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그래픽노블 출판 현황 및 변화를 중심으로
그래픽노블, 뭔가 있어 보이는 그 이름
만화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빠지지 않는 주제가 국가별 만화에 대한 인식이다. 일본은 어른들도 지하철에서 만화를 보고 미국은 옛날 만화책 한 권이 엄청난 금액에 거래되며 프랑스는 만화를 예술로 대우한다는 등의 사례를 든다. 반면, 한국은 만화에 대한 국민적 인식과 평가가 미흡하다고 지적한다. 맞는 이야기일 수 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한국 사회와 마찬가지로 다른 나라도 주류 만화는 아동·청소년을 위한 오락물로 창작되고 유통됐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을 어른들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만화의 내용과 표현에 대한 우려와 걱정이 깊었다. 아이들의 문제 행동이 ‘만화의 문제’로 부각됐고 언론과 시민사회의 비난이 비이성적 검열과 심의로 이어졌다.
일본이고 미국이고 마찬가지였다. 그런 상황이 닥치면 만화가와 만화출판사 관계자들은 숨어 다니기 바빴다. 일부는 그 상황을 수용하면서 계몽주의적 요소를 강화했고 일부는 새로운 시도와 제시로 그 상황을 변화 시키려 했다. 일본에서는 1957년 다쓰미 요시히로가 데츠카 오사무 유의 ‘망가(漫画, まんが)’에 반대한다는 의미로 ‘극화(게키가, 劇画, げきが)’라는 새로운 전통을 선언했고 미국에서는 1978년 윌 아이스너가 슈퍼히어로 중심의 ‘코믹북(Comicbook)’이 지닌 한계를 돌파하자며 ‘그래픽노블(Graphic Novel)’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제시했다.
한국의 만화가들도 같은 이유로 일본의 ‘극화’를 수용했고 다양한 시도와 제시를 이어갔다. 김산호는 <대쥬신제국사> 등의 작품을 발표하면서 ‘회화극본’이라 명했고 백성민은 <장길산>을 ‘마당그림’이라 했다. 이현세는 <남벌> 등의 작품에 ‘그림소설’이라는 타이틀을 붙였고 이희재는 만화의 사회적 역할론을 강조하며 이른바 ‘불량만화’에 대비되는 ‘바른만화’의 개념을 제시했다. 순수 예술로 평가되던 ‘회화’와 ‘소설’을 수용해 만화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키고 최소한 자신의 작품을 현존하는 만화의 카테고리 바깥에 위치시키고자 했다.
윌 아이스너의 그래픽노블, 다쓰미 요시히로의 극화, 백성민의 마당그림
국내에서 마블 영화와 함께 확장된 미국만화의 세계
윌 아이스너는 ‘그래픽노블’이라는 새로운 카테고리를 확립하고 활성화하기 위해 작화 교범을 만들어 후학을 양성했다. 이에 따라 주류 만화의 형식과 내용에서 벗어난 다양성 작품이 여럿 도출됐고 미국만화의 새로운 전통이 형성됐다. 그런데 ‘그래픽노블’이라는 이름은 주류 미국만화시장에서 더 적극적으로 수용됐다.
미국의 주류 출판만화 발행 형식은 한국이나 일본과 다르다. 일본과 한국은 만화잡지 1호분에 다수의 작품이 16페이지 정도씩 연재됐다가 8회분 가량이 모이면 단행본으로 발행된다. 이후 작품의 인기도나 중요도 등에 따라 양장본으로 재간되기도 한다. 반면, 미국의 코믹북은 20페이지 분량의 1회 분을 중철 제본 형식의 책으로 발행하고 이슈라 칭한다. 이슈 6회분을 묶은 1권을 볼륨이라 하고 트레이드페이퍼백(TPB, 저가형 소프트커버)라 칭한다. 볼륨 2~3권을 묶은 코믹북을 하드커버(HC, 고가형)라 하는데 통상 TPB부터를 그래픽노블이라 한다.
