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환, “친절한 찬욱씨!! 만화를 부탁해”, 코믹플러스닷컴, 2004.09.24


박석환의 만인보1 - 영화감독 박찬욱


“친절한 찬욱씨!! 만화를 부탁해”


성균관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 학생회 주최로 영화감독 박찬욱 초청세미나가 열렸다. 촬영을 2개월 여 앞둔 신작 <친절한 금자씨>의 촬영준비와 전세계 60개국에서 상영되는 <올드보이> 프로모션 등으로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박찬욱은 ‘매우 친절한 찬욱씨’의 모습으로 단상에 섰다. 이 세미나의 준비 단계부터 참여했던 필자는 박찬욱과 만화 <올드보이>에 대한 제법 공격적인 질문꺼리를 붙잡고 있었다. 행사 스텝이었던 만큼 구경만하고 뒤풀이 자리에서 본격적인 질문 레이스를 펼칠 셈이었다. 그러나 세미나 내내 사람 좋은 미소와 언변으로 단상을 장악하고 있는 ‘성공한 영화인 찬욱씨’를 보고 있자니 너무 부럽고 샘이 나서 당초 계획을 수정해 버렸다.


B급만화 <올드보이>


박찬욱이 궁금했다. 

영화 <올드보이>가 깐느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기 때문이겠지만 그 것보다는 일본만화<올드보이>를 어떻게 발견하게 됐는지가 궁금했다. <여의사 레이가의 싸이코파일>을 그렸던 노부아키 미네기시가 가론 츠지야의 스토리를 받아 작업한 만화 <올드보이>는 주목 받지 못한 작품이었다. 일본 내에서는 물론이고 일본 만화 대부분을 수입 출판하는 국내 메이저 만화출판사도 선택하지 않았던 작품이다. 고급 콜걸을 소재로 한 일본만화 <여제>의 한국어판이 예상치 못한 성공을 거두면서 성인용 장르만화 출판에 집중했던 도서출판 거산플랜이 이 작품의 한국어판을 출판했다. 

만화 <올드보이> 한국어판은 일반인 대상으로 판매하는 책이 아니라 만화방에서 빌려보는 책으로 나왔다. 작품 내적 평가를 논외로 하자면 작가, 작품소재, 출판 및 유통방식 등이 모두 B급이었다. 작심하고 만화방을 출입하는 이 분야의 선수가 아니라면 만화 <올드보이>를 찾아낸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박찬욱이 더 궁금했다. 예컨대 박찬욱이 영화광시절을 떠올리며 60~70년대 이탈리아의 B급영화 감독들을 열거한들 만화인이 그것을 알리 없듯, 영화인 박찬욱과 만화 <올드보이>는 그리 가까워 보이지 않았다. 


<올드보이>를 찾아낸 만화탐험가 박찬욱과 영화계의 탐구력


박찬욱을 만났다. 

깐느 수상이후 국민적 영웅이며 세계적 감독으로 거듭난 박찬욱은 이제 전국민 계몽CF에 출연해도 손색이 없는 스타가 되어있다. 박찬욱이 대중에게 해줘야 할 말이 너무 많아졌다. 그래도 묻고 싶었다. ‘도대체 이 만화책을 어떻게 발견했나?’  ‘왜 하필 이 작품이었나?’하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묻지 않았다. 만나기에 앞서 인터넷 기사검색을 통해 대부분의 궁금증이 해소됐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서 한 이야기를 또 물어서 그를 괴롭힌다는 것은 국가적인 낭비쯤 되는 상황이지 않는가. 정리하자면 <살인의 추억>의 봉준호 감독이 출발선에 있다. 대학시절 ‘연세춘추’의 만화가로 활동했던 자타공인 만화광 봉준호 감독이 박찬욱 감독에게 만화 <올드보이>의 일독을 권했다(두 사람은 절친한 친구이면서 민주노동당 당원이다). 프로듀서 임승용이 박찬욱 감독과 배우 최민식의 조합으로 영화 제작을 준비하고 있었고 영화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에서 뭉쳤던 황조윤 작가가 만화 <올드보이>의 영화화를 다시 추천하면서 박찬욱표 <올드보이>가 세상에 나온 것이다. 이쯤 되니 전문가 추천 장르별 권장만화 3만권쯤은 봐야 겨우 접할 수 있는 만화 <올드보이>의 영화화 과정에 대한 궁금증이 풀린다. 

