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환, 오세영의 고샅을 지키는 아이, 코코리뉴스레터, 1997.03.25

종로키드 문학소년을 만나다

 

  

 오세영, <부자의 그림일기> '고샅을 지키는 아이'


만화 전문 출판사를 자처하며 출발한 글논 그림밭은 만화의 고급화를 지향, 새로운 소비층을 형성해냈다. 그들이 만들어낸 만화책은 만화 판의 저급한 단층을 아우르며 영역 분할에 임하고 있다. 한국만화산업연구를 출판하면서 한창완을 만화계 최고의 이론가/만화행사 기획자로 만들었고, 낯선 만화가 이희재와 오세영의 작품을 출간했다. 이러한 그들의 움직임은 대본소 체제의 붕괴에 빠르게 대응, 설득력 있는 대안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 중 새로운 만화의 기틀이나 교과서로 표현되고있는 오세영의 단편집 부자의 그림일기고샅을 지키는 아이를 필자의 오만과 편견이 심한 독법(讀法)으로 다시 읽어본다.

기실 필자는 주간만화를 통해 처음 대면한 오세영이라는 작가를 너무도 사랑해 버렸다. 그의 서정성 짙은 그림과 어휘들을 보며 여가를 위해 빼어 든 잡지를 몇 번인가 가슴팍에 공 그려보곤 했다. 그리곤 내 정서를 억누르고 군림하며, 감정의 이완(弛緩)에 행사하던 대본소의 몹쓸 영웅(?)들을 떠나가게 했다. 20여 페이지 남짓한 그의 만화는 하루를 읽어도 다 읽지 않은 곳이 있었으며, 이내 다시 펼쳐 보아도 낯선 장면이 있었다. 그의 그림 전체를 기억 할 수 없었으며, 캐릭터를 익힐 수 도 없었다. 까닭은 그의 작품을 그리워하면서도 찾아 나서는 일은 없게 했다. 내내 간직하고 있었지만 언제고 이름 외를 가질 순 없었던 탓이다. 필자는 그가 보이지 않는 주간만화도 샀고, 그가 보이는 주간만화도 샀다. 언제고 그의 그림을 좋아 할 수는 있었지만 만화를 보고 있음을 재인식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재인식의 과정을 거쳐야 가능한 오세영식 만화에 대한 시기와 이후의 달콤함에 대한 패배감의 항변을 위해 그의 작품집을 필론의 근거로 삼으려 한다. 거기에 덧붙여 그의 문학취(文學取)가 만화를 중점으로 인용되고 있는지, 문학 자체에 응용-삽화의 기능으로서-되고 있는지에 대한 의심을 적어 내려 한다. 이것이 가능하다면 그의 게으른 작업력에 대한 투정으로 읽혀져도 좋으리라고 본다.

  

199012주간만화에 처음 발표 된 고샅을 지키는 아이에서 오세영은 13단의 와이드 컷만으로 16페이지 전체를 구성한다. 독자는 그림만으로는 지극히 전통적인 필체를 고수하고 있는, 오세영이라는 낯선 작가가 제시하는 컷 구성의 새로움에 이끌린다. 웅장하지만 소담스러운 담묵의 필치는 시네마스코프의 그것-넓음, 오랜, 과거, 어릴 적, 귀소, 지금 등-을 떠올리게 하면서 능숙하게 작가의 의도 안으로 독자를 끌어들인다.

점층화법으로 전개되는 첫 장에서 아이가 바라보는 곳은 한적한 농촌이고, 다음 장으로 가야하는 독자의 의식은 그것에 대한 몇 가지 문자 기호들을 지니게 한다. 반농이민(半農移民) 현상이 급격히 확산되고 있는 어느 농촌의 동구에서, 친구 하나 없이 허전함에 애 녹는 아이의 모습을 체현(體現)하게 하기 위한 작자의 의도가 지면을 통해 구체화된다.

