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환, 홍지흔의 한걸음 더, 컬쳐뉴스, 2007.06.12


가족을 위한 희생적 여성 이데올로기의 변주


홍지흔, 한걸음 더, 도서출판 허브


가족구성이 구성원의 성격에 영향을 미칠까?

아내와 함께, 두 아이와 함께 집 앞 공원을 걷는다. 한가로운 정오, 따스한 햇살이 있어서 좋다. 얼핏 비슷비슷해 보이는 사람들 끼리 뭉쳐있다. 누가 봐도 ‘저렇게 한 가족, 요렇게 한 가족이다’ 할 것처럼 닮았다. 나를 닮은 내가족과 함께 있으니 남의 가족이고 낯모르는 사람들인데도 왠지 같아 보이고 친근해 보인다.

좋은 날이다. 그런데 아내는 그들 곁을 지나면서 들릴 듯 말 듯 한탄을 연발한다. 아이들의 키순서로 첫째, 둘째, 셋째(넷째까지 가는 경우도 있었다)를 규정하고 아빠, 엄마, 아이들이 어떤 대열로 걸어가는지를 유형별로 구분한다. 그리고 다른 가족의 산책 대열과 비교하면서 분석평을 토해낸다. 그러고 보니 가족의 성비와 명수에 따라서 그 가족의 외형이 달라 보였다. 걷는 것도 노는 것도 달랐다. 준비해온 나들이용품도 달랐고 옷차림과 표정도 달랐다.

아빠랑 아이는 멋지게 꾸몄는데 엄마는 집에서 입는 옷에 짐 보따리를 들고 나온 가족도 있고, 아빠는 삶의 무게를 잔뜩 진 어깨를 하고 있는데 엄마와 아이들은 건강하다 못해 비만해 보이는 가족도 있다. 반면 선글라스 쓴 엄마와 책 한권 손에든 아이가 전부인 가족도 있다. 이쯤 되면 가족구성이 가족나들이의 외형적 요소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고 봐야겠다. 그리고 가족구성은 구성원의 성격에도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이다.

딸 둘에 아들 하나, 희생적 여성 이데올로기

신예 만화가 홍지흔의 <한걸음 더>는 딸 둘, 아들 하나를 둔 가족 이야기이다. 가족구성이 구성원의 성격에 영향을 미친다고 전제하면 딸 둘, 아들 하나인 가족은 쉽게 분석된다. 아들 하나 낳자고, 낳고 낳기를 반복하다 막내아들 하나를 건진 경우이다. 큰딸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성숙한 사고로 엄마 보조 역할을 수행하고, 작은딸은 누구도 신경 쓰지 않게 혼자 노는 방법을 터득한다. 그리고 막내아들은 온 가족의 염원과 성원 속에 말썽과 어리광을 번갈아 피운다. 특별한 외부 조건이 없는 한 이 구성의 가족은 그렇게 자란다.

70년대 생들이 성장기를 보낸 80년대만 하더라도 이런 가족은 많았다. 그리고 이런 구성의 가족 이야기도 많았다. 주변 인물로는 아들을 선호하는 고리타분한 할아버지 또는 엄마를 극심하게 핍박하는 할머니가 등장한다. 거기에 순풍순풍 아들만 낳아대는 이웃집 아낙이나 얄미운 고모가 등장하기도 한다. 서사 요소 역시 익숙하게 떠오른다. 두 딸은 안중에 없는 가족, 아들 못 낳는 엄마로 인한 고부간 갈등, 바람 좀 쐬는 무책임한 아빠와 내연 여, 어떻게 낳아서 기른 자식인줄도 모르고 동네 양아치들과 쏘다니는 아들 등등이다. 숱한 영화와 소설, 드라마가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 같은 가족구성에는 여성의 희생이 필수적으로 동반된다는 이데올로기 역시 그 시절의 가족이야기를 통해 배운 것이다. 반면 홍지흔의 딸 둘, 아들 하나 가족 이야기는 조금 다른 모양을 취한다.

