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환, 우리만화의 대중이탈, 스포츠서울, 1997.01.03

- 80년대와 80년생 그리고 우리 망가 [1]

 

 


80년대에는 거부하고 파괴할 가치가 있는 무언가를 창출하기 위해 부정을 선으로 믿었다. 천박한 자본주의와 권위주의적 억압을 묵인해 온 부르주아적 공모의 소심함. 파괴되어야 할 무엇. 그 시절 모든 문화의 사단은 권력 찬양과 계승에 대한 당위성 찾기에 주력하고 있었다. 인식론적 단절감과 존재론적 고뇌가 기초 관념처럼 철벅거리던 시절. 대체 문화가, 호소 가능한 문화가 절실하던 그때에 애당초 허구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사실과의 접목을 시도한 극화체 만화가 대중의 무력감에 대한 방어 매체 또는 대리 충족의 매체로서 등장했다.  

 

까치[2]의 비장 주의는 괜한 겉 폼이 아니었으며 엄지[3]의 지고지순함 또한 가부장을 이유로 드는 오류가 아니었다. 어디에도 있었던 거대의 권위와 부대껴 보지도 못하고 주저앉아 존재에 대한 자가당착에 독기 서린 눈만 치떠야 했던 시절. 까치의 무섭도록 슬픈 눈과 힘에 대한 애착은 이현세 혼자만의 토로가 아니었으며 무당거미 이강토[4]를 통한 자아 확인은 지리멸렬한 승부 욕과는 그 정황을 달리했다. 과하다 싶어 민망할 지경인 민족주의에 매료당한 채 짙은 서정을 풍기는 회색 연기의 위태한 이륙에 의지 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에 한국 만화는 전대에 미뤄 두었던 꿈의 확장을 이룩해냈다.

 

 

 

 

 

 

대본소 만화의 쇠퇴  

 

주저 앉을 여지가 더 이상은 없어 보이는 소파 위에 비통과 자기 안위에 지쳐 버린 몸을 기대인 채 밀폐된 공간에서 읽어 내려가는 만화는 그 내용이 담아내고 있는 무한의 힘에 대한 동경 자체만으로도 위안 일수 있었다. 세상으로부터 이탈하기 위해 때로는 초월하기 위해 부여잡은 그 척박한 문화유산은 무지랭이 같은 시대 정신을 나열하고 있었다. 구영탄[5]의 미련스런 묵묵부답은 투쟁에 대한 믿음의 환기였으며 최강타[6]의 절대 운명은 개척에 대한 신념을 일깨우는 것이었다. 저급함이 주는 소스는 간단하고 달았다. 활자 매체가 가져다주는 몽매한 환영을 부지불식간에 해결해 주는 이 기특한 매체는 만화적 현실을 살아가는데 대한 화두를 제공하고 있었다. 대중적 파급효과의 지대함으로 미래에 대한 꿈까지 책임지려 들었던 만화는 70년대를 걷혀 내면서 그 모양새의 다양함을 보여 왔다.  

 

일본에서 시도되어 성공적으로 파생되면서 만화의 대명사로 자리 메김  되어진 극화[7] 형식이 때기 만화[8](50년대) 시절을 종식시키고 대사와 지문의 생략으로 보다 리얼리티에 근접해져 갔다. 일본의 만화가 비약적으로 발전 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된 것은 극화체 형식의 개발에 그 지표를 두고 있다. 극화체 만화는 기존의 스토리텔링이 갖은 단조로움을 거부하고 만화 안에서 글자 매체의 이탈을 꾀한 움직임으로서 미국 스토리 만화의 형식과는 상반된 개념의 작업이었다. 만화 매체가 사용하는 의미 전달 요소 중 상당 부를 차지하고 있는 언어 체제는 침묵의 사운드와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던 것으로서 화상 매체가 가지는 매력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극화체 만화는 말칸 중심의 대사나 지문을 사라지게 하고 컷의 분할이나 장면 전환을 유기적으로 형성해 나가며 그림 위주의 내용전달을 꾀했다.  

 

 

 

이 과정에서 종래의 만화에서 볼 수 없었던 다각도의 그림 연출이 필요해졌고 영화에서의 여러 기법[9]을 차용하게 됐다. 리얼리티가 강조되어야 할 부분에서 방해의 요소로 작용하기도 했던 말 칸과 지문의 자리를 순수 그림 언어만으로 형상화시키면서 독자에게 가독성을 줌과 동시에 컷과 컷 사이 또는, 장과 장 사이의 구분에 제한을 두지 않는 등의 노력을 기했다. 미국 만화 단행본이 글과 그림의 확연한 분리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면 그에 비해 글과 그림을 융화된 의미 소로 조작해 낸 일본 극화는 컷의 연결에 의한 내용 전달을 위해 그 분량을 넓혀 갔고 만화의 장편화를 이끌었다.  

 

일제 강점 하에 조성된 문화라는 이유도 있지만-사실 신문 만화는 유럽의 영향(20~40년대)을 받아 발전한 것으로 보이지만 만화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면서 이를 받춰 줄 만한 작자 층의 빈곤과 일회성 자본의 투자가 가까운 일본 만화의 도입을 이끌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 만화는 『밀림의 북소리』[10]를 시발로 영화의 매력 요인 중 상당수를 내포한 극화를 받아들였고 여기에 기인한 대본소는 많은 양의 분권 작품을 저가에 대여할 수 있는 체제로서 저소득층이 다수를 이루던 시기에 알맞은 독서 문화로서 자리하게 되어졌다.  

