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환, '히스테리'的 히스테리, 코코리뉴스레터, 1997.03.25




80 년대. 텔레비전을 통해 연일 방영(放映)되는 숱한 대립의 모습들이 브라운관의 양끝에 걸쳐져 있었으나, 눈길 한번 돌리지 못하고 중앙의 아스팔트만을 바라보며 멍한 표정을 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 70년생 필자의 모습이었고 가날픈 인식(認識)이었다. 그리고 공중 파의 이념대립(理念對立)이 하나로 달려오는 화상을 보이고 있을 때 그 앞에서 마주 뛰어야 했을 필자는 천장을 향해 드러누워 버렸었다.이미 내 안에 자리한 자아(自我)의 손상을 막기 위한 수단이었다. 이미 오른 과 왼으로 나뉘어 있을 그것의 이동이 나를 넘어지게 하리란 걸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 2월 23일 오후7시, '젊은이'라고 말하기엔 너무도 어설픈 한 세대(世代)를 만났다. 40대가 젊은 기수(旗手)가 되던 시대를 모두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 저마다 젊음을 표방하며 그 어휘가 주는 알싸함으로 뭔가 이뤄보려고들 하는 터에 여기 만화(漫畵)판에 또 하나의 '젊음'들이 있어 그들과 대화를 나눴다. 그들은 도서출판 대원[1]의 자본과 영업력에 의지한 채, 만화 작법(作法)의 새로움을 표방하며 96년에 월간 만화지 《만화실험 봄》을 발표했던 이력을 지니고 있다. 이번엔 만화/대중문화지《히스테리》를 자력으로 출간하고 기념회를 치렀다. 소위(所謂) 실험만화를 한다고 하는 이들 집단은 기존 만화작법의 해체(解體)를 주장하며 '두렵다고' 말하던 새로움을 무지몽매한 대중(大衆)을 향해 분사할 계획인 듯 하다. 편집진이며 작자인 이들은 이대 후문의 작은 카페 내, 외부와 화장실 등을 이용한 설치(設置)만화[2]를 발표했고, 신일섭(27)의 개인 퍼포먼스와 밴드의 공연, 출간 담을 연출해냈다. 《히스테리》는 7편의 만화와 대담기사, 그리고 대중문화에 대한 몇 가지 읽을거리들로 채워져 있었다.



《히스테리》에서의 만화


만화는 점과 선 그리고 면으로 구성되어져 있는 가장 기본적인 형상화 단계를 거쳐 전달의 매개(媒介)로서 인식화 되어진다. 그것이 그림이라는 회화성과 조화되고, 인식 문화 중 최고로 치부되는 활자 매체와 교합(交合)함으로서 설명적인 그림이 되어진 것이다. 이 설명적인 그림의 배열에 부조화를 삽입하여 감정의 이동을 갖게 하는 것이 기존의 띠만화가 되어졌고 동양권에서는 극화(劇化)체[3] 양식의 만화라 불려 지게 되었다.-현존하는 만화의 구성체계는 매우 실험적인 몇 작가들에 의해 재정립된 것이 사실이지만, 새로움을 받드는 일반성이 대중매체의 수용자에 의해 어느 정도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미니멀리스트나 팝아티스트들에 의해 만화의 기능적 맥락이 오용되어진 적도 있지만 리히덴슈타인의 그림을 보고 '아 이것이 만화구나'라고 말할 사람은 더 이상 존재치 않는다.-그 외에 부가적인 표현들은 그림 언어의 강화를 위한 장치일 뿐이다. 그것들은 자체로서 만화의 힘을 양분(兩分)해 가질 수도 있지만, 타매체의 영향으로 대체 될 수도 있다.   


90 년대 한국 만화계는 기존에 이미 성행하고 있던 만화의 믹스미디어(mixmedia)화가 주창 되어지자, 새로운 표현성향들에 대한 자부가 관련인들 사이에서 민망스러울 정도로 구체화되고 있다. 개인적 의도 표출의 가치성을 확보하기 위한 실험적(?) 표현들에 대해서 적당한 분석 체계의 확립과 연구가 선행되어져야 하지만, 우선 적으로 들 수 있는 그네들의 새로움이 구태를 벗어버리지 못한 관념성(觀念性)에 근거한다면 우리만화의 역사와 함께 했던 흉내내기나 베끼기와 같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번에 창간호를 낸 《히스테리》중 7편의 만화 작품은 그들이 드러내는 기발성과 기민한 행위에 대처 할 만한 가치를 지니지 못했다. 그들이 한없이 외쳐대는 기존 작가진영의 표절 행위에 동참하는 모습들도 확인 할 수 있었다. 만화와 만화간의 연계(連繫) 장르에서 이미지의 차용(借用)은 표절의 위치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우매한 생각이 그들의 주장이 아니길 빌면서 작품들이 갖는 개별적 도용(盜用)을 유추(類推)해보고자 한다.


