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의 박소희
조선 시대의 국왕이 세습되고 영국의 윌리엄 왕자 쯤 되는 ‘타고난 얼짱’이 한국의 왕세자라면. 아마도 탤런트 권상우나 가수 비처럼 오빠부대를 동반하고 재벌가의 막내아들 부럽지 않은 관심과 함께 적당한 위엄까지 갖춘 초특급 킹카 대접을 받지 않을까. 물론 스타가 있어서 행복한 것이 팬인 것처럼 그런 왕세자와 왕족이 있어서 즐거운 것은 신분상승의 꿈을 지닌 평민(?)들이겠다. 물론 여성들이겠고.
만화 <궁>은 입헌군주제가 지속된다는 가정 하에 현대의 왕세자와 여고생이 17세의 나이로 결혼을 한다는 내용을 중심으로 한 로맨틱 코미디물이다. 공주대 만화학과 출신으로 초기작 <리얼퍼플>에서 이복남매 간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그렸던 박소희가 이 작품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슬픔’이 아니라 ‘소중히 간직하는 사랑’의 유쾌함을 그려냈다. <궁>은 독자가 순정극화에서 원한다고 믿는 모든 요소를 적절히 배합한 ‘의도된 히트상품’.
문화콘텐츠진흥원으로부터 ‘우수만화 사전 제작지원작’으로 선정되는 등 발표이전부터 탄탄한 상품성을 인정받았다. 물론 히트상품이 의도한다고 해서 될 일인가. 박소희는 <궁>을 통해서 가장 범용적인 양념으로 최고의 맛을 뽑아내는 만화요리사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1만부 판매면 대박이라는 불황 속에서 권당 2만5천부를 팔아치웠으니 만화계 입장에서는 효녀 중 효녀이다.
지난해 대한민국만화대상은 박소희에게 신인상과 인기상을 안겨줬다. 흥행 코드를 다루는 패기가 발군의 재능을 평가 받은 것. 그래서 박소희는 올해가 더욱 기대되는 만화가이다.
<르브바하프 왕국 재건설기>의 김민희
웃음에 대한 오랜 정의 중 하나는 ‘과오 혹은 추악’이다. 코미디언 정준하 정도 되는 ‘보통인 이하’의 과오와 추악한 행실이 웃음을 유발한다는 것.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희곡을 논하며 던진 표현이니까 요즘으로 치면 코미디 프로 쯤 되는 ‘웃음 유발 미디어’에 대한 이야기겠다.
한때 만화의 전통적인 재미는 창자가 뒤집어지고 뼛속까지 울리도록 웃음을 유발하는 것이었다. 만화는 명랑한 것이고 만화보기는 명랑생활을 위한 기초노선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만화는 극화라는 이름으로 그림표현을 고도화 했다. 상당히 심각해진 만화 속의 주인공들은 가끔씩 ‘보통인 이하의 과오와 추악’을 보여주려 하지만 뼛속까지 울리지는 못했다. 물론 <르브바하프…>의 신예작가 김민희가 등장하기 전까지의 이야기이다.
이 작품은 패망한 왕국의 막내왕자와 시녀 그리고 늙은 사상가가 제목처럼 왕국 재건을 이루는 일종의 ‘역사 로망 판타지’ 장르의 작품이다. 그러나 당장 먹고 살길이 없는 이들의 여행은 ‘지지리 궁상 로망’이고 왕자 폼 잡기 외에 할줄 아는 것이 없는 의지박약형 주인공 덕에 ‘노브레인 판타지’가 됐다. 김민희는 칸칸마다 왕자 시녀 사상가의 ‘과오와 추악’을 매설하고 독자를 기다렸다가 타이밍을 맞춰 폭파시켰다. 럭셔리 한 무도회장에서 군무를 하듯 ‘까딱 춤’만 쳐대고 있는 순정잡지의 주인공들이 과연 이들을 흉내나 낼 수 있을까. 김민희와 그녀의 주인공들은 올해를 웃길 만화계의 ‘동숭동 시스터즈’ 쯤 될 것 같다.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an.com)
쎄씨, 2004-01-15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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