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BS노컷뉴스]만화가 윤태호 "시련마저 내게는 이야기거리일 뿐",2009.01.07

2009년은 글로벌 경제위기의 여파로 기업들의 구조조정과 취업난, 실물경기의 위축이 겹치면서 IMF 외환위기 때보다 더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따라 CBS 노컷뉴스는 '당신이 희망입니다'를 2009년 캠페인으로 정했다.

어렵지만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 자신의 장기를 남몰래 동료에게 떼어주는 공무원, '인터넷 번개' 봉사단, 외국인 노동자들의 정착을 위해 봉사하는 외국인 등 삶이 아름다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10회에 걸쳐 보도한다. [편집자 주]


차디찬 노숙생활과 숱한 좌절에도 굴하지 않고 만화에 대한 열정 하나만으로 스타만화가로 성장한 윤태호씨에게서 내일의 희망을 들여다보았다.


◈ 노숙으로 시작한 만화인생

“일상소재를 사회고발로 풀어내는 능력이 가장 탁월한 작가다”(박석환 문화평론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이야기를 잘 풀어나가는 만화작가다. 인간의 이중성을 잘 포착해 드라마틱하게 표현하는 능력이 있는 한국 만화의 버팀목이다”(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 만화창작과 교수)



만화가 인생 20년, 숱한 좌절과 실패, 그리고 뒤늦은 성공.

완벽에 가깝다는 스토리와 치밀한 작가로 평단과 독자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는 만화가 윤태호, 최근 한 포털사이트에 연재중인 최신작은 아예 영화화가 결정됐을 정도다. 이런 그가 빛을 발하기까지는 꼬박, 2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인간 심리를 가장 정확하게 포착해내는 만화가로 정평이 난 윤태호의 만화가로의 첫 길을 그야말로 가시밭길.

선천적인 악건성 피부 탓에 그 흔한 물놀이에 한 번 제대로 끼지 못한 외톨이 윤태호가 어릴 때부터 의지했던 것은 스케치북 한 장과, 연필 한 자루 뿐이었다. 친구와 공유할 ‘코드’를 만들기 위해 만화를 그려줬다는 소년에게 고등학교 1학년 때 첫 번째 시련이 찾아왔다. 집안이 갑작스레 망해버려 광주의 쪽방으로 온 가족이 이사를 하게 된 것이다.

돈이 없어 정상적인 미술교육조차 받지 못한 10대 소년은 간신히 학교 선배들 화방에서 청소를 해주며 미술을 공부했지만, 이런 소년에게 문을 열어줄 대학은 어디도 없었다.

“돈이 없어서 장학금 받을 곳을 알아보다가 한 국립대 미술교육과 시험을 쳤는데, 알고보니 실기비율이 10%밖에 안되는 거에요. 그러니 대학에 못 들어갔죠”(윤태호)

그리고 하루가 멀다하고 전전하던 만화방. 만화가가 되겠다며 만화잡지 뒷 편에 실린 만화학원 광고지 하나를 찢어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던 풋내기를 맞이한 것은 고통스러운 노숙생활이었다.

9개월 과정의 학원에는 들어왔지만, 집에서 부쳐 준 한 달 15만 원 생활비에서 8만 원을 학원비로 내고 나면 남는 돈이 없었다. 학원을 마치고 강남역 지하 분수대에서 몸을 눕힌 뒤 간신히 밤에 몰래 학원으로 들어가는 식의 노숙생활을 시작한 윤 씨, 그마저도 건물 주인에게 들켜 쫓겨나기 일쑤였다. 하루 세끼를 120원 짜리 라면 하나로 때우는 날이 숱하게 이어졌다.

"그 때 안성탕면인가? 그 라면이 처음 나온 해였죠. 무척이나 맛있었습니다"(웃음)


◈ 계속되는 벤치생활, 그리고 만남

학원이 대치동으로 이사하면서 노숙 장소도 함께 옮긴 윤 씨. 88올림픽이 있던 그 해, 노숙자의 삶은 유난히도 고달팠다.

“은마 아파트 벤치에서 생활했는데, 제일 미운 사람들이 밤잠 없는 노인들이었다. 밤에 더우니깐 나와서 이야기하면 잠을 잘 수가 없었다(웃음). 하루는 소주를 먹고 잠이 들었는데, 누가 깨우더라. ‘이런데서 자면 얼어 죽는다고’. 그래서 ‘나 만화하는 사람인데 갈 곳이 없다’고 하니 갑자기 반기면서 근처 포장마차로 데려가더라. 그리고 값도 제일 쎈 돼지고기 볶음도 시켜주고, 맥주도 시켜주고...그러더니 자기는 클래식기타 공부하는 사람인데, 창작의 고통을 겪는 사람끼리 이야기나 하자고 하더라고요. 이름도 모르죠. 지금 보면 당연히 인사라도 하고 싶습니다”(윤태호)

하늘이 도왔는지, 우연의 일치인지, 그토록 문하생이 되고 싶었던 당대 최고의 만화가 허영만 화백이 은마아파트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뒤늦게 접한 윤 씨는 무작정 화실을 찾아갔다.

