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적 상상력과 지구적 행동규범 - 007 우주에서 온 소년, 김삼
[그림 1] 김삼, <007 우주에서 온 소년>, 2010년 씨엔씨레볼루션 복간판 발행, ‘소년007’ 시리즈 1965년 [소년동아일보] 연재 개시
■ 작품에 대하여 : 만화로 할 수 있는 모든 장르적 시도를 실천한 퓨전코믹
김삼의 <007 우주에서 온 소년>은 ‘소년007 시리즈’ 중 한편으로 주인공 007이 올리브성에서 펼치는 모험을 담은 작품이다.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이 선정한 한국만화걸작선 중 한편으로 선정되어 2010년 전3권으로 복간된 바 있다. ‘소년007 시리즈’는 어린이신문 [소년동아일보]에 1965년 11월 22일부터 1980년 9월 6일까지 장장 15년 간 20부 총 4,550회가 연재된 작품이다. 1962년 데뷔한 작가의 출세작으로 아동만화 <강가딘> 시리즈, 성인만화 <대물> 시리즈와 함께 ‘김삼 만화’를 대표하는 걸작 중 한 편이다.
[그림 2] <007 우주에서 온 소년> 중 여왕이 된 미요
[그림 3] <007 우주에서 온 소년> 중 여왕을 배웅하는 007
‘소년007 시리즈’는 제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비밀 첩보원의 대명사 ‘007’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007은 영국의 소설가 이안 플레밍이 1953년 발표한 추리소설 <카지노로열>에 등장하는 첩보원 제임스 본드의 암호명이다. 1962년 <007 살인번호> 이후 2012년 <007 스카이폴>에 이르기까지 총 23편이 영화로 제작됐다. 국가적 위기를 조장하는 전형적 악당과 위험한 미녀가 등장하는 첩보액션물이다. 김삼은 개봉된 영화와 소설을 구해보고 007과는 쌍항 대립되는 설정으로 전혀 다른 내용의 작품을 구상해냈다. 007 캐릭터의 외형적 특징 역시 작가가 친구들이 바둑 두는 모습을 보고 떠올린 것이다. 까만 바둑알과 하얀 바둑알이 무리를 지어 싸우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하얀 헌팅캡을 쓰고 검정양복을 입은 소년 첩보원을 착안해냈다. 탄생 취지 역시 ‘소극적인 우리 어린이에게 모험심을 심어주고 용기와 적극적인 행동을 가르쳐주기 위’한 것으로 소설이나 영화 속 ‘바람둥이 007’과는 다른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다. 실제로 초창기의 소년007은 첩보원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의 모습을 하고 있다. 다소 통통해 보이는 얼굴형에 안경을 끼고 있어서 상당히 소극적인 소년 상으로 보였다. 그러던 것이 수없는 작전에 참가하고 회를 거듭하는 모험을 거치면서 뾰쪽한 콧날에 안경을 쓴 영웅형 소년상으로 변모해 간 것이다.
[그림 4] 소년동아일보, 1977년10월10일 자 ‘소년007’ 연재지면
‘소년007’시리즈는 원자탄작전을 시작으로 간첩수색작전, 로봇작전, 탈출작전, 번개작전, 우주작전 시리즈로 이어졌고 전천후작전, 4차원작전, 마이크로작전 등에 이르기까지 주로 007에게 주어지는 작전을 부제로 내용이 전개됐다. ‘소년007’ 시리즈의 단행본은 교학사(원자탄작전 편, 1971년), 소년문화사(마이크로작전 편, 1974년), 어문각(우주에서 온 소년 편(1980), 전천후작전(1981), 4차원작전(1982)) 등에서 발간했는데 연재순서대로 발간한 것이 아니라 특정 시리즈를 골라서 3~4권 분량으로 발행하는 형식을 취했다. 이 때문에 이 시리즈의 순서를 비롯한 전체상은 여전히 혼란스러운 상황에 있다. 1978년 동아방송에서 라디오 드라마로 제작해 6개월간 방송된 바 있고 임정규 감독과 정수용 감독에 의해 극장용 애니메이션 [소년007 은하특공대(1980)], [소년007 지하제국(1981)]편이 제작되어 인기리에 상영되기도 했다. 이중 [소년007 은하특공대]편이 시리즈 중 가장 인기 있었던 <007 우주에서 온 소년> 편을 극화한 것이다.