 

일본에서 극화 형식의 실험적 작업이 성공한 것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60년대를 기점으로 한다. 한국 만화의 시작이 일본의 강점 하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라 일본 만화가 한국 만화에 끼친 영향은 절대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만화에 대한 진지한 탐구와 연구, 학습의 기간을 지니니 못한 채 수용됨으로 인해 60년대를 시작으로 극화의 전성기가 구가되어졌던 80년대까지 한국 만화는 그 임무를 다 하지 못하고 나약한 자리 메우기에 전열을 기하게 되었다. 그것의 처음은 공급자와 수용자 어느 쪽이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모두가 원하는 것이었으나, 누구도 원치 않는 결속이기도 했다. 일본의 해적판 만화는 정부의 일본 문화 유입 절대 금지 조치에 의해 은밀성을 보장받았고 그 은밀성으로 인해 보다 광범위한 지하 루트 또는 공개 루트를 통해 한국 만화 시장의 상층부를 공략 할 수 있게 됐다.  

 

한국의 대표 만화가들이 세대의 변화에 맞춰 자신의 주 캐릭터를 가공하고 내용과 형식을 변경하여 성장하는 독자에게 호소했던 것과 같이 한국화 된 일본의 만화는 그 처음을 아동 만화로 시작하여 지금의 성인 만화 수용에 껄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도록 조정하고 있다. 90년대 그들 만화 산업의 주력 종은 아직도 존재감이 느껴지는 인쇄 매체 만화와 그 틀 속에서 행복하게 성장해 나간 애니메이션이다. 낮의 정조관념이 저녁 빛에 무력한 것과 같이 그들 만화의 독특한 유혹을 블랙마켓에서는 거부 할 수 없던 것이다. 저급함을 담보로 펼쳐졌던 대본소라는 복합 문화[11]장소는 돌연 장사꾼들의 개입으로 독과점 형태의 자본가를 배출하는 등 기형적 성장을 거듭했다. 이 중 가장 큰 축을 이루는 사항은 일본 만화의 도작/불법 출판의 성황과 프로덕션화 된 만화 제작공정[12]을 들 수 있다.    

 

 

 

 

80년대 만화를 대표하는 작가는 앞서 언급한 이현세[13], 허영만[14], 박봉성[15], 고행석[16] 등이다.  이들 작가는 『공포의 외인구단』으로 대표되는 만화의 초 장편화를 계획한 이들로서 이전 3,5권이 주종을 이루던 것과는 다르게 30~50권을 작품의 분량으로 삼았다. 전에 비해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한결 심층적이고 다채로워지긴 했지만 그 많은 원고를 혼자 감당하기란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들은 만화 제작 공정을 두부 자르듯 나누고 각 공정을 담당해 낼 숙련자를 구해 분업화를 이루어 냈다. 초기 일본의 극화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는 작업 분담을 도입한 것이다. 그들의 작품은 독과점 상품처럼 무차별 공급되어지기 시작했다.    

 

20~100여명에 이르는 집단이 그들의 생산력을 증가하게 도왔으며 스토리 작업의 분담으로 소재와 내용의 한계가 보여지지 않았다. 고갈되지 않는 샘물처럼 새로운 만화들이 모습을 보였다. 수용자층은 손가락 안에 드는 인기 작가의 작품만을 섭렵하기에도 벅찰 지경이 되어졌고 공급자는 증가된 일손의 기능급여를 제공하기 위해 작업량을 보다 늘려야 했다.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방책이었음인지 고정 캐릭터의 모습이 그리기 쉽게 단순화되어져 갔고 급격히 경제적인 터치로 재창조되어졌다.-이러한 현상은 8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구체화 되 갔는데 일본 만화의 간결한 터치의 영향이기도 하다.- 졸속과 속성 제작이 눈에 띄게 증가했고 작자 자신도 모르는 작품에 대한 변을 늘어놓아야 할 때도 생겼다. 비디오 영화나 추리소설 등을 그대로 모사한 작품들도 등장했다.  

 

시장의 성장은 수용자층의 확대를 낳았고 만화판의 수치상 수직 상승을 기록하게도 하는 등 그 기여도가 지대했으나 선별 수용의 자세를 취하게 된 수용자층과 80년생 수용자를 유치하지 못하고 대본소는 성년 극화류 전용장이 되어 버린다. 결국 대본소는 허울 좋은 부피 성장으로 메가 스타 몇몇을 만들어 낸 후 급속도로 사장되어져 갔다.(90년대가 되자 2만여 곳에 달하던 업소가 5천여 곳으로 줄었다.) 80년대 공영 방송사에 의해 처음 시도된 총천연색 방송이 대중의 안방[17]까지 다가갔고, 정치권의 억압에 반한 문화적 해방 전략도 타 대중매체로 독자를 뺏기게 되는 계기가 되어졌다.  

 

80년대 일본 만화 시장은 거대 로봇에 대한 기대 심리의 허황성을 알아  버린 수용자층과 작자의 고뇌가 마징가[18]로 대표되는 존재를 사장시키고 대량 생산라인을 통해 제작되어지고 군부에 의해 소모되어지는 건담[19]류 로봇 만화를 등장케 했다. 군대라는 메커니즘 속에서 죽어지고 내부와의 이념 갈등과 이데올로기 싸움에 의해 희생당하는 새로운 로봇 만화의 전형을 등장시켰다. 뉴타입으로 대표되는 이 건담 신드롬은 한국에까지 퍼져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디즈니류[20]가 전부였던 만화 캐릭터 산업에 프라모델 건담과 건담의 캐릭터가 담긴 각종 팬시 제품 등이 잇따라 상품화되어졌다.  

 

만화 시장의 변화는 인쇄 매체 만화에만 쏠려 있던 한국 만화판을 한웅큼이나 뜯어먹었다. 대본소는 극화라는 새로운 만화에 대한 기대로 등장했다가 그들의 표리에 의한 아귀다툼과 암묵적이었던 일본 만화 시장의 표면적 부화, 그리고 아동 만화 시장을 고려하지 못한 전략의 편협함까지가 이유가 되어 사장 문화가 됐다. 90년 초 한 통계[21]에 의하면 대본소를 찾는 주 고객이 준성인과 성인층(75%)이었고 실제 우려했던 것과 같이 아동의 접근이 용이하지 않았다는 근거를 드러나게 했다. 2%를 넘지 않는 초등 학생 수를 내세우며 한국 만화가 아동의 전유물이라는 것은 지나친 착각이었다고 말하면서 고지식한 성인 독자층의 참여를 유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판단의 뒤꼍에는 한국 만화가 어린이에게 호소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야 하는 씁쓸함을 지니게 한다.  

