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광화문의 교보문고 입구를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오른쪽의 도서진열대는 카툰 판매대다.
지난해 가을부터 굳건히 이 명당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카툰 책들은 ‘파페포포 메모리즈’ ‘스노우캣’ ‘순정만화’ ‘마린블루스’ 등 대부분 인기가 높았던 인터넷 만화가 모태가 되어 만들어진 것들. 요즘도 하루에 한두 종씩 인터넷 만화를 종이로 옮긴 책들이 계속 나오고 있는 추세다.
또 지난해 말 문예진흥원이 선정한 ‘올해의 예술상’ 독립예술분야의 최우수상 수상작은 독립만화 웹사이트인 ‘악진’이었으며, 만화가 양영순 씨 등 오프라인에서 활동해온 기성 만화가들도 인터넷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대중문화의 각 장르 가운데 시들어가던 도중 인터넷을 통해 새 생명을 부여받은 장르는 만화뿐이다. 인터넷의 어떤 면이 만화의 부활을 가능하게 했을까.
○ 새로운 만화언어
인터넷 포털 사이트 ‘파란’에 만화가 양영순 씨가 연재하는 ‘1001’은 하루 평균 30만 명이 보는 인기만화. 양 씨는 인터넷 만화의 장점으로 형식의 제약에서 자유롭다는 점을 꼽았다. 그 점에서 “‘1세대 인터넷 만화가’로 꼽히는 강도영 씨 (필명 강풀)가 칸의 구분을 없애는 등 실험적 시도로 ‘무한 캔버스’인 인터넷의 장점을 극대화한 만화 형식의 개발에 기여했다”는 설명이다.
대개의 인터넷 만화들은 짧은 호흡으로 끊어지는 에피소드 위주로 구성되지만, 구성력이 탄탄한 작가들의 경우 오프라인의 서사만화에서나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다소 긴 호흡의 만화들도 선보이고 있다.
세로로 기다란 이들의 만화는 대개 컴퓨터 화면의 스크롤바를 내려서 보도록 되어 있는데 이 같은 방식은 만화에 동영상과 같은 느낌을 얹어준다. ‘1001’에서 깊은 동굴 속, 바다 깊은 곳으로 카메라가 내려가는 듯한 느낌, 강풀의 ‘순정만화 시즌2-바보’에서 고드름의 물방울이 바보의 앞으로 떨어지면서 바보 눈에 눈물이 맺힌 것 같은 효과 등은 세로 스크롤링 방식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양 씨는 “그림들이 칸 안에 빽빽하게 들어차지 않고 그림과 그림 사이에 생각할 수 있는 여백이 있으며 이를 스크롤로 아래로 쭉 내려가며 보는 방식이 오프라인 만화보다 인터넷 만화에 감정이입을 더 빠르게 하는 것 같다”고 했다.
세로로 내려가다 보니 어떤 경우엔 한 화면 가득 대사를 담은 말 풍선만 모여 있게 되는 경우도 생기지만, 이는 오히려 “이미지로서의 글자를 재발견할 수 있는 계기”(만화평론가 박석환 씨)가 된다.
○ 인터넷 만화의 대표 주자들
인터넷에서 만화가 각광받게 된 가장 중요한 계기는 누리꾼들의 ‘펌질’(그림이나 글을 다른 홈페이지로 퍼나르는 행위) 때문이다.
‘다음’의 조희제 검색분석실장은 “검색의 트렌드로만 보면 강풀의 ‘순정만화’처럼 정통만화류와 ‘츄리닝소녀 챠챠’ ‘와탕카’처럼 블로그 유머란에 게시하기 좋은 엽기적이고 가벼운 만화들의 두 방향으로 나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인터넷 만화의 선구자 격인 작품은 1997년부터 권윤주 씨가 개인 홈페이지에 연재한 ‘스노우캣’. 달력 형식의 홈페이지에 일기체 만화를 올려 이전에 한번도 시도되지 않았던 인터넷 만화 연재의 형식을 보여준 작품이다.
‘스노우캣’에 이어 ‘파페포포’도 감성적 글과 만화가 결합한 에세이 형식. 무언가를 생각하게 하고 읽는 이에게 물어보는 듯한 결론으로 끝맺는 이들 작품에 댓글이 무수히 달리고 펌질이 왕성하게 시작되면서 인터넷 만화의 붐은 ‘마린 블루스’ ‘순정만화’ 등으로 이어졌다.
요즘의 추세는 어떤가. 만화평론가 박석환 씨에게 현재 연재되는 인터넷 만화 가운데 ‘베스트 3’을 꼽아달라고 부탁했다.
그가 꼽은 ‘베스트 3’은 양영순의 ‘1001’, ‘다음’에 연재되는 강풀의 ‘순정만화 시즌2-바보’, ‘엠파스’에 연재 중인 강도하의 ‘위대한 캣츠비’였다.
‘1001’은 인터넷에서 서사만화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작품이며 ‘위대한 캣츠비’는 뛰어난 데생력과 감각적 색상으로 인터넷 만화에서 장면연출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고, ‘순정만화 시즌2-바보’는 단편소설을 연상시키는 이야기 전개력이 누구보다 뛰어나다는 것이 선정의 이유.
7, 8년 전 ‘스노우캣’ ‘파페포포’등 짤막하고 감성적인 웹카툰으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인터넷 만화가 이제는 장편의 서사를 엮어낼 정도로 발전하게 된 셈이다.
박 씨는 “수익구조에 아직 문제가 많지만 독립적 예술가들이 그 수용자들과 직접 만나고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다는 인터넷의 비전이 가장 잘 구현된 장르가 만화”라고 말했다.
만화가가 되려고 420여 곳에 이력서와 작품을 보내 봐도 길이 뚫리질 않자 인터넷에 개인 사이트를 만들어 작품을 올리기 시작하고 누리꾼의 폭발적 반응을 얻게 된 강풀이 그 대표적 케이스다. ‘다음’에 연재됐던 그의 ‘순정만화 1탄’은 총 조회수 3200만, 하루 평균 조회수 200만을 기록했고 영화 제작도 준비되고 있는 중이다. ‘언더그라운드(Underground)’의 애달픈 꿈이 인터넷을 만나 ‘온 더 그라운드 (On the ground)’하게 된 셈이다.
김희경 기자 susanna@donga.com
글에 남긴 여러분의 의견은 개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