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환의 만화방]이현세, 천국의 신화
이현세의 ‘천국의 신화’는 우리 민족의 상고사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10년간의 사전 기획, 10년간의 창작 단계를 거쳐 올해 완결됐다. 우리 민족의 신화시대와 역사시대를 소재로 총 100권의 분량으로 기획됐다. 그러나 1997년 청소년보호법의 시행과 음란물 시비가 맞물리면서 고단한 법정 공방이 이어졌고 총 48권(5부)으로 마무리됐다. 천지 창조와 삼계(신, 인간, 짐승)의 분열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원시 인류의 동물적이고 폭력적인 성행위를 다룬 것이 문제가 됐다. 이로 인해 작품의 본질적 평가 없이 표현의 자유에 대한 21세기식 상징으로만 논의되는 아쉬움을 남겼다.
‘천국의 신화’는 우리 민족의 시원인 하늘사람으로부터 배달국을 세운 1대 환웅 거발한(1부), 천족(天族)의 영웅 치우천왕과 황토인(화족·華族)의 영웅 황제 헌원(2부), 견우직녀 설화를 소재로 한 가루치와 두대발(3부), 웅녀 설화를 소재로 한 마지막 환웅 거불단(4부), 쌍둥이 태자 가리온과 1대 단군 검마르(5부)까지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작가는 환국-배달국-고조선으로 구축된 우리 민족의 신화시대를 부여-고구려로 이어지는 역사시대와 연결하려 했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조선의 건국에서 이야기를 끝냈다. 반쪽짜리임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품어 낸 문화 콘텐츠 원형으로서의 가치는 창작 기간 내내 우리 사회와 다른 매체에 전파되며 새로운 영감을 제공해 왔다.
이현세는 역사학계가 인정하지 않는 한 뼘 남짓한 사료를 바탕으로 역사 이전의 시대를 거대 영웅 서사의 구조로 살려 냈다. 이현세가 그린 지도는 우리 문화계에 상고사, 한국적 판타지, 전통문화 원형, 고구려 사극 열풍을 촉발시킨 계기가 됐다.
상상력으로 그려 낸 이야기와 소재들은 고증에 목매고 있던 인문학자들의 숨통을 틔워 주는 계기가 됐고, 마저 전하지 못한 부여와 고구려의 하늘은 TV 드라마가 열고 있다. 재야학계에서도 단군신화와 주몽신화의 유사성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최근 드라마 ‘주몽’의 모티브는 과하다 싶을 만큼 ‘천국의 신화’를 닮았다. 내년에는 이현세의 오랜 파트너였던 스토리 작가 야설록의 ‘단군’이 드라마화된다고 하니 상고시대의 공간과 도구, 생활과 갈등을 창조해 낸 이현세의 노고는 더 말할 이유가 없겠다.
이현세의 만화는 늘 힘이 넘친다. 그의 만화가 강력한 영웅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반만 이해한 것이다. 이현세는 거대한 서사 속에 구원의 메시지를 담는다. 영웅의 삶을 통해 독자의 삶과 목표 설정을 돕는 것이다. 그러나 부러질지언정 타협을 모르는 작가는 독자와의 마지막 교감을 거부하고 근원적 가치의 정당성을 옹호한다.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동북아 정복 국가라 말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대립이 아닌 상생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현세의 이야기는 우리 시대의 신화가 되고 대중의 정서를 지탱하는 힘이 된다.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동아일보, 2006. 12. 30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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