아직 개발이 덜 된 80년대의 어느 마을. 곧 초등학교를 졸업해야 하는 작은 어른의 모습을 한 소녀 수인이 주인공이다. 실직한 아빠 대신 분식집에서 일하는 엄마, 벽장 가득 이상한 물건을 쌓아두는 여동생 재인, 멀뚱멀뚱 거리기만 하는 남동생 호인이 한 가족이다. 매사에 적극적인 남선생과 담배 피우는 여선생도 있고, 책읽기를 좋아하는 반장과 수도꼭지까지 훔쳐 팔아먹는 상일, 두 소년이 수인 곁을 맴돈다. 수인은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를 읽고 이제 막 설탕커피 맛을 알게 됐고 가부장적인 아빠에게 대드는 방법도 알게 됐다. 애 어른 같은 희생을 요구하는 가족도 있고, 삶의 방식을 보여주는 주변도 있고, 풋내 나는 사랑을 요구하는 이성도 있다. 가시밭길 같은 희생만 주르륵 배치하고 눈물 콧물 뽑게 만드는 희생적 멜로를 강조하지 않는다.


희생적 여성에서 선택적 희생으로 한걸음 더

80년대 가족 이야기는 남아선호 사상에 대한 비판을 담기도 했지만 결국 여성(어머니, 누이)의 남성(아버지, 아들)에 대한 맹목적 사랑과 무한 희생으로 끝났다. 이로인해 여성은 어떤 고난의 상황에서도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이데올로기가 성립됐고 다수의 가족이야기가 보여준 여성성은 나이와 상관없이 가족 희생적인 여성이었다. 반면 <한 걸음 더>에 등장하는 여성 이미지는 희생적인 여성성을 원하는 상황이 있고, 희생하는 여성 이미지가 등장하기도 하지만 종속적으로 묘사되지는 않는다. 엄마-여선생-수인으로 이어지는 여성 이미지는 특정 상황에 따른 맹목적 희생을 거부한다. 단, 자기 주도적 이해를 바탕으로 선택적 희생 또는 여성적 역할을 수행 한다. 이 같은 새로운 여성성은 소소한 사건과 대사, 감정 같은 것을 통해 표 나지 않게 드러난다.

<한걸음 더>의 전체 구성은 가족이야기와 소녀성장기의 중간쯤에 위치한다. 극중 여성 이미지 역시 20세기와 21세기의 중간쯤에 있다. 80년대의 일상과 주변부를 그리고 있지만 추억담으로만 읽히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여성의 희생을 통한 가족의 완성, 소녀의 성장이 아니라 여성의 선택과 참여에 의해 가족은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고 소녀는 그만큼 성장해 간다.

하지만 이제 1권이 나왔다. 아직 더 많은 이야기가 남아있고 다양한 인물들이 위치하고 있어서 이 가족이야기 또는 소녀성장기의 종극이 무엇을 의미하게 될지는 두고 봐야 한다. 그 끝을 보고 싶다.


덧글

<한걸음 더>는 2005년 창간된 여성만화잡지 ‘허브’에 연재를 시작했고 2007년 연재분량을 모은 1권이 출판됐다. ‘허브’는 여성이 여성에게 전하는 이야기라는 브랜드 컨셉트를 중심으로 여성작가, 여성주의, 여성만화를 통해 기존 순정만화의 대안을 모색해 오고 있다. 현재 잡지 ‘허브’는 휴간 중이다. 그래서 <한걸음 더> 2권 또는 후속 연재분량을 당장 보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을 추천하는 것은 ‘허브’의 재발행과 후속 연재가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시공사콘텐츠연구실장)


http://www.parkseokhwan.com



컬쳐뉴스, 민예총, 2007. 06. 12 게재


http://www.culturenews.net/read.asp?title_up_code=003&title_down_code=002&article_num=7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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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seokhwan

만화평론가 박석환 홈페이지. 만화 이론과 비평, 웹툰 리뷰, 인터뷰, 보도자료 등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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