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만화정전 연재를 시작하며]
만화 정전(正典)의 필요성
한국만화는 100살이 됐다
2009년 6월 2일 만화계는 한국만화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며 다양한 행사를 진행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을 통째로 빌려 한국만화의 역사와 현재를 조망하는 전시회를 개최했고 각 분야의 VIP들이 대거 참석한 개막행사와 세미나를 진행했다. 회화와 문학의 서자 취급을 받았던 시절이 분명했지만 그 날만은 국립현대미술관이 ‘국립현대만화관’이었다. 그간 한국만화계는 프랑스 이론가의 말을 따서 선점하듯 만화가 ‘제9의 예술(연극, 회화, 무용, 건축, 문학, 음악, 영화, 사진 순)’이라고 주장하기도 했고, 만화왕국 일본이나 허리우드를 강타한 미국만화의 사례를 들어 만화가 뉴미디어시대의 원천 콘텐츠 산업이라고 우겨보기도 했다. 하지만 돌아서면 ‘만화는 여전히 만화일 뿐’이었다. ‘만화’라는 용어에 갇힌 부정적 인식은 언제나 ‘만화’를 통해 얻은 긍정적 요소를 이겨내지 못했다. 그즈음 만화는 100살이 됐다.
[그림 1] 한국만화100주년 공식 엠블렘, 한국만화100주년위원회 http://blog.naver.com/cartoon_100
2011년 대한출판협회의 출판 통계 기준 신간 만화책의 발행 종수는 6,433종, 부수로는 9,163,358권이 발간됐다. 2010년 한국콘텐츠진흥원의 만화산업통계 기준 매출액은 7,419억원(미화 6억5천6백만 달러), 종사자 수는 1만779명이다. 세계 제일의 만화대국 일본(19억2천1백만 달러) 다음으로 큰, 미국시장(6억5천1백만 달러)과 비슷한 매출 규모이다. 출판만화 시장이 불황이라고는 하지만 오락만화의 위축일 뿐 교양만화가 기존 시장을 유지하고 있고 오락성 출판만화의 대안으로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웹툰이 시장의 외연을 확대해가고 있다. 하지만 세상의 인심은 ‘폭력웹툰’이라는 이름으로 다시한번 성장세에 있는 만화의 키를 주저 앉히려했다. 그러자 풍선효과가 발생했다. 웹툰은 책상 위 모니터를 벗어나서 손 안의 스마트폰으로 진출했고 더 큰 기대감을 주고 있다. 그 때 만화는 100살이 됐다.
[그림 2] 청소년유해매체물 지정 반대 공식 엠블렘, 웹툰비상대책위원회 http://nocut_toon.blog.me/
만화는 왜 만화라는 통칭으로 이해될까
단순한 것, 과장된 것, 해학적인 것이라는 만화의 미학적 요소와 특징은 어떤 불가능도 없는 표현언어이자 기술이다. 하지만 세상의 인심은 만화에 대해 ‘단순해서 아이들이나 보는 것이라 했고, 만화가는 과장된 백일몽을 만드는 사람이라 했다. 그래서 만화는 웃기는 것이 되어 버렸다.’ 아이들이 보는 것도, 백일몽을 만드는 사람도, 그래서 웃기는 것도 그 나름의 가치와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만화는 각 작품이 지닌 개별적 가치와 의미로 평가받기보다는 만화라는 한 덩어리로 싸잡아서 평가되고는 했다. 특히 특정 만화작품이 사회적 문제와 맞물리는 순간 해당 작품이 아닌 만화 전체가 문제 시 됐다. 다양한 만화작품이 쌓은 공든 탑이 비정상적 만화 작품으로 인해 무너져버리는 일이 수차례 반복 됐고 만화의 성장은 억제됐다. 우리 사회가 품을 수 있는 만화의 크기는 딱 이만한 것 아닐까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이제 만화는 100살이 넘었다.