[그림 5] 극장용 애니메이션 [소년007 은하특공대] 포스터
[그림 6] 극장용 애니메이션 [소년007 지하제국] 포스터
악당에 쫓기던 한 여인이 은신처를 찾아 떠돌던 중 알을 낳게 되고 알에서 기요와 미요 남매가 태어난다. 이 여인의 정체는 은하계의 한 행성인 올리브성의 여왕이었고 악당들은 여왕을 내쫓고 왕좌를 차지한 두목의 부하들이었다. 첨단 우주선을 이끌고 지구를 위협하는 이 외계 생명체들에서 맞서 소년007이 나선다. 007은 여왕 일행과 함께 외계의 악당을 지구에서 쫓아낸다. 그리고 기요와 미요 남매와 함께 우주선을 타고 올리브성으로 가서 악당들을 몰아내고 왕좌를 되 찾아준다. 이 과정에서 여왕과 왕자가 죽고 공주 미요가 여왕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렇게 이야기가 끝나는 듯 했지만 두목과 악당 일행은 지하국과 골리아스성, 할리성, 자이언트성, 매직성으로 장소를 옮겨가며 007과 미요를 괴롭혔고 007은 끝없이 등장하는 새로운 악당들과 목숨을 건 대결을 펼친다.
■ 작가에 대하여 : 네버엔딩스토리로 대중을 모셨던 만화계의 세헤라자데 김삼
[그림 7] 김삼, 씨엔씨레볼루션 제공
김삼은 1941년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정식으로 만화수업을 받지 않았고 선배 만화가인 신동헌(1927~)과 김경언(1929~1996)의 작품을 보며 습작을 했다고 한다. 1962년 신문 잡지 등에 투고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지만 1965년 발표한 ‘소년007 시리즈’가 첫 번째 출세작이자 사실상의 데뷔작이라 할 수 있다. 김삼은 ‘소년007’ 완간에 앞서 1976년 어린이잡지 [소년생활]에 <검둥이 강가딘>을 발표한다. ‘강가딘’은 김삼 아동만화를 대표하는 두 번째 작품으로 미국의 고양이 ‘펠릭스’나 생쥐 ‘미키마우스’, 일본의 검둥이 들개 ‘노라쿠로’나 꼬마 곰 ‘코로스케’에 비견할만한 한국산 검둥개 캐릭터이다. 강가딘 시리즈 역시 다양한 세계관을 보여주는 여러 판본이 존재한다. 강가딘이 가축부대의 대통령으로 맹수부대와 대결을 펼치는 내용이 있는 가하면 사람보다 뛰어난 지능을 지니고 있지만 주인집 잔반이나 처리하던 똥개 신세에서 인류를 구원하는 정의의 용사가 되는 내용까지, 폭과 깊이를 젤 수 없을 만큼 기상천외하고 끝없이 펼쳐지는 이야기를 담아냈다.
[그림 8] <수퍼스타 강가딘>, 요요코믹스판
[그림 9] <칠삭동이>, 요요코믹스판
김삼은 80년대 중후반까지 아동의 정서함양에 도움이 될 법한 작품 활동에 매진했다. 그러나 90년대 초반으로 접어들면서 기상천외한 발상과 이야기해주는 방식을 토대로 성인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반백수 신세인 남자주인공이 상담소를 찾아가 ‘자신이 겪은 말 못할 사건’을 이야기하는 형식을 취한 작품이다. 각종 주간지 등에 연재됐다가 <대물> 등의 타이틀로 묶여서 단행본으로 발간됐다. 이는 김삼 만화를 보면서 어른이 된 독자들에게는 흥미로운 선물이었지만 일부 독자들에게는 저속한 것으로 이해되기도 했다. 90년대 중후반 스포츠신문 연재만화들이 음란성 시비에 휘말리면서 김삼 역시 고통을 받았고 창작 일선에서 물러났다.
■ 명장면 명대사 : 우주 어는 별엔가 나와 같은 지능을 지닌 생물이 살고 있을 것
<007 우주에서 온 소년>은 한 천문학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시작된다. ‘내가 지구라는 별 위에서 살고 있듯이 우주 어느 별엔가 나와 같은 지능을 지닌 생물이 살고 있을 것’이라는 단상은 김삼의 상상력을 은하계로 넓혀냈고 지구 소년 007을 우주로 보냈다. 재미있는 것은 무대는 우주선과 첨단무기가 등장하는 근미래 사회처럼 보이는데 등장인물들의 대사는 매우 구수하고 행동양식은 아주 한국적이라는 점이다. 위기에 빠진 007은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읊조리고 우주에서 온 여왕이 집에 가겠다고 하자 ‘그냥 가면 섭섭하니 하루 더 묵어’ 가라거나 ‘추석이나 지내고 가라’고 하는 식이다. 60~70년대의 행동양식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림 10] <007 우주에서 온 소년> 중 한복을 입고 지구를 떠나는 여왕
[그림 11] <007 우주에서 온 소년> 중 쇠붙이는 먹는 괴물 불가사리 등장 장면
다소 허황된 설정과 작위적인 전개 등으로 설득력이 없어 보일 수도 있지만 김삼 만화의 원형은 대부분 한국적 전통설화와 외국 신화에 근거를 둔 것이다. 이 작품에도 각종 설화와 신화 속 상징이 무수히 등장한다. 난생신화나 우렁각시 설화, 페가수스나 거인설화 등이다. 이중 눈에 띄는 것은 ‘불가사리 설화’이다. 쇠를 먹고 악몽과 사기를 쫓는 상상 속 동물로 한국의 전승설화 속에 자주 등장하는 괴물이다. 침략주의적 철기문화에 대한 공포와 부정적 심리가 담긴 것으로 해석되는 불가사리 설화를 김삼은 다양한 방식으로 작품에 활용했다.
