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만의 삶
여순반란사건
허영만은 1947년 6월 26일 전라남도 여천군 화양면(현 여수)에서 허 종씨와 박옥정씨 사이에서 8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본명은 허형만. 아버지 허 종씨는 1913년 생으로 일제(日帝) 때부터 순사를 지냈고 해방이후로도 순천 지역에서 경찰로 일했다. 이후 여수에서 교육행정직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지물포(식기류 지역총판), 멸치어장 등 자영업을 했다.
가족사 중 허영만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은 1948년 여수 순천 일대에서 벌어진 ‘10・19 사건(속칭 여순반란사건)’이다. 이 사건은 가려진 현대사 중 하나이고 허영만과 그의 만화를 읽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해방 이후 한반도는 좌익과 우익의 이념대립이 팽배한 상황이었다. 한 동네 사람들끼리도 이념과 체제에 따른 갈등이 심했다. 남북분단이 고착화되면서 남한만의 단독 정부수립이 기정사실화 될 때 쯤 제주에서 ‘4・3 사건(속칭 제주폭동사건)’이 발생했다. 여수 지역에 주둔해있던 국군 제14연대에 사건 진압을 위한 출동 명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14연대는 주둔지를 점령하고 ‘38선은 인민군에 의해 무너졌다’며 반란을 일으켰다. 1천 여 명 규모의 반란군은 경찰서 및 여수지역 주요 관공서를 장악하고 인공기를 게양했다. 육군총사령부는 반군토벌전투사령부를 광주에 설치 계엄령 선포와 함께 반란군 진압을 시작했다. 허영만의 아버지 허 종씨는 경찰 측 반군토벌대로 이웃이었던 반란군과 대치했다. 여수에서만 1천 여 명이 살해 된 이 사건으로 인해 여수와 순천의 양민들은 ‘반란군에 의한 광란의 시간, 진압군에 의한 학살과 방화의 시간’을 겪어야 했다.
아버지
당시 세 살 박이였던 허영만은 이 사건을 직접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성장기를 보내면서 주위 어른들로부터 이 사건에 대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고 한다. 한 동네에서 동네사람들끼리, 친가와 외가가 반란군과 토벌군으로 나뉘어 총질을 해댄 사건이다. 그 이면에는 일정(日政)과 미군정(美軍政) 하에서 경찰로 일했던 사람들과 민병대(民兵隊)에 가까웠던 군인 간의 갈등이 있었다. 허영만은 경찰 가족이었다. 주변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 역시 현대사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당대의 한(恨)을 느꼈을 터이다.
허영만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적대적 존재로서의 아버지’와 ‘화해와 용서를 구하는 아버지’는 편치 않은 가족사를 반영하고 있다할 것이다. 또한 ‘확신형 인간에 대한 거부감’ ‘이념 대립에 대한 회의’ 등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당대의 상황을 묘사한 작품으로는 <오!한강> <타짜> 등이 있다.
김용환과 방영진
한국전 이후 허 종씨가 지물포를 운영하면서 생활이 안정되는 듯 했으나 멸치어장을 시작하며 모든 재산을 탕진했다. 8남매 중 누나 허순자씨는 교사였고 형 허치만씨는 대학에 다녔다. 셋째였던 허영만은 이런 집안 분위기 때문에 ‘고교시절 대학진학을 당연하게’ 생각했으나 가세가 기울면서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만화가가 되기로 결심 했다.
허영만은 8세가 되던 해에 학생잡지 ‘학원’에 연재됐던 김용환의 <코주부삼국지>를 본 것으로 기억한다. 이 작품이 생애 처음으로 본 만화작품이다. 허영만은 이후 만화방을 제 집처럼 드나들었다. 명랑학원 만화로 인기를 끌었던 방영진의 작품에 심취해 있었고 이향원과 강철수의 초기 극화도 즐겼다고 했다.