[그림 3] 만화가 미풍양속을 저해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한 기사, 매일경제신문 1991.08.07.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1080700099210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91-08-07&officeId=00009&pageNo=10&printNo=7870&publishType=00020
그런데 만화는 여전히 만화 또는 웹툰으로 통칭된다. 100가지 만화가 있으면 100가지 작품이 있고 100가지 가치와 의미가 있는 것인데 만화는 그저 만화일 뿐이다. 만화라는 장르 아래만 하더라도 경우에 따라서 100가지 하부 장르가 나뉠 수 있는데 여전히 만화라는 이름으로 ‘퉁’ 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아직 우리 만화를, 한국만화의 개별적인 작품들을 잘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수없이 많은 만화를 봤을 테지만, 한 때의 추억이나 흐릿한 기억으로 지니고 있을 뿐 문학이나 미술작품처럼 특정한 제목을 기억하지 못한다. 학생이나 일반인이나 시간 날 때마다 봐야한다는 세계문학전집이있고 교양인이라면 죽기 전에 꼭 봐야할 영화나 미술작품이 있다. 이런 작품들은 일생동안 반복적으로 노출되고 사람들 사이에서 학습된다. 찾아서 보기도 하지만 눈에 띄어서 자연스럽게 익숙해지기도 한다. 그러는 사이 그 소설과 회화는 문학이나 미술로 통칭되지 않고 독립적인 작품으로서 이름을 지니게 됐을 것이다.
만화정전, 만화를 작품 제목으로 기억되게 할 것
지금 100살이 넘은 만화도, 한국만화로 통칭되는 만화도 독립적인 작품으로서 이름을 지녀야 하지 않을까. 특정 시대를 상징하고 그 시기의 문예사조와 발전적 시도를 담고 있는 작품이라면, 시대와 시대 간의 위계를 가늠할 수 있으면서 역사성과 함께 보편적 재미와 감동을 주는 작품이라면, 그 작품이 곧 한국만화를 대표하는 정전(正典)이 되어야 할 것이다. 만화라는 통칭이 아닌 작품 제목만으로 대중에게 기억되어 지속적으로 읽히고, 만화사에 기록되어 만화의 진화과정을 증명하고 학습될 수 있는 보편적 체계로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그림 4] 만화 르네상스시대 연 걸작들, 한겨레, 1999.11.22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9111200289121001&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9-11-12&officeId=00028&pageNo=21&printNo=3657&publishType=00010
이 기획은 이 같은 고민 하에 촉발됐다. 1차적 고민은 한국만화100주년준비위원회의 자료연구분과 활동 중 진행됐다. 그 후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의 기념전시였던 ‘만화 100년을 기다리는 99년 전’,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의 만화 100주년 기념전시인 ‘만화만화’전 그리고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이 서울신문과 함께 진행한 ‘한국만화 명작 100선’ 등의 사례를 검토하면서 2차적 고민을 진행했다. 이를 바탕으로 100년이 넘은 한국만화의 역사를 일별하고 시기별로 주요한 의미와 가치를 지닌 작품을 선정해서 ‘한국만화의 정전’ 111편을 꼽기로 했다. 선정 범위 및 집필 방법은 다음과 같다.
[그림 5, 6] 서울신문,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선정 한국만화명작100선 관련 작품, 2012.04.23.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20423016017
첫째, 선정 범위는 만화100년의 출발점인 이도영의 ‘삽화’가 발표된 1909년부터로 한다.
둘째, 100년이 넘었음으로 2012년 현재까지를 대상으로 한다.
셋째, 매 10년을 시대 구분점으로 10개의 시대로 나누되 만화사적 변화에 집중하고 이를 조망한다.
넷째, 앞선 사례를 참조하여 111편의 작품을 선정하되 작가의 중복은 피하고 관련 작품을 함께 소개한다.
다섯째, 선정된 작품은 어떤 방식으로든 열람할 수 있는 것으로 하며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자, 이제 1909년으로 가서 한국만화의 탄생부터 목격해보자.
박석환/ 만화평론가,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전략기획팀 부장
세종대학교 대학원 만화애니메이션학과 박사과정에 있고 스포츠서울 신춘문예에 만화평론이 당선된 후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만화비평서 <만화시비탕탕탕>, <코믹스만화의 세계>가 있고 만화이론서 <디지털만화 비즈니스-잘가라 종이만화>, <만화리뷰쓰기> 등이 있다. 공저로는 <만화>, <한국의 만화가 1, 2> 등이 있다. 블로그는 http://blog.naver.com/comicspam 이다.
** 이 글은 '네이버캐스트 - 만화대백과 - 한국만화정전' 집필에 앞서 작성한 것으로 10월 11일 시작한 기획 리뷰의 여느 글이다.
http://navercast.naver.com/list.nhn?category_id=196&category_type=se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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