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환, 영상매체의 만화 따먹기, 이슈, 대원씨아이, 2004.10.01


조직적 대응과 공생의 묘를 찾아서 


만화의 영상화 붐 


영상 테크놀로지는 최근에 와서야 만화의 상상력과 표현력을 초현실의 무대로 옮겨낼 수 있게 됐다. 반면 만화는 이미지 시대의 철학자답게 오래전부터 영상매체 시나리오에 대한 해법을 가지고 있었다. 영상기술의 발전이 대량소비문화의 중심으로 만화를 이끌어 냈으나 만화의 형식적 특성과 풍부한 표현력은 문자와 서사 중심으로 쓰여졌던 영상매체의 빈곤한 시나리오를 영상과 이미지 중심의 시나리오로 바꿔 놨다. 허리우드는 액션히어로코믹의 위대한 주인공들을 영화하기 위해 영상 기술의 극한을 실험하고 있고 충무로와 여의도는 독특한 소재를 바탕으로 한 영상 시나리오를 찾기 위해 만화계를 탐사하고 있다. 

최근 만화 작품을 소재로 한 영화 <올드보이>와 TV드라마 <풀하우스>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이 같은 움직임은 더욱 본격화됐다. 다수의 걸작 만화들이 영화, TV드라마는 물론이고 뮤지컬, 연극, 게임 등으로 제작되고 있거나 기획단계에 있다. 물론 정식으로 만화의 영상화 판권을 구매한 작품이다. 이처럼 만화작품의 영상화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최근 기획단계에 있는 김종학 프로덕션의 TV드라마 <태왕사신기>와 얼마 전 종영된 TV드라마 <두근두근 체인지>가 중견만화가 김진의 <바람의 나라>와 신인만화가 이희정의 <내게 너무 사랑스러운 뚱땡이>의 주요설정을 표절했다는 주장이 인터넷을 중심으로 퍼지면서 영상매체와 만화의 공생관계가 흔들거리고 있다. 


영상매체의 만화 따먹기 


김진과 이희정은 이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을 각자의 홈페이지와 언론사 보도자료 등을 통해 발표했으며 저작권법 위반으로 방송사와 시나리오작가를 고소했거나 고소를 준비 중에 있다. 김진은 팬클럽을 중심으로 ‘바람의 나라 무단도용대응본부’라는 이름의 온라인카페를 개설 고구려사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드라마 <태왕사신기>와 만화 <바람의 나라>의 유사성을 알리고 있다. 김종학 프로덕션과 시나리오작가 송지나는 사전제작단계이고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한 시놉시스를 두고 유사성과 도용을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김진은 경쟁 방송사와 <바람의 나라> 드라마 화를 논의 중이었음을 강조하며 강도 높은 대응 의지를 피력했다. 김진이 팬클럽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서 규모 있는 대응을 펼쳐가고 있는 것과 달리 이희정은 자신의 홈페이지에 관련 게시판을 열고 선임 변호사를 통해 대응하고 있다. 

이미 종영된 <두근두근 체인지>의 경우 일요일 낮 시간대 프로라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15%대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노도철 PD와 신정구 작가의 합작품으로 방송 이전부터 만화적 설정과 연출이 화제가 됐던 드라마이다. 일종의 변신소녀물인 이 작품의 시놉시스는 <내게 너무 사랑스러운 뚱땡이>의 설정과 유사하고 인물구도나 사건전개 요소 등도 일치한다. 이희정은 방송사와 작가를 고소한 상황이고 방송사측에서는 소장이 접수되면 공식적인 입장을 밝히겠다고 한다. 문제는 변신소녀물이라는 장르가 지닌 공통적 요소가 이 만화작품만이 지닌 유일한 사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제작진 측에서도 여러 만화작품을 검토해서 장르적 특수성을 차용했기 때문에 일부 유사성이 있을 수 있지만 해당 작품을 표절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이와 관련 한 네티즌은 오히려 <내게 너무 사랑스러운 뚱땡이>가 <오! 필승 바바라>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일본만화를 도용했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명백히 유사하지 않음으로 무죄 


기실 영상매체의 만화 소재 따먹기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한 작품을 통째로 베껴 먹은 것에서부터 설정이나 인물관계만 도용한 것, 여러 작품을 혼합한 것, 재미있는 상황만 차용한 것, 주요 대사를 빌린 것 등 수없이 많은 영상물들이 만화를 표절해왔다. 대개의 경우 일본만화를 중심으로 벌어진 일들이어서 여론재판의 형식으로 일단락되거나 일본측의 문제제기가 뒤늦게 펼쳐지면서 유야무야되는 경우가 많았다. 또 우리만화를 도용한 몇몇 사례의 경우는 유사성을 입증할만한 자료제시에도 불구하고 만화 원작자 쪽의 과잉 대응이라는 판결을 받는데 그치기도 했다. 

