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사회 이끈 명랑만화가
길 창 덕
1930. 1. 10 ~ 2010. 1. 30
길창덕은 한국형 명랑만화의 개척자이자 후학들과 함께 새로운 명랑만화문법을 지속적으로 개발해왔던 창안자였다. 70년대를 대표하는 인기만화가였던 길창덕은 꺼벙이 재동이 만복이 쭉쟁이 덜렁이 딸딸이 등 당대 아이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다양한 성격을 중심으로 만화주인공을 만들어냈고 50여 년간 창작활동을 했다. 일상의 이야기에 만화적 상상력과 해학을 가미한 작품으로 독자들에게 소박한 깨달음을 주었던 길창덕은 지난 2010년 1월 30일 81세의 삶을 마감했다.
육군하사로 안장된 만화가 길창덕
1930년 1월 30일 평안북도 선천군에서 태어난 길창덕은 15살 때 주변의 요청으로 상점에 내 걸 풍경화 등을 그리며 그림과 인연을 맺었다. 고교 졸업 후 역무원으로 근무하던 길창덕은 한국전쟁이 터지자 22살 때 월남했다. 육군 참전용사가 된 길창덕은 1953년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군 복무 중 신병 훈련 교재를 만화로 그린 것이 계기가 되어 제대 후 만화가의 길을 걷게 된다.
1955년 서울신문에 ‘머지않은 미래의 남녀상’이라는 한 컷 만화 등을 게재했고 1956년 <야담과 실화>라는 잡지에 ‘허서방’을 게재하면서 본격적인 직업 만화가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 1966년 <소년한국일보>에 연재를 시작한 ‘재동이’, 1970년 <만화왕국> <소년중앙>에 연재한 ‘꺼벙이’, 같은 해 <여성중앙>에 연재한 ‘순악질 여사’ 등 10여 년 이상을 연재한 인기 만화와 장수 캐릭터를 여럿 만들어냈다. 어린이들은 ‘꺼벙이’의 일상에 즐거워했고 어른들은 ‘순악질여사’의 기지에 통쾌해했다. 이처럼 길창덕은 동시대에 어린이부터 성인까지 전 연령대의 독자들과 함께 했던 행복한 만화가였다. 한번에 25곳에 연재를 할 정도로 살인적인 마감일정에 시달리면서도 특유의 유쾌함을 놓지 않았다. 평소 ‘내가 만화를 그린 것이 아니라 담배가 만화를 그렸다’고 할 정도로 흡연을 즐겼던 길창덕은 하루 다섯 갑씩 피웠던 담배로 인해 1997년 폐암 말기 판정을 받고 일선에서 물러났다. 길창덕은 2003년 그 간의 만화창작 활동이 ‘국민문화발전’에 기여했다는 점을 인정받아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81세의 일기, 남들은 하나 받기도 힘든 훈장을 두 개나 받았으니 ‘가문의 영광’이라며 제자이기도 한 만화가 윤승운은 넉살 좋은 ‘추모사’를 썼으나 행간에는 아쉬운 표정이 역력했다. 그도 그럴 것이 길창덕은 현재 국립대전현충원 묘지번호 제33984호 ‘육군하사 길창덕’이라는 묘비명 아래 안장 되어있다. 고인에게도 가족에게도 영광스러운 일이나 윤승운(1943년 생)이 나이 열아홉 살에 독자편지로 인연을 맺었던 만화우상이자 만화스승이었던 ‘만화가 길창덕’의 이름 앞에 ‘육군하사’라는 계급이 붙어 있었으니 세상이 야속해 보였을 법하다. 젊은 날 화랑으로서 국가를 구한 것은 인정되지만 평생 만화를 그려 국민을 위한 것은 인정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지 않았을까.