솔직히 말하자면 한때 만화광이었고 여차여차해서 만화평론가라는 직함을 지니게 된 필자는 만화 <올드보이>를 박찬욱 감독의 제작발표회 이후 봤다. 나름대로 선수도 못 알아봤던 만화였기에 ‘영화광이 만화광도 못 본 만화를 영화로 제작까지 한다’는 것에 대한 묘한 열등감이 느껴졌다. 독자들이 ‘만화평론가니까 모든 만화를 다 봤죠?’라고 물었을 때의 당혹감과 괜한 좌절감에 빠진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반쯤은 만화가였던 봉준호가 알려줬단다. 나름대로 안심했다. 그러나 조금 더 짚어보니 ‘평소 만화를 많이 보지 않는 박찬욱(엔키노, 브레이크뉴스)’이 대부분의 인터뷰에서 ‘만화<보노보노><멋지다마사루> <아즈망가대왕> 등을 감동 깊게 봤다’고 말한다. 급기야 ‘만화 <최종병기 그녀>의 영화화를 고민한 적도 있단다. 

모두 일본만화라 찜찜했지만 나이 40 넘은 중년의 스타감독이 풀어낸 리스트 치고는 매우 최신작이면서도 대중성과 작품성 등을 고루 갖춘 빈틈없는 작품이었다. 만화계 현장에서 늘 작품을 접했거나 최소한 그 수준에 있는 사람이 눈을 씻고 고르고 골라 추천한 작품이어야 이정도 리스트가 나올 수 있다. 박찬욱은 이 작품들을 찾아내기 위해 더 많은 만화세계를 탐험하고 있었을 것이다. 박찬욱은 자신의 이야기를 뽑아내는 주목할 만한 시나리오작가이고-만화 <올드보이>의 각색 역시 베스트였다-대중의 정서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는 대중문화상품의 탁월한 기획자임에 분명하다. 그런 그와 그의 동료들이 만화방을 전전하며 영화에 쓸만한 소재를 찾고 있었다. 이쯤 되면 ‘만화는 역시 대단한 것’이라는 ‘만화계의 꼬질꼬질한 왕자병’이 두둥실 떠오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보다는 소재를 찾아 떠도는 그들의 열정과 집중력을 배워야 할 것 같다. 

‘나는 식당에서 밥 먹을 때나 거리를 걷다가 TV를 보는 게 전부인데 만화 <올드보이>의 주인공은 감금 상태에서 TV만 보면서 살고 있다. 개인적으로 신기했다. 그래서 내가 이 이야기를 더 잘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우리 때는 TV를 바보상자라고 했는데 TV 프로그램이 많이 다양해져서 15년 동안 TV만 본다면 뭐든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부도 하고 운동도 하고. 영화 <올드보이> 내용에 대해서는 패륜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일반적인 도덕률을 초월하는 더 큰 사랑, 패륜을 넘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초월적 영웅의 모습일 수도 있다. 부자는 나쁘다고 말하지만 예쁜 사람이 맘도 착하다는 말도 있다. 좀 다른 상황의 사람들을 이야기하고 싶고 그런 것을 관객이 원한다고 생각한다. 복수는 당하고만 살고 있는 사람들의 분노가 표현되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위험한 소재기 때문에 관객으로부터 신뢰받고 존중받는 스타배우를 출현시켰다.(박찬욱, 2004. 9. 20-질의응답 내용 중 <올드보이> 관련 내용만 정리)’ 


가만 보니 만화방은 영화계의 스토리박람회장이 아닌가


박찬욱을 생각했다. 