최근 연재중인 작품 <식객> ‘식탁 위의 정물화’ 편에는 방영진이라는 이름의 화가가 등장한다. 이름만 등장하는 이 화가의 정물화는 에피소드의 주인공에게 행복과 용기를 주고 ‘욕심을 버리는 지혜’를 준다고 했다. 아마도 방영진이 작품 속에서 풀어낸 이야기와 만화라는 매체가 유년기의 허영만에게는 그런 존재였을 것이다.
아내와 아이들
아내 이명자씨와는 이향원화실에서 일하던 시절 음악다방에서 만났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아내가 직접 장인을 설득해서 조촐한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고 현재까지 가장 든든한 후원인 역할을 해주고 있다고 한다. 이명자씨는 함박여자중학교에서 음악선생으로 교편을 잡았었다. 허영만은 이명자씨와의 사이에 아들 딸 자매를 두고 있다. 첫째 아들 석균(1976년 생)군은 연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한국IBM에서 일하고 있다. 둘째 딸 보리(1982년 생)양은 서울대와 대학원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상경
허영만은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서울의 김석화실을 찾아갔다. 그러나 김 석의 세련된 화풍이 일본만화에서 따 온 것임을 알게 됐고 1주일이 되지 않아 여수의 집으로 돌아왔다. 멋진 서부활극을 자기 스타일대로 그리고 싶었던 허영만은 당시 만화계의 현실에 낙담했다. 그러나 처음 정한 길을 변경하지 않고 테생 공부에 열중했다. 졸업과 함께 다시 서울로 올라가 박문윤의 문하에 들어간다. 박문윤은 당대의 만화가 중에서도 잡학다식 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허영만은 이 시기를 음악이나 미술 등에 대한 식견을 넓힐 수 있었던 시간으로 기억한다.
입문
박문윤은 허영만의 재능을 높이 샀다. 다른 문하생들이 허드렛일을 할 때 허영만은 최고 과정이랄 수 있는 데생 작업을 했다. 당시 만화계는 초기 형식의 순정만화가 붐을 이뤘다. 박문윤은 잠깐 인기를 끌었으나 신예작가 조원기가 등장하면서 시들해졌다. 조원기는 문하생이었던 엄희자와 결혼을 했고 엄희자 역시 베스트셀러 만화가가 됐다. 새로운 시도에 게을렀던 박문윤은 허영만 등과 팀을 이뤄 조원기화실 일을 했다. 당시 조원기화실은 박문윤 허영만 등이 포진한 조원기팀과 엄희자의 동생 엄미자와 그의 남편 이성훈 등이 포진한 엄희자팀으로 운영됐다. 이후 허영만의 스승이었던 박문윤은 조원기팀의 데생을, 허영만은 박문윤의 추천으로 엄희자팀의 데생을 담당하게 됐다. 한때 두 팀이 한달에 발표한 만화 작품 수는 무려 20여 권에 달했다. 이런 다작 시스템은 저급한 만화작품을 양산하는 구조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많은 수의 예비만화가가 활동할 수 있는 터전이 되기도 했다. 조원기 엄희자팀에서는 최경탄 차성진 하영조 김숙 방재호 등의 만화가가 배출됐다.
이향원화실
허영만이 엄희자의 데생을 했던 시기는 1967년으로 약 8개월가량이다. 이후로는 동물만화 <투견> 시리즈로 유명세를 타고 있던 이향원의 문하에서 작업했다. 박문윤의 소개로 허영만을 알고 있던 이향원은 자신의 문하로 들어올 것을 권했다. 허영만은 이후 7년 간 이향원화실에서 작업했다. 이향원은 허영만에게 서른 이전에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어서 독립하라고 가르쳤고 허영만은 이향원화실에서 ‘만화가 허영만’의 초기 스타일을 구축했다. 허영만은 이향원의 작품을 하면서도 자신의 작품을 계획했고 1973년 경 독립을 결심한 뒤 1974년 데뷔작을 발표한다.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부천만화축제, 부천만화정보센터 2005 전시도록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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