꺼벙이와 순악질 여사, 공동체의 규범을 말하다
길창덕의 만화에는 내용적인 측면에서 당대의 감수성이 깊게 자리하고 있었다. 70년 대 군사정부가 주도했던 산업화 정책은 국가를 키우고 국민을 살찌우는 역할을 했지만 정치적 불안은 지속됐고 국민적 피로감과 위기감이 상존했다. 이 시대를 대표했던 길창덕의 만화에는 희망과 불안이 함께했다. 만화평론가 박인하는 길창덕 만화의 감수성을 세 가지로 분석한 바 있다. 요약하자면 ‘핵가족, 골목, 반공’이다. 이를 보완하여 한 단어로 정의하자면 ‘공동체’라 할 수 있다. 길창덕 만화에는 산업화와 농촌 붕괴에 따른 핵가족화 된 도시공동체, 전 국민이 동일한 초등교과 과정(당시에는 초등학교였다)을 의무적으로 받아야 하는 교육공동체, 그리고 북한과 대치 상태에 있는 휴전국가이자 유교적 규범과 도덕관을 유지하고 있는 윤리공동체로서의 기초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길창덕 만화에 담긴 공동체 의식은 당대 사회가 국민에게 요구했던 도덕관과도 일치한다. 미국의 대표적인 신문만화였던 ‘블론디’가 미국 중산층의 풍요로운 삶을 조금은 한심해 보이는 샐러리맨 남편의 모습을 통해 극화하면서 전 세계인에게 미국식 삶을 동경하게 했다면 ‘꺼벙이’는 산업화와 도시화가 동시 진행되고 있던 서울의 일상을 한국 사회에 중계했다. 풍요롭지는 않았으나 도시화된 한국식 중산층의 일상이 꺼벙이를 통해 알려지면서 아이들에게 도시는 곧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농촌과 다른 양옥집과 전봇대로 대표되는 골목, 직장에 다니던 아버지, 서로 다른 계급의 자녀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지만 같은 숙제를 풀어야 하는 학교, 늘 실수하고 사고만 치지만 용서하고 가르침을 주는 어른들이 있는 사회. 당대의 시선으로 아이들에게 ‘꺼벙이네 도시’는 흥미진진한 모험과 도전의 공간이었다. 공동체가 제시하는 규범만 따른다면 누구나 불안을 떨치고 그 도시에서 희망을 얻을 수 있었다.
‘꺼벙이’가 아이들을 위해 아동잡지에 연재했던 명랑만화였다면 길창덕이 같은 시기에 연재한 ‘순악질여사’는 어른들을 위해 여성지에 연재했던 4칸 시사만화였다. 정치풍자를 주 역할로 했던 신문 시사만화와 달리 잡지시사만화는 사회문화적 관심사를 주제로 했다. ‘꺼벙이’와 같은 맥락에서 ‘순악질여사’ 역시 도시에서 직장인 남편과 사는 전업주부이다. 하루 종일 농사일과 가사노동에 시달려야 했던 농촌 여성들과 달리 순악질여사는 가사노동 외에는 일을 하지 않았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것이 아니라 남편의 월급에 맞춰서 한 달을 계획적으로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사회가 됐으니 ‘근검절약’해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유교적 규범을 지키는 한편 ‘허례허식’은 버려야 했다. 또순이, 짠순이를 넘는 강력한 절약정신과 가족 내 대소사에 대한 의식개혁이 필요했다. ‘순악질’은 당대사회가 요구했던 역할모델을 명확하게 수행했다. 당대 최고 여배우였던 장미희가 순악질여사로 분했던 동명의 영화가 제작됐고, 방송인 김미화가 순악질여사로 분한 코미디 프로가 선풍적 인기를 얻으면서 국가 사회가 원했던 규범은 대중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다.