 

대본소가 어린이 문화와 한국 만화에 끼친 영향은 거대했다. 그 초석에는 신문 만화의 틀을 벗어나 시작된 50년대 떼기 만화의 열풍이 있었다. 이데올로기의 과한 대립이 낳았던 전시의 어수선함 속에 국민적 위안과 연대감의 조성으로 새로운 만화 문화가 열린 것이다. 더 이상 시사성이나 허풍선 류의 풍자를 골자로 두지 않았으니, 국민적 정서가 바라보기에서 행동의 양태로 바뀌었음을 시사하고 있다.근본적으로 만화는 허구의 어법이었고 그 허구의 어법은 상상 안에서 이루어지는 개도국의 꿈으로까지 확장되어질 수 있었다. 현실에서의 허구는 그 자체로 당위성을 보장받기 위한 사실적 노력을 경주해야 하는 것이었고 그 노력에 의해 만화는 가능한 메시지의 전달자가 되어진다.  

 

당대 만화가 지니는 골계의 기본 사항은 권선징악과 희망이었다. 대중을 이끄는 힘은 확성기를 쥔 독보자가 아니었다. 그들 만화의 화두가 보다 유용하고 편리하게 제공되어져야 한다는 방침 하에 또는 적은 투자에 대한 고액 보장이라는 경제 논리와의 야합이 은행식 출판을 이끌어 냈다. 2천여 명의 작가가 한 해 30억권 가량의 만화 출판물을 만들어 내는 우리 만화판의 은행은 일본이었다. 대동아 공영의 이륙에 찬물을 뒤집어쓰고 말았던 그들의 강력한 선민 사관 표출이나 패배 의식이 짙은 컴플렉스성 영웅 만들기는 우리의 것으로 변형되어져도 가능한 것이었다. 만화가 희망이라면 자본주의는 경쟁이었다. 희망에 대한 경쟁은 양분을 원치 않았다. 일본 만화의 도작이 성과를 과시하자 그나마 우리 만화 일수 있었던 것들이 일본의 극화 형식이라는 성공에 대한 담보를 끌어안기 시작했다. 경쟁 체제에 대한 확신을 포기한 이들의 작품이 선 위에 설 수 있었다.  

 

오사무로 대표되는 리미티드 필름 애니메이션[22]이 저가 정책에 힘입어 한국의 방송을 활보했다. 이제는 40대가 되어버린 60년대의 만화 수용자들은 정책적으로 금지되어 온 일본 만화를 우리 것으로 고쳐 수용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고 그들이 공급자의 위치에 설 때까지도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은 채 『마린 보이』(71년 작)나 『은하 철도 999』(79년 작)의 주제가는 희망의 노래로 애창되어졌다. 그만큼 일본의 만화 문화는 다양한 것이었고 수용력이 풍부한 것이었다. 70년대 그나마의 대표 작가들이 만들어 내던 작품들은 만화 자본가들에 의해 파행적인 성장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 만화의 거대한 산을 뒤로하고 군웅할거의 시대에 뛰어든 당대의 작가 군들은 쉽고 빠른 길을 택했다. 만화 시장의 팽창은 예견되어 온 것이었으나 그 팽창을 조장한 이들의 성장은 수치 상승 외에는 실현되어지지 않았다.  

 

10년을 주기로 큰 철퇴를 맞아 온 저급 문화의 대표 매체였던 만화는 아동을 회유하기 위한 술책을 빈번하게 꾀하고 있었으나 그들의 지불 능력을 의심했다. 거기에 당국이 내세우는 아동 윤리에 관한 법조 항이나 아동 만화 사전 심의에 대한 부담감은 작가 군들의 창작에 대한 열망을 억제하게 만들었다. 극화가 일본에서 그 모습을 들어낼 때 그들이 주장하던 바는 수용자 층의 연령 확산을 꾀한 것이라고 했다. 만화의 선을 보다 사실적으로 하고 내용에 충실성을 기한 그들은 성인 만화와는 다른 어린이 만화에서 파급 된 성년 만화를 극화로 분류하고 다 연령층에 호소하기 위한 작업을 했다. 70년대까지 한국 만화의 전부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대본소만화는 아이디어의 고갈과 형식 및 내용의 다양성을 꾀한다는 이유로 그들의 극화 분류법을 받아들였다.  

 

 

 

땡이(초등학생)로 대표되던 만화문화는 독고탁(중고생)을 거쳐 까치(20대)로 완성되어진 것이다. 만화는 그 자유스러움의 표출을 위해 인생 중 가장 급박하고 때로 한가로운 20대[23]를 주인공으로 정해 갔고 그 와중에 아이들의 소리를 담지 않는 것에 묵언의 합의를 표하고 말았다. 이로 인한 공백은 언론사들의 어린이 만화 잡지 창간 붐을 이루게 했다.

  

 

잡지 만화의 태동과 일본 만화

 

만화의 적응기에 한국 아동 만화를 섭렵했던 60년생 독자층을 타겟으로 했던 대본소는 만화의 존재 가치인 자유스러움을 내재하기 위한 전략으로 주인공의 나이를 청년으로 한정했고 이현세의 놀랠 만한 성공에 기인한 출판사 측과 작자 측은 까치류 만화를 극화의 전형으로 자리하게 했다. 대본소는 2%미만의 어린이층을 상대하게 되었다. 이 틈새 시장을 겨냥한 언론 매체들은 아동 만화 잡지[24] 창간 붐을 이루었다. 잡지 매체가 갖는 파급 효과의 지대함과 대본소보다 높은 원고료, 종간 후 단행본 재출판에 의한 수입이 가능한 전문잡지 쪽으로 작가진의 관심이 이동하게 된다. 독자의 관심사가 보다 빠르게 반영되는 잡지 매체의 특성은 대중을 만화와 커뮤니케이션 할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되어졌고 작자와 독자를 동일 선상에까지 위치케 했다. 하지만 잡지의 수가 많아지고 양성 자본이라 믿었던 언론사 쪽의 판매 부수 경쟁이 작품을 흐리게 하고 재미를 불거지게 하는 쪽이 됐다. 아동으로 한정된 독자층을 확장시키려는 노력은 만화 전문지들 사이에서도 구체화 되 갔다.  

