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환, 권가야의 해와 달, 한국일보, 2003.11.11


강호엔 오직 지존만 있을뿐…, 무림 고수의 고뇌 담은 `당대 최고 데뷔작` 평가


매년 펼쳐지는 국민적 이벤트 가운데 수능시험이 포함돼 있어 저마다 한마디씩 거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중 ‘이건 참 아닌데?’라고 생각되는 부분이 입시학원 담당자에게 시험문제의 난이도를 묻는 대목이다. 수능시험 뒷얘기 어디에도 학교 선생님은 없다. 

자식을 끌어안고 우는 어머니는 있어도 아버지는 없다. 미스코리아에 뽑힌 여성이 “00미용실 원장님 감사 합니다”를 외치듯, 학교 밖에서 시험 준비를 한 우리 학생들과 어머님들은 “00족집게학원 선생님 감사 합니다”를 외칠 것 같다. 선생님과 아버지는 왜 이 이벤트에 초대 받지 못하는 걸까? 


권가야(37)가 그랬다. 아동 만화잡지 ‘아이큐점프’에 제목부터 철학적인 무협만화 ‘해와 달’(1995년 작)을 연재할 때. 주인공 백일홍의 입을 빌려 “아버지는 나보다 모든 것이 뛰어나요! 그렇지만 그 뛰어난 아버지의 모든 것들이 저에게는 전혀 감동적이지 못해요”라고 외친다. 

백일홍은 전설적 자객 백비의 아들이고, 백비는 백일홍에게 천하 제일의 무술을 전수한 선생이기도 했다. 백일홍이 살고 있는 무협의 세계는 하루를 살면 하루의 문제가 출제되는 곳이다. 세상에서 강하다는 놈이 세상에서 진짜 강하다는 놈을 처단하기 위해 찾아오는 곳이고, 강한 문제를 풀고 나면 더 강한 문제가 출제되는 곳이다. 


백일홍은 이 세계에서 이탈하고 싶었고 백비의 가르침으로부터도 벗어나고 싶었다. 벗어나기 위해서는 백비로부터 완전한 가르침을 받고 ‘천하제일’이라는 왕권을 수탈해야 했다. 이는 곧 백비 제거→왕권 수탈→왕위 보존을 위한 끝없는 싸움을 의미한다. 벗어나고 싶은 세상의 순환구조에 참여한다는 것을 뜻한다. 

백일홍은 작품이 시작될 때 무명객이었으나 이미 아버지와 선생의 권위를 빼앗은 뒤였다. 이 작품은 주인공이 아버지와 선생이라는 체제를 부정하고 신체제를 요구했지만 누구도 체제의 무덤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백일홍은 살풍경한 무림을 배경으로 스스로 실추시킨 아버지와 선생의 권위를 복원하기 위해 그토록 몸부림친 것이다. 


백비가 선생으로서 백일홍에게 가르친 것은 시험에 들지 않는 것,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 아니었을까. 매번 시험과 싸우는 것을 가르치는 학원선생과는 달랐을 것이다. 백비가 아비로서 전한 사랑은 ‘너는 나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 세상에 다른 길은 없다’는 서글픈 인식이었을 것이다. 

연재 당시 냉담했던 시장은 이 작품을 ‘그림 실력 뛰어난 만화초보자가 무협을 재료로 풀어낸 넋두리’ 정도로 폄하했다. 연재는 뒷이야기로 이어지지 못했고 반쪽짜리 작품으로 완결됐다. 그러나 전설은 잊혀질까 두려워 전해지는 것 아닌가. 무협소설과 만화 마니아들 사이에 이 작품은 ‘한국만화사 최고의 데뷔작’으로 여겨지고 있다. 권가야는 이 작품 이후 발표한 `남자이야기`로 ‘오늘의 우리 만화상’과 ‘대한민국 출판만화대상 저작상’을 받았다.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 www.parkseokhwan.com)


한국일보, 2003-11-11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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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평론가 박석환 홈페이지. 만화 이론과 비평, 웹툰 리뷰, 인터뷰, 보도자료 등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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