영화 <올드보이>의 개막직전 한 매체에서 필자에게 ‘만화 원작의 영화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한 푼 투자 없이 사갈 수 있는 스토리 박람회쯤으로 만화를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투의 말을 했다(물론 기사는 다르게 나왔다). 죽 쓰는 만화계에 비해 대박 나는 영화계에 대한 질투 섞인 투정이었다. 그러나 영화나 TV드라마의 만화 표절 문제는 논외로 하더라도 정식판권계약을 해서 만화원작으로 그만한 성과를 올린 작품이 있다면 그에 준하는 보답이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괜한 투정이 아니라 함께 성장하자는 것이다. ‘만화가 모든 문화콘텐츠산업의 원작산업이라는 왕자병 말기 같은 이야기’는 그만하고 제대로 주고 제대로 받자는 생각에서였다. 

예컨대 일본에서 만화 <올드보이> 영화화 판권을 단돈 2만 달러 주고 사와서 일본에만 220만 달러에 되팔았다고 자랑하는 것은 올바른가. 우리문화계에는 기쁜 일일지 몰라도 제값을 받지 못한 일본만화계에는 좋은 일이 아니고 결과적으로 우리만화계에도 좋은 선례가 되지 못한다. 영화 <올드보이> 덕에 만화 <올드보이>가 아선미디어에서 서점용으로 다시 출판되어 몇 쇄를 더 팔았다. 단순히 만화책 몇 권 더 팔리게 해줘서 고마운 일이 아니다. 만화계의 자체투자로 만들어진 스토리를 영화계가 필요로 할 때 쓰고 있다면 영화계는 그만한 규모의 사전 투자를 만화계에 해야 하지 않을까. 영화의 시나리오 뱅크로서 만화가 그만한 역할을 하고 있다면 이 뱅크를 더욱 굳건하게 하기 위해 힘써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기업이 학교에 투자하고 도시에 투자하여 인재와 테스트판매시장을 확보하듯 영화는 만화에 투자해야하고 만화는 영화에 정당한 투자 요구를 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영화 제작준비 단계에서 시나리오의 일부를 만화로 미리 출판하고, 흥행영화의 후속작을 만화로 제작하고. 또는 좀 더 직접적으로 신인만화가를 발굴하는 공모전도 하고, 특정 만화잡지를 지원하고. 미국이나 일본이야 만화출판사가 영화도 하고 애니메이션도 하지만 우리야 그럴 형편이 아니니까 서로 도와야 하지 않는가. 죽 쓰고 있는 집에서 앙꼬만 빼 먹고 나 몰라라 하면 어쩌란 말인가. 이런 입장을 흥분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데 기자가 ‘그래도 만화가 영화화되는 게 전체적으로는 좋은 거죠?’라고 묻는다. 물론 매우 바람직한 일이고 자꾸자꾸 좋은 만화를 좋은 영화로 만들어야 한다고 답했다. 영화가 만화를 도와야 한다는 주장이 치졸했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필자는 농담 투로 ‘좀 같이 먹고 살자는 이야기예요’하면서 자리를 빠져나왔다. 


만화가 당신의 총알이라면 이제 총알 값만 내서는 곤란하다


박찬욱에게 부탁한다. 

영화 <올드보이>는 만화 <올드보이>를 재발견하게 할 만큼 잘 만들어진 작품이다. 굳이 만화라는 원작이 없었더라도 박찬욱은 그에 준하는 독창적인 설정으로 독자적인 이야기를 풀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만화계가 찾아내지 못했던 작품을 그 치밀한 탐구력으로 걷어 올려준 것은 무척 반가운 일이다. 그리고 총집 속의 총알처럼 영화화 가능한 만화작품을 차곡차곡 쌓아놓고 있는 것도 고마운 일이다. 이제 우리 만화계에서도 박찬욱과 영화계의 사례를 통해 창작소재에 대한 탐구활동에 나설 것이다. 통속성을 파괴하는 역발상과 대중과의 긴장감 넘치는 호흡을 이끌어 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또한 영화계의 만화계 탐사가 헛되지 않도록 더 좋은 작품을 더 많이 만들어 낼 것이다. 그러니 더 다양한 주체들과 더 다양한 방법들을 통해 영화계와 만화계가 좀 더 적극적인 방식으로 공조할 수 있는 모델을 마련했으면 한다. 만화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참 재미있는 만화를 찾아내고 재해석할  줄 아는 당신이 이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줬으면 한다. (끝)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코믹피플, 코믹플러스닷컴, 2004-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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