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도 보는 순정만화
마초적 작품들 틈에서 감성적 기획으로 성공
50%대의 시청률을 유지했던 MBC 드라마 ‘대장금’이 짧은 교복치마 차림의 날라리 여고생에게 기습 공격을 당했다. 같은 시간대 SBS는 비슷한 시청층을 대상으로 한 ‘왕의 여자’로 실력편성을 했지만 KBS는 신인 탤런트 한지혜와 이동건을 내세운 트랜디 드라마 ‘낭랑18세’로 14%대 시청률을 따냈다. ‘대장금’의 독주는 시청률이 48%대로 낮아지며 상처를 입었고 ‘왕의 여자’는 4%대로 절벽까지 밀렸다.
사극 열풍 속에서 차별성을 강조한 KBS의 ‘보완 편성’ 전략이 낳은 성과이다. 그러나 KBS가 벌써부터 후속 드라마 ‘백설공주’ 마케팅에 공을 들이고 있는 것을 보면 일종의 ‘텐트-폴링(성공 확률이 불확실한 작품을 앞뒤로 편성하는)’ 전략으로 얻은 예상 밖의 성과로도 보인다.
이 드라마의 원작은 아니지만 비슷한 설정이 많은 김지원의 만화 ‘낭랑18세(전7권, 서울문화사)’는 만화계에서 찾을 수 있는 괜찮은 편성기획과 전략 사례로 읽힌다. 날라리 여고생 영지와 그 친구들이 ‘변비탈출’과 함께 성장통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그린 이 작품은 1997년부터 2년간 만화잡지 ‘영점프’에 연재됐다.
지금은 폐간된 이 잡지는 15세 이상의 남자 독자를 타깃으로 한 만큼 수록 작품 대다수가 강한 남성적 이미지를 연출하기 바빴다.
경쟁 매체였던 ‘영챔프’도 근육질 사내들의 보디빌딩 경연장이나 싸움판이었고, 김지원 역시 초기 히트작은 마초적 성격의 남자 주인공을 등장시킨 ‘블랙터치’였다. 그러나 차기작 ‘고교 4년생’에서는 힘없는 남자 재수생의 연애담을 그렸고 ‘낭랑18세’에 와서는 아예 여고생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낭랑18세’는 같은 성격의 매체에 수록된 대부분의 만화가 학교를 비이상적인 싸움 경연장으로, 가정을 벗어나고 싶은 울타리로 묘사하고 있을 때 학교는 성장통을 겪는 공간이고 가정은 이를 치유하는 공간이라 묘사한다. 여고생을 주인공으로 했지만 소녀 대상의 순정만화와는 다른 방식의 작법으로 무딘 남자 독자도 찾아낼 수 있는 순정성과 아련한 드라마를 담아냈다. 이를 위해 여고생과 교복이 훔쳐보기의 성적 대상으로 이미지화 한 흔적도 있지만 과하지 않다.
김지원은 이 작품을 전후로 ‘감각 테러리스트’라는 별칭을 얻었다. 그의 만화가 학원폭력만화를 흉내 낸 실력편성 기획물이 아니라 그것 밖에 없어서 아쉬운 부분을 정확하게 가려낸 보완편성 기획물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같은 길을 가지 않은 작가, 다른 길을 이해한 편집진의 전략이 맞아 떨어진 행복한 작품이다. 최근 복간을 계획하고 있지만 출판사에서 원고를 분실해 문제가 되고 있다. 온라인 만화 사이트에서도 볼 수 있다.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한국일보, 2004-02-10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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