 

 

성인 만화[25] 잡지의 성공적인 등장도 여파가 되어졌다. 편집진의 고뇌는 만화를 유희 제공의 일편으로 몰아 세웠다. 잡지 만화에 빼앗긴 수용자의 복귀를 위해 대본소가 자행한 일본 성인 만화의 불법 출판[26]은 또 한번 그들의 부도덕함을 공개하게 했다. 80년대 한국 만화는 시장의 이중구조로 인해 저급성의 여론 시험에 다시 한번 부적합 판결을 언도(89년) 받은 것이다. 만화계는 자체 진화에 노력했다. 민중운동과 비평문화의 확산, 그리고 대학 동호 문화의 확립 등으로 만화는 복권되어졌다. 대신 군부에 의한 경제 통치가 유효한 까닭인지 대중의 소비는 확장일로에 서 있었고 더 이상 대여 문화에 대한 필요는 호소되지 않게 되었다.  

 

대본소는 이현세 유파라는 큰 획을 남기게 하고 사장 문화가 되어 버렸다. 그 자리엔 만화 전문잡지와 서점용 단행본이 자리하게 됐다. 1,2세대에 비해 어린이에 대한 이해가 덜한 3세대 극화 작가 진은 그리 폭 넓은 지지를 형성하지 못했다. 반면 성인 만화 전문지의 여파는 거대했다. 음란성 일본 만화의 대량 배포와 독자 끌기의 고육책으로 펼쳐진 대본소측의 24시간 영업, 비디오 상영 등이 언론의 철퇴를 맞고 아동 만화에 대한 심의에 시달려 온 작자 층이 성인 잡지 만화 쪽으로 필력을 기울이기 시작하자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어린이 만화 잡지의 폐간이 줄을 이었다. 하지만 그 폐간의 속사정에는 일본 만화의 활보가 있었으니 문고판으로 출간되어 서점 또는 문방구 판매용으로 배포되었던 코믹스 류의 불법 출판물이 그것이다.  

 

권법 소년[27] 류의 일본 만화를 가져다가 그대로 모사하게 하여 한국 작가의 이름으로 출판한 이 책들은 저가에 짜임새 있는 내용과 구성 그리고 텔레비전 방영으로 익숙한 일본 만화의 보존판이라는 매력에 기인한 히트 상품이었다. 이 점을 확인시키는 가장 큰 맥락은 80년대 말 다시 어린이 만화 잡지 창간 붐이 이뤘고 이들 잡지가 하나같이 왜색[28]의 그림으로 연습되어진 신인 작가 군과 정식 판권 계약을 맺은 일본 만화로 편집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어린이에 관한 관심 부족 현상은 제대로 된 캐릭터 하나도 만들어 내지 못하는 지경이었고 일본 만화의 상대적 성과에 짓눌려 베끼기 만화만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 만화가 아니 괴칭거가 한국에 와서 평론가 손상익과 벌인 대화는 이를 확인케 한다. "한국어와 일본어를 구분하지 못하는 본인으로서는 그림체나 구도, 기법 등만 보고서는 한국 만화와 일본 만화의 차이점을 전혀 구분할 수 없었다. 완전히 같은 형식의 만화라고 생각한다." 60년대 철완 아톰 - 70년대 캔디 - 80년대 드래곤볼- 90년대 슬램덩크로 이어지는 일본 만화 부흥의 역사가 곧 우리 만화의 역사이기도 한 것이다. 이웃한 동남아의 여러 국가들은 그 심각성이 더해 자국의 만화를 아예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들 나라의 특징은 70년대 이후 무분별하게 수용한 일본 잡지 만화로 인해 자국 만화의 경쟁력을 키울 만한 여건을 마련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정황으로 만화의 본고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프랑스에서조차 일본 만화영화가 놀라운 시청률을 기록하며-『드래곤볼』의 시청률은 80%였다고 한다!- 방영되고 있다는 것이다.  

 

다행스런 것은 60년대 소구층이 어떤 이유에서건 우리 작가의 것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아직도 한국적 만화에 대한 패러다임은 저급성과 영세성을 무마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는 일본 만화에 대한 영향은 젖혀 두고라도 어린이 잡지의 일본화 현상은 참고 볼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나마 70년생 독자는 한국화된 일본 만화를 보고자란 세대이지만 80년생 독자는 일본의 일본 만화를 보고자란 세대이다. 그들은 텔레비전을 통한 또는 복사판 일본 만화에 대한 믿음을 저변에 깔고 있는 세대이다. 6.25, 4.19, 유신 그리고 광주를 겪지 않은 탈 정치화의 첫 세대 격이며 경제적 잉여 세대인 이들은 기존 가치를 부정하고 융합된 문화를 도출해 내는 집단으로서 인내성이 부족하고 오너 섹스를 주장하며 꿈보다는 실천을 표방한다. 이념보다는 관념에 승복하며 그보다는 무방비 상태에서의 충격을 흡수하려 드는 다채로운 사고의 추종자들이다. 이 새로운 수용자들에 의해 만화 문화 또는 산업은 재편되어졌고 90년대를 전혀 새로이 준비하게 하는 요인이 되어졌다.  

