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가 석동연(1970년 생)은 1990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개설된 공주대학 만화예술학과의 첫 번째 졸업생이다. 1998년 ‘우리는 만화과’라는 독특한 소제의 4컷 만화를 발표하며 데뷔했다. 이 작품은 제목이 이야기하는 것과 같이 자신이 직접 경험했을 법한 만화가 학생들의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석동연의 만화는 독특하면서도 재미있다. ‘우리는 만화과’의 경우만 하더라도 ‘만화과 학생들’, ‘만화가가 되고자 하는 이들’로 등장인물이 제한되는 탓에 설정이나 소재가 대중적일 수 없었다. 기존의 4컷 만화가 주로 아줌마 아저씨 직장인 동네영감님 등 보통사람을 내세워 시사성 있는 이야기를 다뤘던 것은 ‘대중과의 밀접한 소통’을 이유로 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석동연이 그려낸 ‘만화과’나 ‘만화가’에 대한 이야기는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만화과라는 전문 영역을 배경으로 했지만 만화과에 대한 지식이 없는 이들도 이 만화를 보며 즐거워했다. 여느 젊은 작가들처럼 독특한 소재만을 찾아내기 위해 애쓴 것이 아니라 그 독특함을 주무르고 대중이 원하는 모양으로 만들어낼 줄 알았던 것이다.
데뷔이후 2003년 현재까지 석동연이 발표한 작품집(단행본)은 총 4권이다. <명쾌! 사립탐정 토깽>(2권) <얼토당토> <그녀는 연상>이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작품형식은 모두 4컷이다. 얼마전 창간한 격월간 여성만화잡지 ‘오후’에 연재하고 있는 ‘말랑말랑’도 4컷이고, ‘무료신문’이라는 새로운 전략으로 지하철문화를 바꿔놓은 주5일 신문 ‘매트로’에 연재 중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도 4컷이다. 4컷 만화는 연재만화 또는 스토리만화의 가장 고전적인 형식이며 기초적인 작법이다. 그러나 4컷 만화는 수련기의 만화가가 기본기를 쌓을 수 있는 가장 간소한 방식임과 동시에 여느 대가도 쉽게 자신할 수 없는 형식이다. 가장 쉬운 영역이지만 감출 것 없이 모두 드러내야 한다는 점에서, 부연 설명할 기회도 없이 지정된 4컷 안에서 승부해야 한다는 점에서 가장 어려운 형식이기도 하다. 링에 오른 복서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강력한 상대선수가 아니라 도무지 빠져나갈 곳 없는 4각의 링 자체이다. 링이 곧 형식일 때 4컷이라는 움직일 곳 없이 규정화 된 곳에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내려와야 만화가는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석동연이 만들어 가고 있는 만화세계가 바로 그 4컷의 무대이다.
석동연을 만화동네가 아니라 대중 문화판에 알린 작품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일 것이다. 대중은 이 용감한 4컷의 승부사를 지하철 앞에서 무료로 나눠주는 신문을 통해 만난다. 순정만화계의 여장부로 통하는 황미나를 논외로 한다면 여성만화가가 일간지에 매일 연재를 하는 사례를 찾기란 쉽지 않다. 석동연은 4컷이라는 잔인한 무대를 매일 준비하고 있다. 마치 ‘천일야화’의 설정처럼 재미난 이야기가 떨어지면 곧 처단되는 고단한 운명이다. 그러나 석동연은 늘 즐겁다. 4컷의 짧은 무대를 꾸미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부러 살피지 않아도 좋을 만큼 그의 작품은 즐겁고 활력이 넘친다.
석동연이 끄집어내는 무대 위의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우리는 만화과’ <그녀는 연상>의 경우에서 찾을 수 있는 만화가 자신의 일상이다. 또 다른 하나는 <명쾌! 사립탐정 토깽> <얼토당토>의 경우에서 찾을 수 있는 동화적 판타지의 세계이다. 최근 연재 중인 두 작품도 이에 기반하고 있다. 석동연은 연재를 진행 중인 작품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서 자신의 일상과 동화적 판타지라는 두 가지 소재를 하나로 배합해가고 있다. 자신의 분신으로 보이는 주인공 ‘엘리스’를 중심으로 순정만화의 관습화 된 등장인물에 대한 비틀기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 그 시도의 결과를 논의하는 것은 이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석동연이 말랑말랑한 이야기로 쏜살같이 4컷을 채워내기에 급급한 만화가가 아니라는 점이다. 석동연은 4컷의 형식을 살려내고 4컷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범위를 넓혀가고 있는 만화가이고 매일 아침 시식 코너 앞에서 진검승부에 나서는 용감한 요리사이다.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만화규장각, 부천만화정보센터, 2004-02-03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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