‘소년007’에서는 적의 우주선과 탱크를 먹어치우는 통제할 수 없는 조력자로, ‘강가딘’에서는 코믹한 소재로 활용했다. 이 후에는 이 설화 자체를 그대로 만화화 한 <사랑방이야기> 시리즈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처럼 김삼은 특정 전개 형식을 먼저 설정해두고 다양한 원형적 이야기 소재를 찾아내 새로운 아이디어와 융합해 작품화했다. 그 범위는 가히 우주적이어서 지구를 벗어나 은하계를 누볐지만 그 대상인 지구 독자의 공감대에 맞춰 조절됐다. 자칫 손쉬운 창작방법론으로 이해 될 수 있으나 이는 매일매일 새로운 이야기를 구성해야하는 신문연재만화 형식에 맞춘 것이다. 하루라도 새롭지 않거나 재미있지 않은 이야기가 나오면 당장 목숨을 내놓아야하는 [천일야화] 속 세헤라자데의 운명과도 같은 고통이 따르는 작업이었다.
참고자료
네이버 책, 007우주에서 온 소년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254023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소년동아 만화 소년007 연재 끝낸 김삼씨, 동아일보, 1980.09.06
네이버 블로그, 박세현의 팝아툰, 마흔다섯살의 영원한 피터팬 소년007
http://blog.naver.com/egon17/40100198984
디지털만화규장각, 박기준, 소년007 김삼
http://www.kcomics.net/Magazine/column_view.asp?CateCode=3340010&Seq=1822&Vol=113&intBnum=414_8
소년007 은하특공대 오프닝 영상
조선일보, 김삼 인터뷰, ‘똑똑한 검둥개 강가딘이 돌아왔다’, 2002.08.13
http://books.chosun.com/site/data/html_dir/2002/08/13/2002081355327.html
네이버 만화, 걸작 리메이크, 유희, 멍탐정 강가딘
http://comic.naver.com/webtoon/list.nhn?titleId=274399&weekday=fri
박석환/ 만화평론가
스포츠서울 신춘문예에 만화평론이 당선된 후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만화비평서 <만화시비탕탕탕>, <코믹스만화의 세계>가 있고, 만화이론서 <디지털만화 비즈니스-잘가라 종이만화>, <만화리뷰쓰기> 등이 있다. 공저로는 <만화>, <한국의 만화가 1, 2> 등이 있다.
[후기] 몇 해 전 만화의 날 행사 때 김삼 선생님을 처음 뵈었다. 내게는 '강가딘'을 한국의 미키마우스 쯤으로 만들고 싶은 꿈이 있었다. 그리고 사춘의 밤을 함께 했던 '대물' 시리즈를 잊을 수 없었다. 만화 속 주인공은 무슨 고민이 그리 많았던지 늘 상담소를 찾았고 자신의 성경험담과 성적 환상을 주저리 주저리 이야기했었다. 사춘의 나는 그게 무슨 고민이냐며 그 긴장과 흥분을 나누고 싶어했다.
아동만화를 그리고 전래동화를 교양 넘치게(?) 소개했던 선생님의 성고백 만화는 주간성인만화잡지 전성시대를 넘어 스포츠신문의 타블로이드판 만화경쟁시대로까지 이어졌다. 내게 '김삼의 전성시대'는 그 시절이었고 당연히 김삼의 대표작 역시 90년대 초 성인만화 안에서 꼽고 싶었다. 하지만 만화사적 맥락에서 보자면 명랑의 어법에서 분화해 첩보와 SF 액션, 전래동화와 서양신화를 넘나들었던 초기작품이자 '전략적 아동만화'였던 <소년 007>을 빼 놓을 수 없었다. 오리진을 주장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었지만 이 작품에는 아동과 성인을 오갔던 김삼만화의 분화와 전개를 유추할 수 있는 코드들이 가득했다. 금발미녀를 비롯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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