 

 

 

 

 

이들 세대가 감성을 중요시함은 『베르사이유의 장미』, 『북해의 별』로 대표되어 극화의 변종 또는 소녀 만화로 한정되어지던 순정만화[29]를 장르 문화로서 성숙한 위치에 입성케 했다는 점이다. 만화는 그 위치 찾기가 계속되어지고 있고 자체의 위상이 상당한 수준까지 부상되어졌다. 하지만 그것이 작자가 된 5~60년생 독자와 80년생 독자의 몫이 되어져 있을 때 그 위상의 대부분이 일본 만화에 의한 위치 확보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만화가 궁극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유쾌한 카타르시스의 제공과 희망이고, 활자 매체에 대한 인식욕보다 화상 매체에 대한 인식욕이 높아지고 있는 정황에다 아이들에게 호소 할 수 있는 문화임이 공언 되다시피 한 상황이라면 우리 어린이에게는 우리 만화를 공급 할 수 있어야 한다.

 

 

양대 체제의 붕괴와 90년대 신체제의 대두

  


 

기존 인쇄 매체 만화의 체제는 배본소[30]에 의해 주도되어져 왔다. 대본소 만화만을 또는 잡지 만화만을 주력으로 공급하는 배본소에 의해 만화판이 좌지우지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90년대 이 양대 체제에 서점 판매용 출판 만화가 등장했고, 그 상당수가 지하 출판업자에 의해 암거래된 일본 복제 만화가 나타났다. 하지만 실정에 대한 변화의 폭이 그리 많지 않은 것이 아직의 배본 문화이다 보면, 양대 체제의 붕괴라는 점은 그리 큰 호소력을 지니지 못한다. 분명한 건 붕괴의 중앙에 한국 만화가 자리하고 있음이다. 앞서 토로한 대본소 문화의 붕괴는 작가 주의의 상실과 독자의 선별 능력 향상에 의한 것이라고 했고, 잡지 만화의 붕괴와 그에 이은 성장은 분별없는 출판인과 독자의 공조에 의한 것이라고 했다. 대본소의 주 고객층을 60년생이라 한정하고 일본 만화의 주 수용자층을 80년생이라 정할 때 그 사이에 위치한 70년생의 의지는 어쩌지 못하고 가운데 끼어 무분별하게 양자를 수용하다가 양분 내지는 공중 분해되는 형상을 보이게 될 한국 만화의 모양과 같다.  

 


 

 

한국의 대표 작가 이현세는 80년생 독자를 끌어들이지 못한다. 반면 일본의 테즈카 오사무는 OVA비디오[31] 시장에 의해 한국의 80년생 독자를 갖게 되었다. 60년대 아톰으로 대표되는 그의 작품들은 디즈니[32]가 소구하는 전 가족에 대한 시장성과 동일하게 될 것이다. 만화 산업자들은 이점을 놓치지 않을 것이며 80년생 독자를 위한 배려를 포기하지도 않을 것이다. 더구나 이 잉여 세대의 주머니 사정 또한 만만치 않다는 것을 확인한 이들은 그들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에 대한 논의의 대상은 신체제로서의 만화 문화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복사문화[33] 또는 표절 문화이다. 이미 활성화되어져 있는 만화 문화의 큰 줄기는 대본소의 모양을 이어받은 책 대여점과 어린이 잡지 만화가 변화한 성인 만화 잡지의 형태, 그리고 복제 된 서점 판매용 일본 만화이다. 이들 체제자들은 잡지의 경우 일본화된 우리 만화와 일본 만화를 발표하고 책 대여점의 경우 서점 판매와 동시에 복제된 단행본 일본 만화를 소개한다. 이에 의해 대본소 스타들은 그 여파가 커진 잡지로 흡수되어졌고 아직 대본 문화를 이루고 있는 이들 중 얼마는 서점용으로 변종 된 대본소 만화를 발표하고 있다. 이들의 영향력은 둘러싸인 일본 만화 불법 또는 적법 출판물들에 의해 낮아지고 있다. 만화 시장은 이내 일본화 된 잡지 만화 형태로 재편되어질 것이다. 배본 체제는 그 영향력이 삭감되고 재벌 잡지사에 귀속되어질 것이다. 일본 만화 출판물의 개방이 초읽기에 들어선 지금 그들의 어마어마한 양질의 비축 작품과 계속 속간되는 작품들은 우리 단행본 만화의 시장성을 읽게 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한국 만화는 아직 호흡이 긴 5~60년생 독자에 의해 읽혀질 전망이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그들 세대의 시대론은 작가진의 변수를 원하지 않을 것이고 이내 신문 만화로 흡수되어진 후 사장되어질 것이다. 물론 그들의 사장은 우리 만화의 공식적 붕괴와도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거기엔 영속하는 하나의 흐름만이 남을 것이다. 일본화 된 한국 만화도 이내 자취를 감출 것이다. 90년생으로 이어지는 일본 만화의 수용자들을 지키기 위한 대동아 공영의 노력은 지속적이고 치밀하게 계산되어져 전파를 타고 전개되어진다.  

 

 

 

 

그들은 컷과 컷 사이가 주는 사고의 전환까지를 막아서려고 한다. 혹 민족적 타성에 대한 위배 심리가 작용할 것을 걱정하는 듯하다. 거기에 90년생을 대표 짖는 애니메이션이 있다. 이미 그에 대한 거대 담론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거기에도 역시 한국의 애니메이션은 없다. 남의 나라 작품을 생산해 내며 받는 수출의 상[34] 따위가 애니메이션에 대한 근거 있는 기대를 품게 만들었다.한국 만화계는 일본 만화의 인쇄 매체 만화에 대한 골 깊은 선로를 남겨둔 채 애니메이션에 대한 과잉 기대를 생산해 낸 만화산업가들에 의해 붕괴되어질 것이다. 한국 만화 산업가들이 애니메이션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을 확인한 일본 만화는 덩달아 호기[35]를 맞이하고 있다. 일본의 최대 만화 출판사인 강담사나 집영사의 경우 미국의 만화로부터 자국의 만화를 보호하기 위해 작자나 독자에게 얼마나 많은 수련의 기회를 제공했는지 짚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원화가 없다면 다국적 원화 역시 생산 해 낼 수 없다. 우리의 대중은 스스로가 한국 만화로부터의 이탈을 염원 한 것이 아니었다. 한국 만화 산업가들의 장삿속 짙은 기원으로 인해 대중은 우리 만화로부터 이탈 당하게 된 것이다. 그들의 이탈을 걱정한 장사꾼들이 일본의 만화로 위로 받게 한 꼴이다.    

