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만화는 아이들이나 보는 유치한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반대편에서는 ‘만화는 작가의 사상과 정서를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예술 형식’이라 한다. 둘 간의 팽팽한 대결이 반복되면서 대중은 그때그때 다른 평가기준을 지니게 됐다. 간혹 몇몇 청소년들의 이탈 행동이 만화와 관련 있는 것으로 보도되면 즉각 ‘만화 = 위험한 놀이 도구’라 한다. 그러나 몇몇 만화가가 오락성을 배재한 의미 있는 작품을 출간 할 때면 ‘만화 = 예술 형식’이라 말하기도 한다. 사실 이 같은 이중적 시각은 수세기 동안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만화의 내용이 달라지고 이를 보는 독자층이 변하면서 만화에 대한 인식도 눈에 띄게 변했지만 이 시각에는 큰 변함이 없다. 모든 사람의 몸에 좋은 약이 없듯 만화 역시 작품의 성격과 대상 독자의 요구에 따라 그 내용과 형식이 달라지기 마련인데 대중은 이를 쉽게 용인하지 않았다. 그래서 만화작가들은 늘 외로워했다.
만화계의 거목들이 하나 둘 쓰러지고 있다. 한국 현대 서사만화의 본격적 출발을 60년대부터로 본다면 이 판과 함께 성장하며 굳건하게 자리를 지킨 이들이 세월의 두께를 못 이겨 세상을 달리한 것이 슬플 일만도 아니다. 그러나 올해는 유독 너무 이른 나이에, 급작스런 부고 소식이 이어지고 있어서 안타까움을 더하게 하고 있다. 소설가처럼 이야기를 꾸며야 하고 화가처럼 그림을 그려야 하고, 사진가처럼 세상을 담고 칼럼리스트처럼 세상에 대해 발언해야했지만 이들에 대한 우리사회의 대접은 그리 넉넉하지 못했다. 이들은 자신을 이야기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재능을 지니고 있었으나 이를 표현하는 한 형식으로 만화를 선택했다. 그 이유만으로 청소년유해매체의 생산자와 예술가 사이를 오가야 했다는 것은 가혹한 형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만화계에 대한 인식전환을 위해 각자의 위치에서 주요한 역할을 해왔던 세 분의 만화작가와 대표작품을 소개한다. 올 해 나란히 세상을 등졌지만 그들의 작품은 여전히 우리 만화계의 서가를 지키고 있다.
고우영의 <삼국지>
만약에 <삼국지>가 없었다면 90년대 이후의 우리 출판계는 뭘 해서 먹고 살았을지 궁금하게 할 정도로 <삼국지>는 다양한 작가들이 수없이 많은 형식으로 작품화했다. 이중 고우영의 만화 <삼국지>는 1978년 일간스포츠에 연재 된 작품으로 색다른 인물해석과 통쾌한 비판정신 등으로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연재 내내 군사정권의 검열과 심의로 인해 작품은 망신창이가 됐었다. 총 10권 분량의 작품이 5권으로 출판되기도 했는데 작가가 삭제 부분을 복원하여 2002년 제 모습을 갖춰 출판한 것이다.
고우영은 1939년 만주 본계호 출생으로 1958년 '짱구박사'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72년 일간스포츠에 연재했던 '임꺽정'을 시작으로 펜화의 거친 매력과 풍자정신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2005년 4월 지병인 대장암으로 별세했다. 고우영은 성인극화의 시대를 개막한 1세대 작가로 어른들이 볼만한 만화를 창작한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박봉성의 <신이라 불리운 사나이>
기업극화에 권투소재를 도입한 초장편 만화 ‘신의 아들’이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 박봉성의 영웅서사만화는 ‘신’ 시리즈로 분류되기도 한다. 이 작품 역시 선과 악의 구분을 넘어, 신의 경지에 이른 주인공 피터팬의 서사를 그리고 있다. 액션 장르의 만화로 현재 81권이 출간됐다. 피터팬의 또 다른 서사를 그린 ‘비하인드 스토리’가 53권째 발행중에 있다.
박봉성은 1949년 부산 출생으로 1974년 ‘떠돌이 복서’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5년 10월 산행 도중 쓰러져 별세 했다. 박봉성프로덕션 소속 작가들을 통해 후속작이 계속 출간될 계획이다. 만화창작의 전과정을 분업화하여 작품의 생산력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우리만화의 산업화를 꾀하는 한편 영웅서사만화의 큰 흐름을 주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안수길의 <호랑이이야기>
안수길은 호랑이 잘 그리기로 유명한 만화작가이다. 그의 출세작 ‘호랑이 이야기’는 곡마단에서 탈출한 호랑이가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서 대자연과 호흡하며 진짜 호랑이로 살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원색 동물 백과'에 나올법한 세밀한 호랑이 일러스트와 '자연도감'이나 '동물의 왕국' 같은 TV프로그램에서 봤음 직 한 호랑이의 생태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출판사의 원본 원고 분실과 관련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출판사 측 변호인이 배상비용을 낮출 요량으로 '안수길은 호랑이만 잘 그리는 만화가'라는 기이한 변론을 펼쳤을 정도로 작가의 호랑이 그림은 정평이 나있다.
안수길은 1964년 경북 출생으로 1990년 ‘판소리 소녀경’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94년 일본의 만화잡지 모닝에 ‘호랑이이야기’를 연재하는 등 호랑이를 소재로 한 작품에만 전념해 왔다. 2005년 11월 지병으로 별세했다. 안수길은 우리만화계의 올 곧은 창작가정신을 대표하는 만화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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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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