차례 지면의 편집은 지금으로부터 70여년도 더 전에 취리히 다다이스트[4]들이 즐겨 사용하던 레이아웃[5]이었으며 그리 적당하지 못한 예술의 주장이었다. 현대 대중 미술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긴 하나 그들의 해체 의지는 일반에게 오해의 여지를 불러일으키기 충분한 것이었으며 철저히 개인에 묶여진 것이었다. 예술가와 사기꾼이 이음동의어(異音同義語)로 불려지게 하는 결정적 요소들을 제공한 것에 그치고 말았다. 그들이 치뤄낸 출간 기념회 역시 다다들의 모양을 취하고 있었으며 이 철지난 유행은 문학 진영에서 10년 이상 우려먹었던 식상한 메뉴다.-하재봉, 장정일등의 소설을 보라. 영화화된 『아담이 눈뜰 때』에서 은선의 시집 발표회 장면은 신일섭의 그것과 너무도 흡사하다. 그 두 작가 역시 하루키 표절 논의에서 자유롭진 못했다.- 색다른 카페문화의 조성과 파티 창작[6]이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이미 몇 년 전 부터 너나없이 하는 너스레일 뿐이다. 다다이스트들이 만화를 덧붙여 말했든 《히스테리》가 다다를 덧붙여 말하겠다는 의지로 읽힐 수도 있겠으나, 필자를 이끌진 않았다. 해체의 낯설음에 대한 반가움보다는 고통스런 독법을 괜스레 만들어 둔 것이라 믿게 하는 정도에 멈추고 말았다. 출판은 작화하고 있는 행위자의 드러내지 못한 개인적 예술성향 까지를 읽어주진 않는다.


《히스테리》에 실린 만화 중 오영진의 작법(作法)과 계획 된 의도의 형상화(形象化), 줄새[7] 사이로 이어지는 정지 구도의 묘사 등은 이미 극화가 주류를 이루는 한국만화의 관용화(慣用化)된 연출 패턴이다. 단새의 이동에 매끄러움이 부족하며, 컷의 변화가 주는 시각 전달력을 배제한 연출은  미흡함으로밖에 읽을 거리가 없다. 오세욱의 작품은 심정(心情)표출에 중점을 둔 것으로 여타의 작업이 스토리의 개연성(蓋然性)을 살리지 못하고 이미지의 형상화에도 성공적이지 못한 것에 비해 그나마의 수준 작이라고 말 할 수도 있겠다. 단편이 지니는 당연(當然)함을 벗어나지 못했고, 미숙한 데생력으로 담묵화적인 붓터치의 거친 화법을 차용한 것-이 기법을 차용한 만화는 선례를 두기 귀찮을 정도로 많다. 일본의 '낯선 만화'들 대부분-역시 간과 할 수 있는 주제는 아니다. 70년대 후반 문학지들 사이에서 줄기차게 소재로 택해지던 '이탈 된 개인과 고립된 주변'은 더 이상 흥미를 끌지 않는다. 허리우드 영화『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내 마음의 고향 아이다호』 등으로 계속되어지는 황량한 고속도로의 이미지와 『아키라』에서 끊겨 버린 다리의 형상을 그가 암기하고 있는 듯 보이는 것은 어찌할까? 강성수의 작품은 이중 가장 흥미로운 것으로 읽힌다. 전선(電線)이라는 매개(媒介)로 미디어와 대립된 자아라는 극히 단조로운 주제를 설정, 잘 다듬어진 터치로 그려내고 있다. 4째 페이지 다층(多層) 컷의 연출은 60년대 미국 지하 만화의 거장 크롬의 지면분할법(紙面分割法)과 변용된 화법을 답습하고 있는 듯 하고, 낯익은 캐릭터와 사이버펑크 코미디장르의 일본식 계보를  따르고 있는 듯한 선화(線畵)/ 터치가 거슬리지만 세주문화사의 『미스터블루』를 통해 발표한 『황금 알을 삼킨 거위』를 확인하면 그가 썩 그럴싸한 모양으로 작가 진영으로 흡수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구도적 직관력(直觀力)과 표출력(表出力)이 우위에 있음이 확연히 드러난다. 김동고의 표절에 대한 에세이적 만화는 화면구성에서 같은 형식 만화가 보이는 반전과 부조화(不調和)[8], 페이소스의 생성력을 따르지 못하고 있다. 대체로 굴곡 없는 선의 깔끔한 쓰임이 보이지만 단순화 과정에서 생기는 캐릭터 구성력과 허물어진 등신비가 나름의 조화를 얻고 있지 못하다. 하지만, 그림이 주 형식이 되지 않는 것-필자의 만화관-이라 언급하지 않겠다. 그 외에 텔레비전 광고를 연상케하는 데생 작이 있었지만 이 역시 만화로 볼 이유가 없음으로 배제하겠다. 당혹스러운 것은 정말 만화답게 그려진 노미후의 작품이다. 서울문화사의 《빅점프》에 연재 되고 있는 『매일서는 남자』의 그것과 너무도 흡사하여 이름을 다시 봐야 할 지경이었다.