 

일본인은 만화를 좋아하는 뇌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연구 논문을 자신 있게 발표 할 수 있는 이들. 주간 만화지 판매량이 일회 620만 부를 넘어서는 신화를 창조해 냈으며 전 세계 안방극장의 70%를 점유하고 있는 이들과의 대결 구도는 너무도 회의 적이다. 일본화 된 한국 만화는 70년생 독자층이 작자로 전환되는 시점에서 그 특수를 누림과 동시에 의존 명사만으로 생산되어지게 되는 붕괴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다. 거기엔 문화의 게릴라적 수용자들인 학생층의 영향력도 지대 할 것이다. 현 만화 관련 학과의 교육 시스템은 양성 작가의 배출보다는 체계화 된 만화산업인의 사회 배출에 보다 적당하다. 결국 이 만화 산업인들은 그들 세대의 아이콘인 오타꾸[36] 문화의 분출을 자행할 것이 분명하다.  

 

한국 인쇄 매체 시장의 양대 체제는 물 건너 일본만화의 역류에 기민한 반응을 보이며 아직 활성인자를 분출하고 있지만 이내 개방되어질 일본 만화 시장과 성급하게 열을 올려 버린 애니메이션 또는 관련 산업으로의 도피에 일궈 논 30%의 텃밭-인쇄 매체 시장의 한국 만화 점유율-마저 고스란히 물려줘야 할 것이다. 극복을 위한 대명제들이 만화 비평가들에 의해 나열되고 있지만 이 또한 이론의 여지가 많은 것들이다. 소는 이미 잃었다. 외양간을 고치려 드는가? 아니면 더 넒은 공간까지를 한정해 외양간이라 칭하고 마음을 놓겠는가? 우리 만화는 포기하고 승복함으로서 다시 시작하는 풍토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작금의 상황하에서 만화를 한다는 것은 일본 만화의 한국 주재원으로서의 역할밖에 해 낼 것이 없다. 

 

30%의 인쇄 매체 시장 점유율을 유지키 위해 개방을 막아서는 노력은 그것이 정녕 한국 만화의 모습으로 있는지를 확인한 뒤내려야 할 결론 일 것이다.- 사회구조를 통계하는 작업이 얼마나 비논리적인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이제 그들 만화의 희소 가치만을 높이는 행사는 그만 두어야 한다. 오히려 좀 더 급진적이고 정책적인 개방으로 우수한 해외 만화의 도입과 만화 교육 여건의 개선을 이끌어 내야 한다.  

 

 

일본 만화로 점철되있는 한국 만화를 캐나다, 유럽, 중국, 미국의 코믹스 등 우리가 모르는 모든 만화를 끌어들여 희석시키고 그 자리에서 전혀 새로이 한국의 것으로 태어나게 해야 한다. 개방은 이미 점화를 시작했고 일본 것으로 이루어진 만화가 우리 만화판의 신체제가 되어질 것은 당연지사다. 여기에 맞서 싸우다 도태 당하는 것은 오히려 위험하다. 차라리 자멸을 계획하고 신체제 이후를 약정해야 할 것이다. (끝)  

 


 

 

  


미주

 

[1] 만화의 일본식 발음. 이 글에선 일본화된 우리 만화를 지칭.

[2] 이현세 만화의 주인공으로 허무와 염세로 뒤범벅이 된 눈빛을 찬란하게 바꿔 낼 수 있는 전능함의 소유자. 강인함이라는 삶의 목적성을 강요당하고 있는 캐릭터이다.

[3] 까치의 상대역으로 자생력이 없는 인물. 허영만의 경우를 제외한 거이 모든 대본소 만화가 이 여자 주인공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 낭만적 인물과 현세적 인물 사이에서 방황하다 둘의 대결 구도 결과에 의해 전리품으로 수용되어지는 여성상.

[4] 허영만 만화의 캐릭터로서 민족주의 성향을 드새게 드리우고 있는 듯 배치되는 인물. 무당거미 연작을 통해서는 유일한 허영만의 영웅 신화가 펼쳐 지기도하지만 대립 자에 의한 영웅보다는 대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자기로의 침잠을 통해 영웅이 되어진다.

[5] 고행석 만화의 캐릭터로서 반쯤 잠긴 눈으로 세상을 낯설게 응시하는 인물. 가히 초인이라 거론되어져도 괜찮을 듯 하다.

[6] 박봉성 만화의 캐릭터로서 까치와 비슷한 성격을 지닌다. 작가에 의해 계획되어진 절대 불가해한 돌파구를 헤쳐 나아가느라 무진 애를 쓰는 영웅.

[7] 김이랑, [만화의 문화 기호론], (서울, 눈빛, 96)1955년 다쓰미 요시히로에 의해 명명된 스토리 만화의 새로운 전형. 만화적 표현 기법의 인식론적 제약에서 자유스러움을 획득함으로서 사실성에 근접. 만화의 소구 연령층을 확장시키기 위한 전략적 수단.

[8] 50년대 전시를 배경으로 제작비를 줄이기 위해 아연판에 직접 그려 찍은 싸구려 만화. 대개 16쪽으로 편집되었다.

[9] 시시도 사코의 [스피드 타로], 데즈카 오사무 [신 보물섬]에서 시도 된 만화의 드라마투르기. 클로즈업이나 부감 구도, 장면 전환이나 프레임의 이동, 조작에 의한 컷의 변형. 몽타주 기법의 사용 등으로서 만화의 이차원적 공간에 좀더 확연한 깊이와 연출의 의미를 일깨움.

