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판타지소년의 취향 백과 - 레드블러드, 김태형
[그림 1] 김태형, 레드블러드, 1994년 [영챔프] 연재 개시
■ 작품에 대하여 : 게임계가 사랑한 판타지 전쟁서사만화
김태형의 <레드블러드>는 1994년 [영챔프]에 연재된 작품이다. 당시 만화계는 소년 대상 주간만화잡지의 성장이 안정세를 취하자 ‘영(young)지(誌)’라는 새로운 매체를 제시했다. 연재작품의 대상 독자층을 청소년과 성인 사이에 맞춘 것으로 기존 소년지 소비자의 구매를 늘리는 한편, 고연령대 소비자를 신규 유입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편집부는 소년도 좋아하고 청소년과 성년층도 좋아할 만한 작품을 찾았고 영지는 다양한 장르만화의 백화점이자 혼성 장르의 실험장이 됐다. <열혈강호>와 <불문율>, <비트>가 무협‧시대‧학원이라는 코드를 신세대 액션활극 라인으로 제시한 작품이라면 <신 붉은매 외전>과 <레드블러드> 등은 SF 라인으로 제시됐다.
[그림 2] 김태형, 레드블러드, 3권 표지와 속지 일러스트
우주력 31년, 제5차 세계대전으로 지구 인구의 46%가 희생된다. 살아남은 인구는 달과 콜로니(Colony) 화성으로 이주하고 핵으로 오염된 지구는 인공정화를 시작한다. 그러나 이민자들 사이에서 지구 귀환 시 좋은 영토를 차지하기 위한 갈등이 시작되고 제6차 세계대전, 즉 제1차 우주대전이 시작된다.
<레드블러드>의 도입은 이처럼 장중한 SF서사의 세계관으로 출발한다. 그러나 전투 비행사인 주인공 시난과 얀은 전쟁 중 가스프라(소행성, Gaspra) 폭발 사고와 함께 호라이 행성이라는 낯선 중세국가로 공간이동(타임슬립)을 하게 된다. 이 세계 역시 패권 다툼이 한창이다. 국왕 헥토르의 쌍둥이 아들 누들스와 젯소스 그리고 이복아들인 판테라는 칼과 마법을 앞세워 각자 진영의 이익을 위해 대립하고 있다. 여기에 스콧트까지 합세하면서 다른 세계에서 온 세 명의 SF전사가 우연한 계기로 세 진영의 다툼에 휘말리게 되고 ‘붉은 피’로 얼룩진 판타지 전쟁서사극이 시작된다.
[그림 3, 4] 레드블러드의 등장인물들
SF전쟁서사극이라 생각됐던 <레드블러드>의 세계는 고대 신화와 중세의 역사적 배경, 동서양의 각종 기호들이 혼재된 판타지물로 발전한다. 이 작품에는 80년대와 90년대 가장 인기있었던 대중문화의 각종 이미지 기호가 질서정연하게 재배치 되어있다. 작가는 이를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로만 구축한 ‘개인적 취향의 세계’라고 소개한 바 있다. 허리우드 스타와 PC게임 영웅 이미지에 대한 선호가 두드러지고 서부극이나 느와르 영화에서 본 듯한 익숙한 장면도 여럿 등장한다.
[그림 5] 남과 여의 극적 대치 상태를 보여주는 관습적 연출 또는 남성의 로망
<레드블러드>는 도서출판 대원에서 2000년 전 11권으로 완결됐고 총 50만부 가량이 판매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3년 대원씨아이에서 <레드블러드 Revision>이라는 타이틀로 재발행 된바 있고 약 10여 개 국가에 수출되기도 했다. [영챔프] 연재본을 출판한 이 작품은 작가가 학생시절 총 3부작으로 구성한 이야기 중 2부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편집부는 작가의 의견에 따라 이 작품을 출판하면서 ‘2부 완결’이라 표시했지만 1부가 따로 있지 않아서 독자들은 한동안 혼란을 겪어야 했다. 이 작품의 세계관과 1부 내용을 기반으로 제작된 게임이 ‘레드블러드 온라인’이다. 게임에서는 원작이 다루는 시대 이전을 배경으로 하는 만큼 원작의 캐릭터가 등장하거나 내용상 연결이 이뤄지지는 않는다. 다만 원작 캐릭터와 관련 있는 가문이 등장하고 1부 성격의 스토리가 퀘스트를 통해 전개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레드블러드 비긴즈’라 할 수 있는 이 게임은 5년 여 간의 제작기간을 거쳐 현재 베타테스트 중이다.
[그림 6, 7] 온라인게임 ‘레드블러드 온라인’의 이미지 일러스트
■ 작가에 대하여 : 만화와 게임의 물꼬를 튼 아트디렉터 김태형
[그림 8] 김태형
김태형은 고교시절부터 <힙합>의 김수용 등과 함께 아마추어 만화 동아리 활동을 했다. 졸업 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만화를 습작하던 중 만화가 이빈의 소개로 1992년 [만화왕국]에 단편 <통제구역>을 발표하며 데뷔한다. 이후 양재현의 <열혈강호> 작업을 돕던 중 출판사에 발탁되어 1993년 코믹액션히어로물인 <개미맨>을 [소년챔프]에 연재한다. 곤충을 먹으면 초인이 되는 이들이 격투를 펼치는 내용이다. 다소 성급함이 묻어났지만 이 기간 중 김태형은 빠르게 성장했고 대형 서사물에 도전할 수 있는 자신감도 얻게 됐다.