글논 그림 밭의 편집진인 주완수는 위 서적의 머리말에 붙여 나이 마흔을 넘긴 그의 첫 단편집 예술은 속도나 분량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일반 독자에게 마치 만화의 본질인 것처럼 여겨지는 대본소 만화는 이미 예술이 아니다. 예술은 하우저의 말처럼 대중의 몰이해와 속물 취향, 아카데미즘의 오만한 권위 등의 촘촘한 그물망을 뚫고 나아가 진보를 이룩하는 물고기이다. 늦은 만큼, 단 한 권의 분량인 만큼, 그 몇 배 이상으로 우리 만화계의 경사이다. 그 촘촘한 그물망을 뚫은 진보의 물고기인 것이다. 예술로서의 만화 살아있는 고전이자 교과서이며, 상징 체계이자 대안인 것이다.’ 라고 적고 있다.


만화계 내외부에서 오세영은 한국 만화의 저급함을 완화시킬 수 있는, 또는 타파 할 수 있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치밀한 데생력과 배경 묘사, 새로운 작법에 의한 전달 형식의 구축, 주관적 견해가 배제 된 객관적 서술로서의 리얼리즘 형식 등. ‘만화를 예술로 입성케 한 공로가 찬양되고 있다. 필자는 의심한다. 만화가 예술이 되어진 것에 대한 맥락만으로 그를 추앙하여서 되겠는지. 여타의 작가들이 숱한 고뇌의 흔적으로 필력을 남발(?)하지 않고 있을 때, 기존 삽화체의-그는 꽤 오랜 기간 삽화가로서의 작업을 해 왔다.-상투적 표현으로 입문한 이 사람에게 왕도를 지니게 해야 하는지. 말 칸보다는 그림에 대한 설명으로 서사 구조를 이끌어 가는 것이 실험과 컬트또는, ‘리얼리즘이라는 단어와 교합할 수 있는지 등이다.

그는 72년 오명천 문하로 입문했다. 당대를 풍미한 터치력을 지녔던 이 작가는 도제식 수업을 바탕으로 만화 공장을 이끌고 있었는데, 그의 문하를 거친 현작가들이 괄목할 만한 터치력과 데생력을 보유하고 있음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오세영은 ‘80년 광주 이후 작가적 견지를 확립 삶의 본질을 묻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고, 만화의 발전이란 한마디로 만화의 예술성 인증이라고 말한다. 이는 기존 만화에 대한 재해석과 탐구욕임이 확실하다. 하지만 그의 작품들 중 상당수는 문학에 연원(淵源)을 두고 있다.

북한 작가 단편소설을 만화로 옮기는 작업 등을 선 보여온 그는 글을 중심으로, 그림을 보조재로 사용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들게 하는 작가이다. 그의 그림이 문학취에 의해 서술 된 관념 성향의 글들을 이겨내지 못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화면 위에 묻어나는 문자 언어의 과도한 배치에 대한 의문이다. 그의 작 중 대다수는 글에 충실한 그림-문자화된 인식 틀의 시녀로서-은 묘사되고 있지만, 만화적 구성력과 보편적 관여 자체는 묵살되고 있다. 이는 삽화의 특성이 지니는 그것과 매우 흡사하여 삽화가 많은 이야기책으로 보여지게도 한다. 이에 리얼리즘-지극히 객관적 사실성-이라는 표현은 자연스럽게 덧붙여 질 수 있는 것이다.

만화는 하나의 형태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화하는 것이 아니라 변형시키는 것으로서 그렇게 함으로 그것은 전달하는 것이다.’ 만화는 개별 작가의 의지와 작가의 견해가 상충하고 보완되어지면서 구성되는 색다른 의사 세계이다. 작가 오세영의 화법에 대한 적법성을 논외로 하고 그것이 지니는 만화의 사회적 인식 확장성에 대해 의심해보자. 전문에 필자의 괘씸한 의도가 피력(披瀝) 되었을 터이지만, 오세영이 이뤄낸 것은 그의 개인적 작업 영역 확보와 기존 만화 시장의 분할(상업성: 작품성이라는 촌스러운 이분법)에 그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서 그가 지닌 만화적 어휘 표출이 주는 영향력에 있어서도 문제를 제기한다. 물론, 그의 작품에는 마니아라고 치부 될 만한 이들과 문화 리더를 자처하는 식자층을 끄집어들이기에 충분한 요소들이 자리하고 있다. 이는 문자 매체의 정숙함이 주는 대체제로서의 용도에 다름 아니고, 기존 만화 걸작으로서의 파급효과 따위와는 무관하다. - 이런 것이!! 정도의 가치 확보일 뿐이다. 그에 이것이 정도(正道)인 냥 확신하고, 그릇된 방향으로 대중을 선호하는 언론-문자 매체 진영-의 끈적한 정에 대한 반발심을 들어내고 싶다. 세종 대학교 만화 학과 강사 한창완은 오세영의 일관성은 기법적 측면에서 영화적인 화면 전개로 나타난다. 그의 화면은 대단히 논리적이고 문법적이다. 이런 특징은 주로 문학적인 복선에서 연유한다.’라고 적는다. 이 극찬의 이면을 보면 오세영의 작품은 문화사적 전반에 걸친 비쥬얼 커뮤니케이션(visual communication)들을 적당히 융해해내고 이를 문학적 정서로 담금질 해낸 것에 다름 아니다. 그의 극 전개는 상당히 치밀한 계산에 의해 의도 되어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을 한창완은 복선이라 설명하고 있는데 필자는 독자와의 교류 즉, 공감 형성을 위한 치밀한 신호 전달이라고 본다. 만화에서 그 예를 들 수 있는 신호 전달법 즉, 기호나 부호는 행동성을 지니는 것으로 쓰인다.

