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환, [이 만화를 발견하다] 김태형의 레드블러드, 한국일보, 2007.3.17


인물묘사 발군 전쟁서사극

신화·SF·영웅·역사 등 작가취향 버무림 탁월


4, 5년 전부터 일본 만화계에서는 ‘재능 있는 신인 만화가들이 게임 쪽으로 진로를 바꾸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세계 만화시장의 새로운 질서를 구축한 일본이었기에 당시 이 소식을 전한 쪽도, 이를 받아들였던 이들도 ‘젊은 친구들이 당장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져서…’라는 반응이었다. 

세계 최대 규모의 만화시장을 보유했다는 자신감도 있었겠으나 그 이면에는 만화의 형식으로만 표현되고 과장할 수 있는 풍부한 상상의 세계를 컴퓨터가 흉내낼 수 없을 것이라는 믿음도 있었다. 

더군다나 이 컴퓨터라는 것이 사무실 노동자의 업무 도구일 뿐 즐거움을 제공해주는 놀이 도구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업무와 놀이가 의자에 앉아서 손가락 까닥이며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는 동일한 모양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쉬운데 그 때는 오죽했을까. 

우리 만화계에서는 2000년을 전후해서 게임업계로 자리를 옮긴 젊은 만화가들이 등장했다. ‘리니지’의 신일숙이 중견작가를 대표한다면 ‘라그나로크’의 이명진은 젊은 작가를 대표하는 성공 신화이고, 이를 준비하는 이들도 여럿이다. 1992년 ‘통제구역’으로 데뷔해서 코믹액션물 ‘개미맨’(1993)을 거쳐 ‘레드블러드’(1994)라는 색다른 세계관을 제시했던 김태형(33)도 이중 한명이다. 

‘레드블러드’는 한국 만화계를 대표하는 수출상품 중 하나인 판타지 전쟁서사극이다. 우주력 31년 시난과 얀, 스코드가 우주대전 중 호라이 행성이라는 낯선 중세국가로 공간 이동을 한다. 국왕의 쌍둥이 아들 누들스와 젯소스 그리고 이복아들인 판테라가 칼과 마법으로 패권 쟁탈전을 벌이고 있는 틈에 이들 세 명의 SF전사가 참여하면서 ‘붉은 피’로 얼룩진 전쟁서사극이 시작된다. 

이 작품에는 고대 희랍 신화와 동서양의 중세, SF전쟁영화의 서사구조와 동양의 전략전술, 교과서적 세계사와 헤비메탈, 허리우드 스타와 캡콤사의 게임영웅 등의 이미지가 총망라되어 있다. 

작가 스스로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로만 구축한 ‘개인적 취향의 세계’라고 소개한 이 작품은 ‘취향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전쟁사’이기도 하다. 방대한 구조와 다양한 사건에 비해 읽는 맛이 덜하지만 정적인 섬세함이 느껴지는 인물 묘사는 발군이다. 

작가는 탁월한 일러스트 감각 탓에 롤플레잉 PC게임 ‘코룸’ 시리즈를 시작으로 게임업계의 대표 일러스트 작가로 이직했다. 현재는 게임업체 CCR이 막대한 비용을 투자해서 개발 중인 온라인 게임 ‘알에프온라인’의 일러스트 디자이너로 참여하고 있다. 

‘레드블러드’는 전 11권으로 완결됐지만 작가가 3부작으로 구성한 이야기 중 두번째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말한 것처럼 아직 많은 이야기가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이 게임이 얼마나 성공하면 또는 만화계가 어떻게 변하면 김태형이 돌아올까. 아니 어떻게 하면 아직 남아있는 젊은 작가들의 이직을 막을 수 있을까.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한국일보, 2003-12-23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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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환(만화평론가, 한국영상대 만화콘텐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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