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사랑한 400명의 여인들
그녀들을 쫓는 연쇄살인범
‘레인보우 체이서’는 연쇄살인 사건을 배경으로 한 미스터리물이다. 살해된 채 발견되는 미녀, 사건 담당 강력반, 범죄심리 전문 여형사, 사건에 연루된 정치인과 정신과 의사 등이 등장하는 전형적인 심리수사극이다. 극의 중심에는 무지개 추적자라는 별칭을 지닌 28세의 남자 주인공 이영희가 있다.
이영희가 쫓는 무지개는 여자다. 특별한 직업도 없지만 멋진 옷에 스포츠카를 타고 다니고 풍부한 인문지식과 문학적 감수성이 넘쳐 난다. 세련된 매너와 적당한 싸움 실력, 그림과 사진은 전문가 수준이고 정신분석과 색채심리학에도 일가견이 있다. 남자가 여성의 호감을 얻고 싶을 때 아쉬웠던 모든 것을 갖췄다. 심지어 여자에게서 용돈을 받기도 한다.
그런데 누구도 이 남자를 바람둥이, 제비족으로 보지 않는다. 이영희가 나의 꿈은 1000가지 색을 수집하는 것이고 그만큼의 개성을 지닌 여성 1000명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해도 상대는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는다. 수많은 미소녀가 별 볼일 없는 남학생을 사랑하게 된다는 속칭 ‘하렘(harem)물’의 성인판이다.
이야기는 국회의원 K의 여성 보좌관 살해 사건에서 시작된다. 피살자는 주인공의 383번째 사랑이다. 384번째 여성과 사랑을 나누던 중 살해 용의자로 체포된다. 무혐의로 풀려나지만 곧이어 이 여성도 살해된다. 그 사이 정신과 의사의 부인인 385번째 여성을 만나고 성폭행 사건에 연루돼 386번째가 되는 여형사를 만난다.
‘착한 소녀’라는 이름의 연쇄살인범은 주인공의 엽기적 애정행각을 투서 형식으로 경찰에 알리면서 ‘이영희 리스트’의 여성을 한 명씩 살해해 간다. 작품의 부제는 ‘400번째 여자’다. 1000명 목표에는 못 미치지만 앞으로도 이영희가 새롭게 만날 여성이 더 있는 모양이다. 리스트에 있는 사람 중 다음에 살해될 사람이 누구인지도 찾아야 한다. 여형사는 이영희가 성(性)에 눈을 뜨기 시작한 유년기부터 최근까지의 여자관계를 추적한다. 그 안에서 연애심리와 정신분석학에 대한 기초 상식을 챙기는 것은 독자의 몫이겠다.
김세영은 허영만의 스토리작가로 더 유명하다. 이 작품은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홀로서기를 선언하면서 발표됐다. 아름답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을 용서받을 수 있고 쉽게 만나서 쉽게 헤어지는 ‘쿨’한 연애 드라마처럼 우리네 연애풍속과 인간관계도 달라진 눈치다. 그래서인지 사건, 사고도 많다. 작가는 이영희를 통해 이 시대의 연애관에 동의를 표하는 것일까? 아니면 연쇄살인마를 통해 경고를 보내는 것일까? 모처럼 성인만화를 통해 느껴 보는 몰입의 즐거움이다.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주)시공사 콘텐츠연구실장)
http://www.parkseokhwan.com
동아일보, 박석환의 만화방, 2007. 07. 07
글에 남긴 여러분의 의견은 개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