 

만화는 기호 체계(sign system)의 한 유형 속에 포함 되어있는 도상적 기호(iconic sign)의 특수한 형태이다. 도상적 기호는 그것이 표현하는 실제 사물과 어느 정도 유사성을 갖는다. , 어느 정도의 도상성(iconicity)을 드러낸다 하지만 문자에서 이런 유의 특성은 배제된다. 굳이 들자면 의성어나 의태어가 이에 속할 것이다. 그의 작품 속에서도 만화의 기호가 사용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놀라운 이 작가의 그림에 가려 드러나지 않는 만화적 기호 사용법을 보고 있노라면 그 어눌함에 당혹감을 느낄 정도이다.

다행스레 동적 화상을 정지 화면에 옮겨 내는 그의 화술과 전개도를 펼쳐 보이는 듯한 이야기 작법으로 이를 보완하고 있다. 그가 사용한 방법은 문자의 인식이 지니게 한 상징물로서의 대체이다. 외향성의 기호를 내향성을 지니게 했다는 것이 실험일 수는 있을 것이다. 믹스 미디어가 포용되고 있는 이즈음에 그의 활로를 막아서기엔 어수룩한 논조일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연계 작들을 보면 화풍에 대한 실험이 배제 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화풍과 만화 형식은 극히 전통주의를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고도의 문학성과 회화성, 영상성을 다름 아닌 만화라는 매체에 쏟아 부어 넣고 있다는 평가는 유효하다. 그가 차용한 것은 영상성과 문자 언어이다. 오세영의 화면 연출법은 만화가 지니는 특성화 단계 중 하나인 3차원 세계의 창조로 얻어지는 디테일을 길러내진 못한 채, 영화에서의 평면 연출이나 근거리 촬영에 의한 화면 연출과 문학이 일궈내는 다분히 상투적인 회화성 어투에 침전(沈澱)되어있다.

고샅을 지키는 아이역시 그런 면이 부각되고 있는 작품이다. 마치 에스프리(esprit)를 보는 듯한 것이다. 그가 문학 쪽에 근접한 작품 성향을 지니고 있음은 그림 연출 시 내재케 하는 기호들에서 그 맥락을 찾을 수 있다. 만화를 기호로 읽으려는 노력들이 드세지고 있지만 기실 만화가 지닌 기호는 근접한 상황 묘사로서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지 아이콘화 된 상징성을 내포하고 독자의 인식에 의해 풀어헤쳐 지는 것은 아니라고 보여진다. 고샅을...에서 소꿉, 고무줄, 제비, 뽀송이, 개미...등은 관념화 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들로서 교육 된 정서에 기본적으로 내재되는 혼자 또는 같이 놀 수 있는 것, 떠나가는 것, 친구, 맞이하는 것, 열심히 등의 어휘를 품고, 주제와 관련 지어지는 각자의 이야기를 듬성듬성 전달한다.

 

다음은 오세영의 고샅을 지키는 아이를 필자의 독법대로 기술한 것이다.

