진영이 지켜낸 울타리(우리만화시장)는 이미 수없는 침입로(일본만화의 공세)를 지니고 있고, 침입자들의 호들갑에 내부인들(독자)은 혼란을 지나 동의를 표하고 있는 지경이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자신이 지켜내지 못할 구역을 다른 이(신진작가)에게 배분해야 한다. 더 많은 이들에게 울타리를 막을 수 있는 수훈의 기회(만화창작)를 주어야 한다. 하지만 아직도 이현세는 보폭을 넓게 하고 책임 구역을 양보하지 않고 있다. 자신의 가랑이 사이로 흘러드는 침입자도 막지 못하는 지경이지만 다른 이(신진 작가)의 도움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만화 시장은 독불장군의 버티기로 인해 전멸 당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이현세의 작품 『천국의 신화』는 독자층의 확장을 위한 자체적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작가로서 대중의 성향을 읽어내고, 그에 대처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고, 노력이 있었다면 찬사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만화계의 봉건영주 이현세의 집권기는 이미 말기의 증후를 보여 온지 오래다. 살을 깎아 내는 작품이 아닌, 이름을 깎아 먹는 작업은 멈춰야 한다. (끝)


모던코믹스봄, 히스테리, 1997.07.21 발표

박석환, 만화시비탕탕탕, 초록배매직스, 1999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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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seokhwan

만화평론가 박석환 홈페이지. 만화 이론과 비평, 웹툰 리뷰, 인터뷰, 보도자료 등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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