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후의 훈이와 깡통로봇
이순신 장군처럼 투구를 쓴 로봇. 태권도가 주무기인 로봇. 태권도 세계 챔피언의 조종에 따라 붉은 제국의 괴로봇과 싸워서 지구를 지켰던 로봇. 30년이 훌쩍 넘은 그때 그 시절의 로봇과 주인공들은 지금 어떻게 됐을까. 그간 어떻게 살아왔을까.
신예 만화가 김태건과 시나리오 작가 양우석이 태권브이와 주인공들의 후일담을 올 컬러 만화로 그려냈다. 남자 주인공 김훈은 50대의 무능한 샐러리맨이 됐고 생기발랄하던 여자 주인공 영희는 염치없는 아줌마가 됐다. 틈만 나면 주전자를 뒤집어쓰고 깡통로봇으로 변신했던 철이는 성공한 천재 과학자가 됐다.
이들의 이야기는 한동안 만나지 못했던 훈이와 철이가 재회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철이가 새로 만든 태권브이는 예전보다 한층 멋스러워졌지만 이를 조종해야 할 사람은 영웅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평범하게 늙었다. 하지만 작품은 이 같은 파격적 인물 설정의 이유를 꼼꼼하고 세심하게 짚어가면서 전편보다 강렬한 액션과 밀도 있는 서사를 담아내는 데 성공한다.
이 작품은 포털 사이트 다음에 ‘브이’라는 제목으로 공개됐던 4부작 단편을 원안으로 하고 있다. 제피가루라는 필명으로 인터넷에서 활동하던 작가는 태권브이가 활약했던 시기의 혼란스러웠던 정치적 상황을 바탕으로 군사정권에 의해 침몰해 가는 태권브이와 훈이의 모습을 그려낸다. 공상 속 로봇을 역사적 사건의 피해자로 부각시킨 설정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연재 기간 중 편당 100만 건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하며 진보 보수 간 논쟁이 붙기도 했다.
태권브이가 처음 등장한 1976년은 동서냉전과 남북한 대립, 그리고 군사정권에 의한 정치적 혼란이 지속되던 시절이다. 지구 평화를 지키는 데 성공한 태권브이와 훈이 일행은 당연히 ‘카퍼레이드’를 펼치며 금의환향했을 것이고 개발 독재 시기의 군사정권은 이를 정권 홍보에 적극 활용했을 만하다. 시위 현장에 투입되기도 하고, 강제로 군에 입대되기도 하는 등 정치적 혼란기에 ‘영웅’으로 살아야 했던 이들의 몰락은 당연한 결과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쯤에서 이야기가 정리됐다면 그만한 흥분과 감동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범작에 머물렀을 것이다. 이야기는 제2의 카프로 설정된 철이와 훈이의 대립, 그리고 세계적 전투 무기 개발업체가 다시 살려낸 괴로봇과 로봇 태권브이의 대립으로 확산되면서 색다른 흥분을 이끌어낸다. 또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이념보다 숭고한 가치, 근원적 가치에 충실해야 한다는 영웅의 달라진 신념도 소중하게 들린다. 매력적인 결말이다. 태권브이는 한층 현실적으로 바뀌었고 한국적 상상력이 더욱 강해졌다. 그야말로 우리 만화 애니메이션계를 대표하는 프랜차이즈 스타가 된 셈이다.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
박석환의 만화방, 동아일보, 2008. 0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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