달래줄 사람 없는 아이가 사립문에 기대어 운다. 고불 거리는 길의 사각으로 시선이 고정된 아이는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옛말 속의 제비가 떠도는 지도 모르고 울고만 있다. 등뒤에 그의 즐거움이 되어줄 소꼽들과 바지랑에 매달린 고무줄이 있는 데도 신작로만을 응시하며 흐느낀다.

좌측 지면 밖으로 흐르며 시선 밖으로 떠나버린 강남 갔던 제비가 우측 지면을 향해 날아들어와서 독자의 심중에 안정감을 건낸다. 하지만 목사리에 뒷덜미를 채어 가까이 올 수 없는 뽀송이라는 강아지만 아이를 찾아줄 뿐이다.

이제 중앙에 묘사된 뽀송이 만이 아이의 행동 변화를 부를 수 있을 거라 믿는 독자.

독자는 뽀얀 뒷그림을 지우며 산모롱이를 도는 버스처럼 아이의 고뇌에서 비켜서 주기를 원하는 작자를 만난다.

작자는 앞선 제비의 형상으로 뒤에선 독자로 화한 제비를 이끌며 좌측의 지면 밖으로 물러난다.

부지런함의 아이콘을 지닌 개미가 어스름으로 치닫는 그림자의 이동을 비켜서고 있지만 아이는 시간의 고약한 흐름을 아는지 그늘에 발목을 잡힌 채로 다시 흐느낀다. 발목을 잡혀버린 아이의 움직임은 동결된다.

아름답지만 평이한 장면 전개의 속뜻을 다 알지 못한 독자는 당혹스러움에 다음 페이지를 펼친다. 부시지 않은 해마저 사라지겠다고 말하고, 유일한 심중의 소리였던 아이의 울음마저 사라진다. 적막의 고요함에 힘겨운 독자에 대한 최초의 배려는 아이의 즐거움들이 내는 소리로 나타난다.

소꼽들이 다가앉는 소리, 고무줄이 잠자리 꼬랑지의 마디를 세는 소리, 빈 밥그릇에 턱을 고이는 뽀송이의 소리. 하지만 이도 잠시 뽀송이의 잠으로 바로 이어지는 3단 컷은 오른 쪽 끝의 흰 여백만을 좇게 한다. 검게 그을린 시골 아이의 얼굴 위에 한 줄 마른 눈물 자국이 허옇게 비워지는 것까지를 보인 작가는 이제 오른편으로 연결되어지는 바람을 오게 하고 제비 부부를 등장케 한다.

고샅에도 어둠을 채우고 많은 정물들과 시골집 세간들이 지금까지의 아이를 사라지게 한다. 아이의 허전함에 밀쳐진 신발짝들이 마주보고 소꼽과 고무줄 마저 어둠으로 채워지자, 왼편에 묘사된 뽀송이가 가운데로 들어서며 전 페이지에 해내지 못한 아이의 이동을 가능케 할 것을 암시한다. 하지만 아이는 3단 컷 전체에 긴 여음으로 들어서는 경운기 소리에 눈을 뜨며 다시 바빠져야 할 엄마를 맞이하고 무표정한 아빠를 측면에 들어서게 한다. 아이를 걱정하고 나서는 엄마는 모자를 벗으며 일에서 벗어난 아빠 이후에야 양동이에 물을 퍼부으며, 밖의 일을 마치고 안의 일에 임한다.

연신 꼬리를 치던 뽀송이는 내일부터 아이를 대신해 고샅을 지켜야 하는지도 모르고 빈 밥그릇이 채워지는 것에 즐거워 한다. 다 떠나고 자신들만 남은 토방에서 엄마에 의해 이름을 지니게 되는 나리는 어쩔 수 없는 아빠를 보고, 농사짓는 만큼의 노력으로 시골을 뜨자는 엄마 곁으로 다가선다.

작가는 라이터 불을 이용해 독자의 환기를 이끌고 밤하늘에 뿜어지는 아빠의 담배 연기와 함께 엄마의 제안에서 돌아서는 긴 입짓을 듣는다. 별 많은 산골 마을에서 행해진 작가의 이야기는 뽀송이가 짖는 여운만을 간직케 하고, 고샅이 아닌 곳에 있는 독자의 왼 가슴을 향해 길 하나를 뚫고 있다.