허영만 화백은 당시 20살 윤 씨를 어떻게 기억할까.

“처음 화실을 왔을 때 화실에 자리가 없었습니다. 아파트 앞에 공원에서 그냥 덮을 것도 없이 며칠 밤을 지냈다고 나중에 전해 들었습니다. 목표를 두면 끝을 보고 마는 성격의 윤태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죠”(허영만)

“좀 허탈했죠. 노숙하는 코 앞에 허 선생님 화실이 있을 줄이야. 그리고 그렇게 거절하다가 마지막으로 갔더니 경리한테 ‘야 얘 좀 자리 하나 줘라’하는 말에, 이렇게 간단하게 멤버가 될 줄이야 하는 생각이었죠”(윤태호)

간신히 발 디딘 31평 은마아파트 화실은 13명의 문하생이 한 집에서 사는 그야말로 인간시장이었다. 그리고 2년, 서너 달 만에 수백편의 습작을 쏟아내는 윤 씨는 ‘내 만화를 하고 싶다’는 일념에 다른 화실로 옮겼고, 하루 2-3시간 밖에 못 자는 지독한 연습벌레가 됐다. 6시 퇴근- 저녁식사- 배경연습- 인물연습- 데생연습- 잠 올때까지 습작과 책읽기를 마치면 어느덧 새벽시간인 날이 부지기수였다. 가끔 화실에서 화투판이 벌어지면 그림밖에 몰랐던 윤 씨는 못마땅한 나머지 미친 척 화투판을 엎기도 했다.


◈ ‘아르마니 옷’입힌다고 다 만화는 아니더라

마침내 93년 내놓은 첫 작품 ‘비상착륙’, 그러나 결과는 처참했다. 한 마디로 ‘그림 과잉’이었던 것이다.

“왜소한 아이에게 비싼 아르마니 옷을 입혀놓은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죠. 너무 창피했습니다. 스토리가 하나도 없었으니깐. 딱 4개월 4회 연재하고, '나는 25살 평생 그림밖에 그릴 줄 몰랐구나'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윤태호)

반성 끝에 다시 시작된 문하생 생활, 소설과 영화서적을 닥치는 대로 섭렵했고, 간신히 한 두 작품씩 잡지연재를 하던 윤 씨에게 또 다른 시련이 찾아왔다.

97년 제정된 청소년보호법으로 18세 이상 만화잡지를 청소년에게 팔면 3천만 원의 벌금을 내는 법이 만들어진 것이다. 많은 서점주들이 18세 이상과 이하 잡지를 구분하기도 번거로워, 아예 만화잡지를 반품하기 시작했고, 이는 곧바로 만화잡지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물론 윤 씨가 연재하던 잡지도 함께 망해버렸다.


◈ 그리고 잠시 찾아온 성공

어둠과도 같던 98년 12월, 한 편집장의 제안으로 시작된 장편현대극 ‘야후’의 대성공으로 윤 씨는 간신히 10년 넘게 이어진 터널을 벗어나는 듯 했다.

수도경비대라는 가상의 특수부대에 들어간 주인공이 아시아나 항공기 추락사고, 서해페리호 침몰사고, 아현동 가스폭발사고,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현장에 연이어 투입됐다가 충격을 받아 대한민국 사회를 위협하는 테러리스트로 변모한다는 내용의 이 만화가 나오자마자 평단의 찬사가 쏟아졌다.

 
“작가로의 자의식을 깨닫는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사건사고들이 과연 개인만의 실수 때문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가 그 정점이었죠. 취재가 되면 될수록 이건 단지 한 개인에 대한 이야기로 끝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02년 월드컵, 즉 가장 해피한 파티를 할 때 가장 처참한 죽음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윤태호)

그러나 2000년대 초반 만화계 불황과 지독한 슬럼프로 윤 씨는 3년 가까이 작품활동을 접었고, 간신히 학습만화에 그림을 그려주며 연명하는 초라한 한 때를 겪어야 했다. 만화가로의 자존심을 챙길 경황이 아니었다.

3년이면 만화세대가 바뀌고, 한 작가가 잊혀지기는 충분한 시간. 어느 누구도 윤태호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본인 말로도 ‘이렇게 안 풀릴 줄은 몰랐다’는 어두운 때, 윤태호는 실력은 있지만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만화가가 되었다. 그리고 2006년 마지막 기회가 찾아왔다.