형식과는 무관하게 관념 성향을 뚫을 수 있는 대안(代案)은 훈련 된 천재에게서만이 가능하다. '1500개 정도의 기호를 이용하여 모든 스타일의 악곡이 기록되는 음악[9]'을 생각해 보자. 도대체 어디에서 이제껏을 무시한 새로움이 창궐 할 것인가? 하지만 기보(棋譜)법에 사용되는 기호의 한계성은 절대음감의 표출이 가능한 천재를 생성케하는 제도(制度)로 읽히고 있다. 악보는 소리를 정확하게 옮기려는 의도에서 또는 연주 방법에 대한 구체적 지시로서 발현되어진다. 그 외의 것은 악보를 보는 사람의 몫이다. 형식과 내용상의 한계가 그 끝을 보이고 있음은 오래로 부터이다. 만화를 포함한 모든 장르문화가 그러할 것이다. 진정 새로움은 소망하는 것이지 발견하거나 발명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소망함의 표식이 작품 안에 베어 있음을 보게 하는 것이 이 시대의 출판이고 만화여야 한다. 그 소망함과 열망함이 어떤 형식을 취하고 있냐는 문제제기는 이후의 작업이어야 한다. 형식의 변용이 수작의 반열에 안치케 하는 정도(正道)라면 출판만화가 이어져야 할 이유는 전무하다. 그리고 그들이 복사문화인 만화를 택할 이유가 없어진다. 변용된 형식과의 조화물을 생성하기 위해선 한 번의 실험함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히스테리》의 편집방향과 취지는 반가운 것일 수 있으나 극히 미진한 창작력과 만화에 대한 이해도(理解道) 부족을 새로움이라는 말로 오용(誤用)하고 있음은 매우 유감이다. 입증된 가설-처음의 시도였던 《만화실험 봄》이 도서출판 대원을 통해 5천부 절판이라는 수확(?)에 기꺼워한다면 대본소를 통해 2만부 판매에 안일해지던 전시대와 다를 바가 없다-에 대한 확신조차 가지지 못하는 우매함으로 대중을 향한 직격탄을 싸 올리고 있음은 타자에게 새로운 만화적 소재를 제공하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만화는 대중의 쪽으로 향해 있는 것이지 매체를 향한 것일 순 없다. 내용 면에서도 그들 스스로 만들어 재낀 만화적 일상(日常)들을 구체화시키는 노력 외에는 만화 자체에 대한 탐구와 노력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90년 《만화창작》이라는 계간지를 통해 발표한 신일섭의 만화가 그리워진다. 그의 발전함을 한없이 기다리고 있던 범인(凡人)들에게 편집인 신일섭은 기우뚱거림만을 주고 있는 꼴이다.


요놈, 요놈, 요 이쁜놈 - 독자와 작자 사이


그들에게 작금의 만화는 감각(感覺)취와 도용 된 수식들로 가득한 몹쓸 것들임에 분명한 듯 했다. 60년대 극화를 주류로 이끌어낸 모든 작가를 표절작가라고 말하길 꺼리지 않았으며 자신들의 움직임만이 미래만화의 전형(全形)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들을 비웃어야 한다. 가당치도 않을 연습장을 만화잡지라고 우기는 이들에게 '허허 고놈 참'이라고 말하길 잊지 말아야 한다. 그 옛날 냄비받침이나 화장지 대용으로 또는, 폐품 납품용으로 활용되어지던 만화책들처럼 그들의 잡지도 그렇게 활용되어야 할 것이다.


그들은 당대의 만화작가와 제도 그리고 현학(衒學)취가 만연한 어엿한 독자 가운데에 놓여져 있었다. 그 팽팽한 긴장 구도를 직면코 있었으나 필자는 아무런 감흥도 얻고 있지 못했다. 신일섭은 이런 말을 해왔다. '우린 너무 많은 시간동안 고통스럽게 지내 왔다... 우리의 만화를 이해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얼마간 더 그럴지 모르지만..그것은 피눈물 나는...' 필자는 감히 그들의 피눈물이 현 작가 진영이 동년(同年)기에 흘린 눈물과 같지 않으리라 믿는다. 까닭이 전 세대들에게 당위적 요소로 작용하는 것일 순 없지만 그 이유가 이만큼을 이루게 한 것이라 고개짓만을 되풀이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들과의 대화 중 우문 한가지를 덧붙여 보았었다.