스토리에 리얼리즘을 구축해내기 위한 고단한 몸부림이 이야기를 지닌 형상들을 배치하게 했음을 알 수 있다.

정육면체의 전개도를 펼쳐 든 독자가 다른 각 면들 주위로 들러붙은 납작한 사다리꼴의 쓰임을 알지 못하고 의아해 한다. 독자는 점선이 있는 곳을 따라 쉽게 접어 나아간다. 후에 그것이 각면들을 들러붙게 하는 장치임을 깨닫는다. 그것이 오세영이 만들어 내는 얼개이다.

 

작가는 문자 매체가 체득케 한 상징들이, 보편적으로 들려줄 수 있는 설치들을 활용하고 뒤로 물러서 관망한다. 여기서 설치 된 매개물은 만화가 만들어 낸 기호로서의 역할이 아니라, 서술 문화가 만들어 낸 것으로서 그가 문학에 보다 근접한 그림을 그리고 있음을 보인다.

엄격한 장르 구분에 대한 발언은 멈추겠다. 그러나 이는 새로운 변종의 장르로 읽혀야 할 것이다. 만화의 전형적인 모습을 담보로 하고 있다고 해서, 이 작가의 골 깊은 인생 여정을 만화의 것으로 믿어버리는 것은 멈춰야 한다. 그로 인해 만화가 예술성을 인증 받을 수 있게 됐다면 거기에 대한 재인식을 지녀야 한다. 그가 왕도(王道)를 걷고 있음은 우리 모두가 그리도 소원하던 만화 자체의 평가 상승이 아닌, 문학의 다른 모양에 대한 기대로서 읽어 내려가야 할 것이다.

만화와 삽화의 경계, 그리고 이야기 장르들 중 만화와의 차별성에 대한 탐구가 까다롭게 이루어지고 보면 이는 가장 쉽게 대두 될 수 있는 문제로서 이해 될 것이다. 다른 이해를 구하자면 순정 만화 잡지에서 특집 형식으로 이야기를 구성하고, 그에 걸맞는 일러스트를 곁들여 감성적인 소구층을 형성하는 것과 조금 다른 모양을 취하고 있을 뿐인 것이 오세영의 고샅을 지키는 아이이다. 현대인에게 필요한 것이 정독에 의한 인식 확보보다는 단발마적인 영상이라 논하면서 전달 매체로서의 우열성을 만화가 지니고 있다고 분석한다. 일회성 감정의 이완을 택할 때에 그 영향력이 가장 크게 대두 될 것이라 예견되는 것이 바로 만화라는 것이다. 이에 대중의 고뇌를 인식한 출판인 들에 의해 여타 사회 서적과 이론서들을 만화화 하는 바람이 불고 있고, 문학과 철학마저도 이 설명적 그림을 활용 재편되고 있다. 하지만 이것도 만화임을 인정하고 작품 목록에 삽입하는 것은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오세영의 만화 역시 이런 범주하에서 의심받아야 한다.

 

우리 사는 인간 세상이 워낙 복잡하고 다양해서 사실 만화가가 다 그려 낼 수는 없어요. 그래서 만화도 여러 가지죠. 저는 제 눈길 닿는 곳에 있는 보통 사람들을 관심이 가는 대로 그렸을 뿐


문학적 정서의 변용으로 글 속으로 기어드는 그림들과 강렬함으로 도출되는 데생이 당대를 지탱하는 만화 예술이라 말하는 것은 좋지 못하다. 그가 매우 특출 난 작가임은 인정받아야 할 것이고 그의 새로움들을 복 된 가짐으로 쓰다듬어야 할 것이다. 종로5가를 휩쓸고 다녔을 이 만화아이의 갸륵한 꿈들은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에겐 문학소년의 그것이 너무 강하게 도출되고 있다. 이것은 나이 마흔이 넘은 오세영을-작가라고 불러야 하는 터에 합당한 수식을 찾지 못하게 한다. ()

 

한국만화문화연구원, 코코리뉴스레터, 1997. 03. 25 발표

박석환, 만화시비탕탕탕, 초록배매직스, 1999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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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seokhwan

만화평론가 박석환 홈페이지. 만화 이론과 비평, 웹툰 리뷰, 인터뷰, 보도자료 등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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