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이 눈 뜰 때, 당신의 세상이 열려요
엄마 배에서 나와 눈을 떴을 때 제 다리는 아직 힘이 없었어요. 다시 엄마 품에 안겨 엄마의 걸음만큼만 세상을 봤지요. 귀가 뚫리고 입이 열렸을 때도 정확한 ‘의사표현’을 하지 못했어요. 제 우는 소리에 엄마는 ‘젖 줘?’ ‘기저귀 갈아줘?’만 되풀이 했지요.
그렇게 울음뿐인 시간을 보낸 후 그리 애쓰지 않았지만 보고 ․ 듣고 ․ 말하게 됐어요. 손과 발을 사용하게 됐지요. 아마도 주변의 것을 보고 따라하는 자연스러운 ‘모방학습’ 과정이 있었을 거예요. 스스로를 보호하고 지키려는 ‘본능적 학습능력’도 발휘됐겠죠. 그때 비로소 ‘내가 원하는 것’에 대해 표현하고 전달하게 됐습니다.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됐죠. 하지만 여전했어요. 작은 키 소년이 보지 못한 세상이 있었고 아무리 크게 외쳐도 제 목소리는 주변을 넘지 못했지요. 또 그 때의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졌어요. 그때 알게 됐어요. ‘매개체’라는 것을. 제가 볼 수 없는 세상이 담겨있는 것을. 제 생각을 담고 표현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것을. 제게 그 매개체는 책과 문자였어요.
한 줄을 읽으니 다른 사람의 ‘생각’이 전달되고 한 장을 읽으니 그의 ‘태도’가 그려졌습니다. 한 권을 읽으니 경험하지 못한 상황과 보지 못한 세상이 열렸지요. 그렇게 한 권에 담긴 하나의 세상을 알아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읽은 것을 쓰기 시작했어요. 문자는 유용한 도구였지요. 제가 경험한 상황을 적었고 그 때의 생각과 태도를 기록했죠. 귀찮고 성가실 때도 있었지만 아둔한 머리 탓에 ‘기억은 기록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요. 그래서 매일 썼어요. 일기(日記)지요. 생각을 쓰고 태도를 쓰고, 상황을 정리하면서 제 나름의 세상을 적었죠. 항상 쓸 수 없을 때도 있어서 달에 한번 쓰기도 했어요. 월기(月記)지요. 전 ‘딸기’라고 불렀어요. 일기는 짧게 썼고 딸기는 오랜만에 쓴 거니까 의식적으로 길게 썼죠. 그림을 그려 넣기도 했고 사진을 붙이기도 했어요. 요즘이라면 녹음도 하고 동영상도 촬영했을지 모르죠. 그 날의 단상(斷想)이 적혔고 어떤 사안에 대한 사상(思想)이 정리됐어요. 얼마쯤 지날 때마다 제 세상(世相)이 하나씩 만들어졌죠. 세상에 내 놓을 수 있는 제 기록, 한 편의 ‘작품’이 된 거죠. 그렇게 쓰기를 반복했어요. 써지지 않으면 다시 읽었고요. 읽기를 통해 세상에 눈을 뜨고 쓰기를 통해 세상에 저를 알렸죠. 그렇게 소년은 청년이 됐고 이 세상에 자리 하나를 얻었어요.
같겠죠. 사람들은 다 그렇게 ‘학습’된 것을 ‘표현’하고 자신의 ‘생각’을 뭔가에 담아서 ‘전달’하고 ‘소통’하면서 사는 거니까요. 다른 것이 있다면 ‘매개체’일 겁니다. 저는 문자라는 수단을 택했고 우리 대학 학생들은 ‘영상’을 사용하지요. 그런데 쓰기라는 것은. 서술이라는 과정은 같습니다. 생각을 문장화 시키듯 생각을 영상화 시켜야 하니까요. 문장을 잇듯 컷과 씬을 연결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먼저 써야하지 않을까요. 그것이 가장 기초적인 생각정리의 기술이고 가장 효율적인 사전 제작 단계니까요. 어떻게 쓰냐고요? 미국의 한 문장가가 그랬습니다. ‘써보는 것 이상의 방법은 아직 개발되지 않았다’고요. 써봐야 압니다. 써야 잘 쓸 수 있는 방법을 지도할 수 있으니까요. 이 책자에 실린 글들 역시 그런 결과물입니다. 눈 뜬 이들의 세상이지요. 그들의 세상과 소담스런 성과에 박수를 보냅니다.
한국영상대학교 제1회 작품감상에세이공모(2014년) 베스트코칭상 수상 소감을 대신해서
만화창작과 교수 박석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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