[10] 부산 남성 여고 교사 김상옥의 권유로 서봉재가 [밀림의 왕자]라는 제목으로 표절 출판. 당시 단행본 만화로서는 혁신적인 국판 100여 페이지로 편집 출판.

[11] 당대 대본소는 텔레비전 만화를 시청할 수 있는 방영권을 주는가 하면 식음류 등을 판매하고 소설, 만화, 무협지, 잡지 등을 대여 또는 유상 열람 할 수 있는 장소였다.

[12] 이미 일반에게까지 널리 공개 된 사실로 만화는 작가 개인의 작품이 아니라 그를 기준으로 조성된 프로덕션 또는 화실 공동의 것이다. 단 만화의 초창기나 지금이나 작가 주의를 지니고 혼자서 작품을 하거나 극소수의 작업에 진정한 문하생을 참여시키는 작가도 있다.

[13] 1854년 경주 출생. 79년 [시모노세키의 까치머리]로 데뷔.82년 [공포의 외인구단]이 담고 있는 정서가 시대 담론에 어필, 아직까지 공포스런 지명도를 떨치고 있는 작가. 그와 그 주변 상업인들의 공조로 인해 한국 만화가 갈피를 찾지 못했다고 할 정도로 상업적 제스처가 큰 사람이다. 다행인 건 [남벌]이후 그의 침체가 확연해졌다는 것이고, 불행인 건 그만한 작가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14] 1947년 여수 출생. 74년 [집을 찾아서]로 데뷔. 한국 만화가 중 유일무이하다 쉽게 상업성과 작품성 거기에 작가주의적 견지까지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보수 세력의 회유(?)에 이끌리지 않았나 하는 의심에 대한 항변은 어떤 선로를 통해서라도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알다시피 [오! 한강]이 안기부의 권유로 빛을 발한 작품인 것과 민중운동 진영의 민중 만화 출판에 대응하기 위한 보수 진영의 전략이었던 [퇴색의 공간] 출판 등.   

[15] 대중문화 비평가 정준영-[만화 보기와 만화 읽기]-등을 통해 필요 이상 고색 찬연한 평가를 받은 부산 출신의 이 작가는 초창기의 몇몇 작품과 출세작인 [신의 아들]을 제외하면 어느 것-그것 역시 의심이 가지만-이 박봉성 본연의 것인지조차 알 수 없게 하는 '박봉성 프로덕션'(?)의 대표이다. 그에 대한 평가라면 오명천 문하에서 익혔을 강하고 능란한 화풍 정도이다.

[16] 만화계 입문 9년만에 구영탄을 모델로 데뷔작 발표. 그후 불청객 시리즈로 만화판을 뒤집어 놓았다. 한 템포 느리지만 거대한 웃음의 항해를 하게 하는 것이 그의 작품이 지니는 미덕이다. 허술한 터치와 데생력, 그리고 그의 만화 주인공들이 지니는 지극히 평범함-구영탄과 상대역을 제외한-이 80년대를 뒤흔들었으나 90년대에 들어서며 소구되지 못하고 있다.

[17] 64.8월 미국 애니메이션 [개구장이 데니스]가 최초 수입 방영된 뒤 한국의 안방 만화 시장은 90% 이상을 값싼 수입 만화에 의존하고 있다. 아톰-캔디-코난으로 이어지는 일본 만화가 압도적이었다. 더구나 80년 초 컬러 텔레비전의 보급률이 유례없는 성장을 보이며 안방에 들어섰고 싸고 달았던 일본의 만화는 만화방으로 가는 걸음을 막아서기에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18] 72년 나가이 츠요시 원작의 TV시리즈물. 주인공 철이라는 다분히 한국적인 이름을 지니게 되는 로봇의 조종사는 그 시절 누구에게나 친밀감을 지니게 하는 인물이었다. 차후 일본만화의 친밀감처럼.

[19] 79년 토미노 요시유키의 변형 로봇의 원조 격인 [용자라이덴] 이후 일본 열도를 들끓게 한 대작 TV 시리즈물로서 차후 사회학적으로 신 인류라 구분되는 세대들을 뉴타입-극중 등장하는 새로운 타입의 인류. 동명의 애니 전문지가 전 세계적으로 팔리고 있다.-이라 칭하게도 하는 등 로봇 메카닉의 전혀 다른 전형을 내세우며 SF를 사이버 펑크로 연계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20] 디즈니의 영원한 테제인 교육성은 당대 최고의 상품력을 지니고 있었다. 디즈니의 상표권이 없는 학용품을 찾기 힘들었으니까.

[21] 한창완, [만화 산업연구], (서울, 글논그림밭, 95) 93.11.25 한국 간행물 위원회에 의한 통계자료. 90년 자료도 유사하게 산출 됐다.

[22] 오사무의 열정에 의해 무시 프로덕션에서 소자본으로 만들어진 이 애니메이션은 화면 내에서 움직여야 할 모든 것이 움직이는 풀 애니메이션-1초에 24콤마-에 비해서 엄청나게 적은 3콤마 애니메이션이다. 1초용으로 8장의 셀을 만들어서 3콤마씩 같은 셀을 촬영해 합계 24콤마를 맞추었다. 오사무마저 자신의 이런 작업이 애니메이션에 악영향을 미쳤다고 말한다.

[23] 그들을 상징 짖는 싸늘한 눈매와 청자켓 그리고 표정을 읽히게 하기 위해 비쩍 마른 몸집보다 크게 그려진 얼굴. 지나치게 과도한 운명 앞에 좌절하고 강대한 대립 자와의 투쟁을 준비하며 이루지 못 할 사랑에 목말라 하는 더벅머리. 언제고 소외당할 준비가 되어있는 냥 고개 숙인 등을 보이는 그들. 아이들 중 누구도 그런 류의 각진 영웅을 소화하길 꺼렸다. 90년대로 들어서며 그들의 캐릭터가 유한 선을 지니게 되었고 큐트형 눈빛을 발하기도 했지만 아이들은 그 자리에 남아 있지 않았다.