미치고 펄쩍 뛸 일, 명랑한 사회를 만들다
길창덕은 정식 미술수업이나 만화창작수업을 받은바 없이 독학으로 그림과 이야기를 공부했다. 이 때문에 1세대 만화가라 할 수 있는 김용환, 김종래, 박광현 등과 같은 붓과 철필의 화려한 매력을 보여준바 없다. 또한 만화의 서사적 매력 역시 제시한 바 없으니 요즘 만화와도 다르다. 하지만 만화를 만화적이게 하는 전통적인 요소에 있어서 길창덕의 학습력과 창조력은 천부적이었다. 대상의 특징을 간단명료하게 선화로 표현하고 생명과 움직임을 불어 넣기 위한 장치인 동작선과 상징적 기호 체계를 창안하여 능수능란하게 활용했다. 다소 황당한 사건을 만들어 주인공에게 문제를 해결하게 했고 이를 통해 주인공의 성격을 부각시켜 이야기를 주도하게 했다. 독자는 길창덕의 만화에 빠르게 몰입했고 캐릭터 이미지를 오랫동안 기억했다. 만화적 기호가 넘쳐나는 캐릭터 중심의 에피소드형 만화, 이것이 곧 ‘길창덕표 명랑만화’가 지닌 매력이었다.
모든 것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이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내용상으로 길창덕 만화는 당시 정부의 의견을 실어 나르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길창덕 만화가 취하고 있는 내용 전달 형식은 그 시대의 대중이 가졌던 불안과 분노를 그대로 표출하고 있다. 길창덕 만화를 펼치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말 칸이다. 일반적인 말은 동일한 크기의 손글씨나 활자체로 표시되어 있지만 큰소리를 의미할 때는 말 칸 속이나 바깥에 큰 글씨가 표시된다. 만화에서는 이를 효과음이나 효과문자라고 하는데 길창덕의 만화에는 유독 사람의 목소리가 큰 글씨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이와 함께 각종 동작기호들이 사용된다. 무언가 답답하고 억울한 일이 발생했을 때 ‘미치고 펄쩍 뛰겠네’라는 말을 하는데 길창덕 만화에서는 주인공이 시도 때도 없이 미치고 펄쩍 뛴다. 답답해서 펄쩍 뛰고, 억울해서 바닥에 머리를 박고, 눈을 질끈 감고 소리 질러 항변하기도 한다. 이런 식이다. 꺼벙이가 물건을 산다. 어린이라고 비싸게 파는 것 아니냐며 ‘깍아줘요’라고 방방 뜨면 주인아저씨는 그게 아니라며 온 몸을 떨면서 ‘안돼!!’라고 큰 소리로 이야기한다. 말과 몸으로만 표현해서는 도무지 진실이 전달되지 않을 것 같았던 그 시대의 이야기들, 글과 그림으로 밖에 말할 수 없는 만화의 조건들을 길창덕은 이렇게 과장된 방법을 동원하여 넘어섰다.
단순, 과장, 풍자의 미학이라고 할 수 있는 만화는 이 3요소를 문자 그대로 사용했던 이들에 의해 전형화 됐다. 길창덕의 앞에는 김기율, 신동헌 등이 있었고 그의 뒤로는 신문수, 윤승운 등이 있었다. 모든 것이 조금씩 과장되어 전달되던 시대, 과장해서 표현하지 않으면 믿으려 하지 않았던 저 70년대는 그렇게 명랑만화의 전성시대를 만들었다. 도시화와 고속성장의 그늘 아래서 암울한 정치적 상황과 경제적 불안을 감내해야 했던 대중은 웃음으로 명랑사회에 동참했었다. 그러나 80년대 이후 민주화 과정을 겪으면서 정치적 변혁기가 오자 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철저한 검증과 사실이 우리 사회의 새로운 키워드가 됐다. 만화 역시 명랑체의 반대편에서 사실적 묘사를 중심으로 했던 극화체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른바 극화의 시대가 열리면서 명랑만화는 70년대의 상징이자 추억으로 잊혀졌고 길창덕의 시대 역시 저물었다. 그러나 과장의 미학, 명랑의 풍자정신은 정치적 현실과 시대의 요구에 따라 언제고 다시 돌아온다. 2012년 1월 30일, 돌아가신지 2주기 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가 벌써 기억되는 이유이다.(끝)