조직폭력배 두목이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설정으로 재미를 봤던 영화 <두사부일체>와 만화 <차카게살자>의 법정공방이 이 경우로 오히려 만화원작자와 영화판권을 구매했던 영화사가 맞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법원은 일부 설정이 유사할 뿐 그 표현 방식 등 전체가 유사하다고 볼 수 없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 이처럼 표절에 대한 해법은 쉽지 않다. 유사성이 있더라도 두 손바닥을 마주친 것처럼 명백하게 유사하지 않다면 빠져나갈 구멍이 수도 없다. 반면 표절이나 도용 대상이 된 작품은 단순히 설정이 동일하다는 이유만으로도 피해를 입게 된다. 

조직폭력배의 육아일기로 인기를 끌었던 한 만화의 경우는 영화화가 추진되던 중 동일 설정으로 급조된 영화가 개봉되면서 관련 계획을 전면 백지화해야 했다. 표절이나 도용 사실을 밝혀내어 법적으로 보호를 받으려면 전체적인 유사성을 밝혀야 한다. 그러나 일부 설정만을 가져오는 경우는 법적권리를 주장하기도 어려운 형편이다. 반면 이에 따른 피해는 창작물의 부가가치를 포기해야 하는 수준이다. <바람의 나라> 역시 같은 맥락으로 일부 요소와 설정을 차용 또는 도용한 <태왕사신기>가 공개되면 이와 같은 설정을 지닌 작품은 향후 몇 년간은 영상매체화를 기대할 수 없게 된다. 이와 관련 <태왕사신기>의 시나리오작가 송지나도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으로 관련 주제의 작품이 많이 나올 것 같아서 이 작품의 집필을 포기하려 했다는 요지의 말을 했다. 대중문화상품의 경우 전체적인 이야기의 요소요소보다 유일한 설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확인 시켜준 답변이다. 


권리침해를 벌하는 것보다 권리보호에 노력해야 


표절문제는 원저작자의 주관적 판단으로부터 출발해서 여론과 전문가 그룹의 객관적 판단 그리고 법률적 판단이 합일치를 이뤘을 때에야 비로소 행위자를 강제할 수 있는 구속력을 얹을 수 있다. 표절은 그만큼 논란은 있으되 사실을 찾기는 어려운 수수께끼이다. 또한 표절에 대한 해결 방식에 있어서도 경제적 타협과 윤리적 해결에 더 비중을 두고 있기 때문에 법률적 해결 사례를 찾기가 쉽지 않다. 더군다나 법률적 공방이라는 것이 조직적 행위자와 개인적 창작자의 싸움이라는 점에서 승산 역시 희박하다. 때문에 표절을 비롯한 만화 저작물의 권리문제에 대해서는 범만화계의 조직적 대응과 관리 노력이 필요하다. 또한 작가적 자존심과 윤리성을 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적재산의 피해에 대한 실질적인 해결에 중점을 두고 관련 사건을 해결할 필요가 있다. 

만화계는 정부지원 하에 만화저작권 관리 기구를 설립하고 출판사는 이 기구와 연계할 수 있는 저작권리 담당자를 두어야 하며, 만화가 관련 단체에서는 저작물에 대한 분쟁의 조정기구 및 협의기구를 설립 창작물에 대한 보호 활동을 펼쳐야 할 것이다. 이와 맞물려서 만화관련 학회와 기관에서는 만화저작권의 침해 사례와 방식, 범위 등을 규정하고 홍보하여야 하며 만화의 특수성에 준하는 저작권 법률안 조정 등에도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만화저작물 관련 아이템은행을 두어 관련인이 정당한 방법으로 만화 원작을 검토하고 쓸 수 있게 하는 시스템도 더욱 적극적으로 오픈 할 필요가 있다. 

이미 침해 받은 권리를 벌하고 그 대가를 지불하게 하기는 쉽지 않다. 침해 받기 전의 권리를 보호하려는 의지와 노력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만화의 형식적 특성은 영상매체의 스승이었고, 장르적 표현법과 내용은 영상시나리오의 젓줄임이 명확하다. 영상매체는 합법적이든 불법적이든 이 줄을 놓지 않을 것이고 만화계는 이를 위해 새로운 계산법과 공급방식을 규정할 필요가 있다. (끝)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이슈, 대원씨아이, 2004-10-01 게재

이미지 맵

Parkseokhwan

만화평론가 박석환 홈페이지. 만화 이론과 비평, 웹툰 리뷰, 인터뷰, 보도자료 등 게재

    'Critique/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