[24] 당시 집권가의 부인이 이끌었던 육영 재단에 의해 유쾌한 보물로 그득한 섬을 1500원에 집으로 가져 갈 수가 있었다. 전 페이지 만화 개재라는 놀랠 만한 편집 방향을 취한 '보물섬'은 당대 최고의 작가 진을 포진 게하며 승승장구를 달렸다. 이에 뒤질세라 아동 잡지 의 선두에 있었던 { 소년중앙}, { 어깨동무}, { 새소년} 등이 별책 만화 부록으로 판매 경쟁을 일게 했고 기존의 월간지 체제를 깨는 격주간지 '소년경향'등이 등장하기도 했다.

[25] 그 처음으로 기록되는 { 만화광장} 은 지면의 다양성과 다채로운 실험 등을 통해 성인 여가 문화로 만화가 군림할 수 있는 초석을 마련했다. 뒤이은 { 주간만화} 와 { 매주만화} 의 성공. 그리고 그들 출간사에 의한 서점용 단행본 출간이 만화 문화의 변화를 일궈 내는 조짐이 되기도 했다.

[26] 88년 출판 자율화 조치에 편승한 일본의 포르노성 성인 만화가 불법 복제되어 배포되었다. 당국의 단속으로 4명이 구속되고 60여만 권의 복제물이 압수됐다.

[27] 지금도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A5사이즈의 문고본인 이 책들은 일본 만화의 표절 작품들로서 권법 소년 시리즈, 쿵후소년 시리즈 등으로 출판되어졌으며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판매되어 온 것으로 상당한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다. 서술자의 뇌리에 아직도 생생한 한 주먹이라는 캐릭터의 커버린 모습을 일본 잡지 만화를 통해 처음 확인했을 때 그 충격은 남다른 것이었다.

[28] 한국 만화와 왜색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 아니 이미 그 구분선을 찾지 못할 만큼 일정한 방향으로 두 나라의 만화 문화는 성장하고 있다. 후자가 한국임은 여실하지만 만화 정보의 습득이 용이해진 이즈음으로 말하자면 어느 것이 먼저고, 나중이고를 따져 내지 못할 정도이다. 거기에 이미 일본화 된 만화로 단련 된 독자들은 도저히 그 흑백을 가리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드는 분류 방법은 등장 인물의 상황에 따른 행동 묘사라든가 극의 속개, 종결 방식 등과 민족적 관념의 차이에 어긋나는 상황의 도출 등을 든다.

[29]엄희자, 조형기 부부로 대표되던 이 변종의 만화가 그 영향력을 떨친 것은 김혜린, 황미나, 강경옥, 김진으로 이어지면서부터이다. 이 국적 불명의 만화들은 도저히 부적합한 인칭 구조와 알아내기도 힘든 난해한 컷의 활용, 그로테스크한 톤의 사용 등으로 대표되는데, 그 성공의 요인에는 당대가 원한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내용 전개에도 있었지만 복합 문화 또는 융합 문화라는 것이 새로운 수용자에 의해 읽혀졌기 때문이다. 거기에 수려하진 않았지만 SF의 도입은 그들을 미쳐 들게 했다. 90년대 대본소의 극화류가 심령과학물 위주의 내용 전개를 보인 것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기존의 동호 활동에 활력을 가한 것도 순정 만화 동호지가 발표되면서부터이다. 실제로 아동 만화나 성인 만화보다 논평의 중앙에 올라서 있던 것은 순정 만화였었다.

[30]초기 합동 총판이라는 배본소가 만화판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 할 수 있었을 정도로 대본 체제에서 배본소의 영향력은 지대했다. 한국일보의 만화 산업 진출로 그 독점 체제가 무너지기도 했지만 패키지-인기 작가의 작품에 비인기 작가의 작품을 끼어 파는- 배본과 배본 중단의 알력, 현금 구입이라는 관행이 지켜지고 있다. 지금은 합동, 세대, 연합의 3개사가 운영되고 있다.

[31] Original Video Animation의 약자로서 경제적 여건이 좋지 않은 애니메이션 사들에 의해 기존 작품의 변형이나 리메이크, 극장용으로 다룰 수 없는 부분들을 비디오 전용으로 제작 공급하는 형태. [32]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은 흑백 시대를 살아온 부모 세대에서부터 친근하고 유익한 고급 오락물로 자리하고 있다. 그것이 그들에게 아이들의 손을 잡고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앞으로 이끄는 이유이다. 부모 세대의 재미에 대한 믿음이 깔린 것이다. 디즈니의 마케팅 전략이 궁극적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부모에게 맞춰진 것도 그러한 연유이다.

[33] 우리 나라는 1987년 10월1일자로 국제 저작권 협약에 가입했다. 1987년 이전 발표 된 외국 작품은 불법 복제하더라도 국제법상 위법이 아니다.

[34] 에이콤 프로덕션(대표 넬슨 신)93년 애니메이션 하청 제작으로 일천만불 수출 탑을 받았다.

[35] <블루시걸>로 들어 난 한국 애니메이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전략으로 절반 이상의 작업을 일본에 위임하고 있다.

[36] '-댁'이라는 말로 상대방 또는 집을 가리키는 말인데 근자에 들어서는 한 분야에 광적인 집착을 보이는 이들을 지칭한다. 마니아의 다른 말인 이 단어는 이미 '망가','아니메'등과 같이 인터넷을 통해 세계 공용어가 되어 가고 있다.

 

스포츠서울, 신춘문예 만화평론 부문 당선작, 1997년 

박석환, 만화시비탕탕탕, 초록배매직스, 1999 수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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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환(만화평론가, 한국영상대 만화콘텐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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