정리하자면 윌 아이스너 유의 그래픽노블은 슈퍼히어로 유의 코믹북(이슈)이 지닌 관습과 전통에서 벗어난 작품군을 의미한다. 그런데 미국만화시장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슈퍼히어로물 내에서는 여러 편의 코믹북을 한 권으로 묶어서 완결된 이야기를 지니도록 하거나 고급형으로 제작한 작품군을 그래픽노블이라 칭하고 있다. 윌 아이스너의 그래픽노블이 차별성과 다양성 전략을 제시했다면 슈퍼히어로 그래픽노블은 주류 만화의 고급화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일본망가에 익숙한 국내 시장에서 미국의 그래픽노블은 윌 아이스너 유 건, 슈퍼히어로 유 건 상관없이 차별화 된 다양성 출판만화로 인식하고 있다. 90년대 이후부터 대원, 학산, 서울로 대표되는 출판만화 3사가 국내 일본 망가의 제작과 유통을 독점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신규 출판사가 만화출판시장에 진출하려면 주류가 아닌 비주류 시장을 공략해야 했다. 시공사, 세미콜론 등이 2000년 대 초반부터 한국 만화팬들에게는 낯선 미국 그래픽노블을 국내에 출시했다. 마블, 디씨, 이미지코믹스의 슈퍼히어로물이 주종을 이뤘지만 이른바 저자만화라고 할 수 있는 윌 아이스너 유의 작품도 다수 발행됐다. 국내에서는 일부 마니아층에 의해 소비되는 수준이었으나 2010년을 전후해 <아이언맨> 등 코믹북을 원작으로 한 영화들이 국내 흥행에 성공하면서 주목 받는 상품군이 됐다.
시공그래픽노블 중 <캡틴아메리카>, 미메시스그래픽노블 중 <조각가>, 와우그래픽느볼 중 <스마일>
한국형 그래픽노블? 또는 대안적 만화출판물
2019년 5월 17일 기준 인터넷서점 알라딘에서 판매되고 있는 그래픽노블은 총 903건이다. 최근 1년간 등록 건수는 156건, 직전년도 91건에 비해 65건이 늘었다. 무려 71.42% 증가했다. 출판시장이 그래픽노블이라는 이름의 작품군을 새로운 히트 아이템으로 인식하고 집중 발행하고 있는 것이다.
시공사 그래픽노블 레이블은 미국 슈퍼히어로 코믹북의 고급화 전략으로,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레이블은 이른바 미국과 유럽 저자만화(작가주의만화)의 전통을 수용한 차별화 전략으로 확고 부동한 카테고리 킬러가 됐다. 시공사와 미메시스가 청년층을 타겟으로 한 작품군에 집중하고 있다면 보물창고 출판사는 와우그래픽노블 레이블을 통해 아동·청소년층을 겨냥한 작품군을 발행하고 있고 애니북스는 걸작 일본망가 복간에 집중하는 한편 비주류 성향 일본망가 발굴에도 적극적이다.
이중 주목해야 할 지점은 미메시스와 애니북스의 국내 작가 그래픽노블이다. 미메시스는 수신지의 <3그램> <스트리터 페인터>, 권용득의 <예쁜 여자>, 이대미의 <비우> 등을 발행했고 애니북스는 김은성의 <내 어머니 이야기>, 박수봉의 <수업시간 그녀>, 이동은/정이용의 <니나내나> 등을 발행했다. 대체로 작가가 자신의 삶에서 얻은 경험과 성찰을 독특한 화풍과 관점으로 서술한 자기고백서사가 주류를 이뤘다. 특히 여성서사가 많은 화제를 낳고 있다. 수신지는 개인SNS에 ‘며느라기’ 시리즈를 연재하며 비주류만화계의 대표작가로 급부상했고 김은성은 소설가 김영하가 ‘세상에서 사라져서는 안 될 책’으로 TV에서 <내 어머니 이야기>를 강력 추천하면서 화제의 작가로 떠올랐다. 일제강점기에 함경도에서 태어나 위안부로 끌려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결혼을 하고 한국전 이후 남한에 정착한 어머니의 회고담을 여성작가가 오랜 기간 공들여 완성한 작품이다. 2006년 전위만화잡지라고 할 수 있는 ‘새만화책’에 연재를 시작해 진보적 어린이 교양지라고 할 수 있는 ‘고래가 그랬어’로 지면을 옮겨 연재됐다. 국내 작가들을 중심으로 한 출판시장에서 ‘그래픽노블’은 ‘저자만화’를 강조하는 명칭으로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정리하자면 그래픽노블은 만화의 예술성을 강조하는 해묵은 논의에서 출발한 이름이다. 또, 고급화를 추구해 책값을 올리고 판매를 늘리려는 출판사의 상업적 전략에서 완성된 이름이기도 하다. 긍정적인 부분도 있지만 부정적 측면도 있는 용어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래픽노블이라는 이름에는 만화계의 관습과 만화에 관한 인식을 조금씩이라도 변화시키고자 했던 선대와 후대 만화인들의 노력이 담겨있다. 천편일률적여지고 있는 만화의 한 때가 당도하면 어김없이 작동했던 도전이 기록된 이름이다. 어찌 보면 웹툰의 시대가 된 지금, 다시 그래픽노블을 생각해봐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끝)
* 게재 매체에서 보기
http://dml.komacon.kr/webzine/cover/26975
글에 남긴 여러분의 의견은 개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