◈ 웹툰, 그리고 부활

인터넷 웹툰이 활성화되면서 새로운 시장이 열린 것이다. 동료작가인 강풀과 강도하는 계속해서 윤태호를 웹툰으로 끌어들이려 애를 썼다. 하지만 20년 가까이 원고지생활을 해온 만화가에겐 웹툰은 적응조차 쉽지 않은 새로운 시련이었다. 초심으로 돌아가 귀동냥, 눈동냥으로 여기저기서 컴퓨터 만화기법을 배웠고, 그리고 몇 년 만에 내놓은 작품이 본격 장편스릴러물 ‘이끼’였다.

“최홍만이 씨름하다가 격투기 간 것하고 똑같은 셈이다. 같이 그림을 그린다는 점은 같지만 운동하는 태도, 자세, 마인드 들이 다 달라져야 하니까요”(윤태호)

첫 연재한 매체가 또 망하면서 자칫 잊혀질뻔 한 이 작품은 다시 한 포털에서 연재가 재개되면서 현재 ‘이 시대 최고의 작품’이라는 찬사가 쏟아지고 있다.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주제를 놓고 한 농촌에서 벌어지는 본격 스릴러물로 섬세한 심리와 빛, 색의 묘사가 일품인 작품이다. '인과응보'란 주제는, 과거의 충실한 노력이 이제서야 빛을 발하게 되는 윤 씨의 인생과도 일맥상통한다.

동료 만화가 강도하씨는 “태호는 자존심이 세고 자기 작품에 자긍심이 대단하지만 특히 대중에 대한 양보가 없다”며 “최근의 ‘이끼’도 여전히 양보 없는 작품이지만 대중들이 드디어 태호와 태호의 작품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는 점에서 예전과 다르다”고 평했다.

이번 작품에 대해 만화지망생들도 입을 모아 ‘본받고 싶은 작품’이라고 말한다.

“탁월하다. 흥미를 이끌어가는 스토리구성을 정말 본받고 싶다”(인덕대 만화애니메이션학과 1학년 김용현)

“윤태호의 그림은 구체적이면서도 어렵지 않다. 그림을 배우는 학생으로서 따라 그리고 싶은 그림이다”(같은대학 1학년 이준모)

“어릴 적 주로 일본만화를 따라 그렸는데 그러다 보니 일본 그림체가 많았다. 하지만 윤태호 작가는 일본체가 없다. 자신만의 특유한 그림체가 있다는 것에서 윤태호 작가의 대단함을 느낀다”(같은대학 1학년 최규석)

상복도 이제서야 터져, 이 작품으로 윤 씨는 2007 대한민국 만화대상 우수상과, 2008 부천만화상 일반만화상도 거머쥘 수 있었고, 지난해 말 한 영화기획사와 영화화하기로 최종 계약까지 맺었다.

특히 ‘이끼’는 악플이 달리지 않는 만화로도 유명하다. 워낙 높은 작화와 스토리 수준 덕분에 악플이 찾아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데뷔 20년차의 중견작가인데도 워낙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탓에 ‘참신한 신인’이 등장했다고 뒤늦게(?) 놀라는 독자들도 있다.

“연재하고 나서 한 때 없어졌던 제 이름이 다시 생긴 겁니다. 지금 새로운 독자층한테 저라는 사람이 새로 발견이 됐다고 할까요. 마치 최근 아이들이 예전 서태지음악을 우연히 듣고, '이 음악 괜찮은데 이 사람 음악도 들어보세요’하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어린친구들은 아예 저란 사람을 모르고 자랐을 테니깐 당연한 일이다”(윤태호)

평론가와 교수들이 탁월한 이야기꾼이라고 입을 모아 말하는 윤태호, 하지만 정작 본인은 모든 것을 ‘운’일 뿐이었다고 낮춰 말한다.

“운이 좋았다. 굉장히. 항상 도와주는 사람이 있었고, 옆에서 지지해주는 사람이 있었고, 훌륭한 스승이 있었고, 또 자존심을 지켜주는 친구들이 있었고. 단지 노력으로만 보자면 저보다 많이 한 사람들이 많다”

아직도 이야기에 목말라 있다는 윤태호 작가, 그에게는 인생의 좌절과 시련마저도 하나의 풀어내야할 담담한 이야기일 뿐이다.

[CBS노컷뉴스 신년기획-당신이 희망입니다 ③]

[CBS사회부 강현석/박중석 기자]

wicked@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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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seokhwan

만화평론가 박석환 홈페이지. 만화 이론과 비평, 웹툰 리뷰, 인터뷰, 보도자료 등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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