"과연 당신들이 전시대만큼의 새로움을 구사 할 수나 있겠는가?"


하지만 한가지 그들이 현위치를 벗어나진 못하게 해야한다. 얼씬도 하지 못하게 매도하고 단절해서는 안된다. 그들 작자진이 아련한 기대치라도 간직할 수 있게 이끌어야 한다. 지금이 아니라고, 여태도 아니라고 돌아서 버려선 안 될 것이다. 그들의 미약한 화법은 이내 강권(强勸)함을 찾을 것이고, 그들의 견지(見地)는 이내 풍요로운 만화적 정서를 이끌어 낼 것이다. 속으로만 말하자.


'요놈, 요놈, 요 이쁜 놈들'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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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서출판 대원은 90년대 들어 놀랄 만한 사세 확장력을 보이며 우리 만화계의 양대 메카 중 하나로서 군림하고 있다. [슬램덩크]를 주포로 장착하고 어린 신진작가들의 희망찬(?) 창의력과 집필력을 돈으로 환산해 주면서 만화 시장의 확장에 지대한 공헌을 해냈다. 일본잡지의 선례를 그대로 도입해서 소구 대상 차별화 정책의 미명을 수행 중이기도 한 이 집단은 다 매체로서의 만화산업 창출에 정력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 만화실험 봄} 은 그들과의 연계가 '피 눈물 나는'것이라고 했으나 그쪽이 아니라면 어디에서 그와 같은 시장성에 관심을 두겠는가!  


[2] 만화에 대한 이해도의 확장을 요하는 이들의 작업은 96년 서울 국제 만화 전에서 일본만화와 표절작들을 올려두고 제사를 치르는 상황의 설치로 시도되어졌다. 국제 무대에서 영원히 죽어져야 할 한국 만화를 바라봐야 하는 참혹스러움은 페스티벌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을 거슬리게 하지는 못했던 듯 하다. 단지 이슈를 쫓는 몇몇 언론에 보도되어지고 있었을 뿐.


[3] 이 용어에 대한 제 정의가 시급하다. 극화도 아닌 극화 체라는 조어로 발전되어 범용 어휘처럼 쓰이고 있는 이 말은 장면 전환과 스토리를 지닌, 드라마가 있는 전 범위의 만화를 지칭 할 수도 있고 못 할 수도 있다. 제한적이지도 못하고-이 말로 인해 만화체, 순정체라는 새로운 조어도 생겼다-광범위하지도 못한 이 어휘를 대체할 문구의 개발과 장르의 재편 작업을 기대한다.


[4] 한스 리히터, [다다 예술과 반예술], (서울, 미진사, 94) 1916년 전쟁의 중심지에 위치한 취리히의 볼테르 카바레 등지에서 종교적 이상주의자 후고 발과 모순 된 허무주의자 트리스탄 짜라 등에 의해 주도 된 예술 운동. 예술의 융합과 저장된 모든 것, 모든 보존 가치의 파괴와 재조합 등을 부르짖었다. '다다'는 루마니어와 슬라브어의 긍정 사로서 '그럼, 그럼'의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5] 근저에 그러한 표현들은 허리우드 B급 영화의 범인이 인쇄된 타이포그래피를 조합하여 협박편지를 쓰는 데나 활용되어지고 있다.


[6] [인 서울 매거진]이라는 향락문화 조성지가 무차별 배포 될 수 있는 원인이기도 한.


[7] 안수철, [만화연출], (서울, 글논 그림밭, 95) 만화의 지면분할에 대한 나름의 어휘선정-칸새 : 칸과 칸 사이, 단새 : 단과 칸 사이-에 이 책의 미덕이 있다. 더 많은 우리식 어휘가 현장에서 생성 되어지고 공표 되어지길 바란다.


[8] 앙리 베르그송, [웃음], (서울, 세계사, 92) 만화가 웃음 즉, 감동의 전이에 목적성을 지니고 있다면 부조화는 그 이완에 가장 큰 기능성을 지니는 것이다.


[9] 조루즈 장, [문자의 역사], (서울, 시공사, 95)



(끝)


한국만화문화연구원, 코코리뉴스레터, 1997. 3. 25 발표

박석환, 만화시비탕탕탕, 초록배매직스, 1999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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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seokhwan

만화평론가 박석환 홈페이지. 만화 이론과 비평, 웹툰 리뷰, 인터뷰, 보도자료 등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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