1994년 연재를 시작한 <레드블러드>에서도 김태형의 작화는 눈에 띄게 성숙했다. 이후 해외 만화계의 러브콜이 이어졌고 김태형은 <스칼렛폭스> 등의 작품으로 미국 진출을 시도했지만 시도 이상의 성과를 얻지는 못했다. 반면 게임업계는 김태형의 화려한 작화에 매료되어 있었다. 게임회사에 스카웃 된 김태형은 ‘RF온라인’ 등의 작업에 참여하며 실력을 인정받았고 <레드블러드>를 원작으로 한 게임 제작 시에는 제작사 설립단계부터 참여해서 게임아트디렉터로 일하고 있다. 김태형이 만화계를 떠나 게임계로 간 이후 만화계에서는 현역 만화가를 비롯해서 다수의 인재들이 게임계로 전업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 때문에 만화계는 2000년 대 초 시장 위축과 인재고갈이라는 두 가지 위험에 시달리기도 했다.
■ 명장면 명대사 : 난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림 9] 김태형, 레드블러드, 11권 중 한 장면
김태형의 작화에는 남성적 로망을 대표하는 요소들이 강렬하게 표출되어 있다. 주요 등장인물들은 덥수룩한 수염과 떡 벌어진 어깨, 울퉁불퉁한 근육과 근엄한 표정의 미중년이다. 중세의 귀족인지 허리우드의 패션아이콘인지 잠시 혼란을 느낄 만큼 의상은 화려하고 세련됐다. 패션화보를 참조한 것으로 보이는 이미지 컷 연출이나 아르누보풍의 일러스트 등에서 보이는 장식미 역시 남성들의 흥미를 자극한다.
[그림 10] 김태형, 레드블러드, 11권 중 한 장면
격조 높은 배경 음악과 함께 중저음으로 들릴 것 같은 대사도 하나 같이 사내들의 감성을 대표한다. 전쟁을 종결시킬 수 있는 물건을 손에 쥔 시난은 절대적 힘을 행사하거나 절체절명의 위기를 구할 수 있는 구원자의 상황에서 ‘난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하고 한 번 더 고뇌에 빠지고, 자신을 살해하려는 여인을 사랑한 젯소스는 ‘왜 내가 사랑한 여자는 다 날 미워하는 거지’라며 멋스러운 절망을 드러낸다. 이처럼 과도한 낭만과 엄청난 허세가 담긴 대사는 다소 진부하고 낯간지러운 것으로 읽힐 수도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극적 몰입도를 높이는 역할을 했다. 또, 아름다운 상대역보다 남성적 아름다움을 보여준 남자 캐릭터에 집중하게 만들기도 했다. 개인차와 취향차는 있겠지만 <레드블러드>에는 그 시절의 남자가 좋아하는 남자에 대한 모든 것이 담겨있었다.
참고자료
네이버 N스토어, 김태형, 레드블러드, 대원씨아이
http://nstore.naver.com/comic/detail.nhn?productNo=435804
박석환만화연구소, 이 만화를 발견하다-김태형의 레드블러드
http://comicspam.com/140035714129
게임메카, 게임은 또 다른 기회였다! 레드블러드 김태형 작가, 2008.04.04
http://www.gamemeca.com/feature/view.php?gid=124640
온라인 게임 레드블러드 홈페이지
http://www.redblood.co.kr/Default.aspx
박석환/ 만화평론가,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전략기획팀 부장
스포츠서울 신춘문예에 만화평론이 당선된 후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만화비평서 <만화시비탕탕탕>, <코믹스만화의 세계>가 있고 만화이론서 <디지털만화 비즈니스-잘가라 종이만화>, <만화리뷰쓰기> 등이 있다. 공저로는 <만화>, <한국의 만화가 1, 2> 등이 있다. 세종대학교 대학원 만화애니메이션학과 박사과정 중에 있다.
[후기] 개인차와 취향차는 있겠지만 <레드블러드>에는 그 시절의 남자가 좋아하는 ... 남자에 대한 모든 것이 담겨있었다. 주인공 시난은 절대적 힘을 행사하거나 절체절명의 위기를 구할 수 있는 구원자의 상황에서 ‘난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하고 한 번 더 고뇌에 빠지고, 자신을 살해하려는 여인을 사랑한 젯소스는 ‘왜 내가 사랑한 여자는 다 날 미워하는 거지’라며 멋스러운 절망을 드러낸다. 이처럼 과도한 낭만과 엄청난 허세가 담긴 대사는 다소 진부하고 낯간지러운 것으로 읽힐 수도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극적 몰입도를 높이는 역할을 했다.
난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 테마는 마징가라는 절대의 힘을 지니게 됐던 쇠돌이에게도 주어졌던 질문이다.
뭐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황,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새로운 대통령이 선정된 시점에서 묻고 싶었다.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하고.
** 네이버캐스트 연재 원문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196&contents_id=17932&leafId=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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