■ 작가연보
1930년 평안북도 선천 출생(일부자료에는 음력을 기준으로 1929년으로 표기)
1950년 한국전쟁으로 월남
1953년 화랑무공훈장 수훈(6.25 참전용사)
1955년 <서울신문>에 한 컷 만화 게재
1956년 월간 <실화>에 ‘허서방’ 연재하며 공식 데뷔
1973년 <중앙일보> 편집위원으로 입사
1974년 서울시 어린이 애호 공로상 수상
1980년 <순악질 여사> 영화로 제작, 국도극장에서 개봉
1981년 색동회상 수상
1997년 건강악화로 모든 작품 활동 종료
2001년 정보통신부 만화우표 시리즈 ‘꺼벙이’ 우표 발행
2002년 대한민국출판만화대상 공로상 수상
젊은만화작가모임(이현세 외 150명) 황금펜촉상 수상
2003년 보관문화훈장 수훈
2006년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SICAF) 만화부분 공로상 수상
2009년 한국만화100주년위원회 고문
2010년 1월 30일 향년 81세로 별세
■ 주요작품연보
1955년 <서울신문>에 한 컷 만화 ‘머지않은 장래의 남녀상’ 등 게재
1956년 월간 <실화>에 ‘허서방’ 연재
1959년 월간 <아리랑>에 ‘홀쭉이와 뚱뚱이’ 연재
1966년 <소년한국일보>에 ‘재동이’ 연재(13년 간)
1970년 월간 <만화왕국>, 월간 <소년중앙>에 ‘꺼벙이’ 연재(각각 2년, 4년 간)
1970년 월간 <여성중앙>에 ‘순악질 여사’ 연재(18년 간)
1973년 <중앙일보>에 ‘나원참 여사’연재
1975년 월간 <새소년>에 ‘신판 보물섬’ 연재
1977년 월간 <새소년> 부록으로 ‘선달이 여행기’ 연재
1977년 월간 <소년중앙>에 ‘쭉쟁이’ 연재
1980년 <소설문학>에 ‘순악질 선생’ 연재
1980년 <주부생활>에 ‘순악질 남편’ 연재
1982년 <보물섬>에 ‘고집세’ 연재
1985년 <자연과 어린이>에 ‘점쟁이’ 연재
1986년 <수험생활>에 ‘관철이’ 연재
1987년 <소년중앙>에 ‘코메디 홍길동’ 연재
1989년 <민주일보>에 ‘순악질 여사’ 연재
1994년 <꺼벙이 만화일기> 발행
1995년 <재동이 만화일기> 발행
1997년 <내친구 쭉쟁이> <내친구 만복이> 발행
2001년 <꺼벙이> 발행
2010년 <신판 보물섬> 발행
■ 길창덕 관련 링크
길창덕 위키백과
http://ko.wikipedia.org/wiki/%EA%B8%B8%EC%B0%BD%EB%8D%95
판다로의 ‘꺼벙이전’ 전시 리뷰
http://pandaro.egloos.com/6864474
열이아빠가 운영하는 길창덕 팬카페
http://blog.naver.com/elwkdls16/50081741481
장서인을 제작하는 연각재님의 추모사
http://blog.naver.com/elwkdls16/50081741481
네이버 만화의 릴레이 추모 웹툰
http://comic.naver.com/webtoon/list.nhn?titleId=132459
■ 길창덕 작품 정보 제공
한국만화영상진흥원, 디지털만화규장각 www.kcomics.net
글 박석환 / 만화평론가
1997년 스포츠서울 신춘문예에 만화평론으로 등단 후 <잘가라 종이만화> <코믹스만화의 세계> <만화리뷰쓰기> 등 만화평론서를 다수 집필했다. 현재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전략기획팀장으로 한국만화의 디지털화와 글로벌화를 위해 일하고 있다.
홈페이지 www.parkseokhwan.com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7378
글에 남긴 여러분의 의견은 개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