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영(1955년생)은 1986년 당대의 월간 성인만화전문지 <<만화광장>>에 단편작품을 발표하며 데뷔했다.
데뷔 20년 경력의 30대 작가가 즐비한 만화계의 상황에 비춰본다면 늦깍이 데뷔생이고 중견작가의 경륜을 헤아리기도 어려운 셈이다. 그럼에도 오세영은 <부자의 그림일기> 등의 작품으로 ‘80년대 리얼리즘 만화가 구축한 성과를 완숙하게 활용하고 있는 이’로 평가 받고 있으며 1999년 <중단편 만화문학관>으로 문화관광부가 수여하는 대한민국만화대상을 수상한 우리만화계의 선배로 꼽히고 있다. 그의 작품을 대표하는 키워드는 크게 두 가지 측면으로 볼 수 있다. 그 첫 번째가 10여년의 삽화가 경력을 통해 구축한 탄탄한 인물묘사력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만화적이기보다는 문학적이어서 색다르게 여겨지는 서술방식과 사회성이 강한 소재선정에 있다.
오세영은 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72년 활극만화가로 유명했던 오명천의 문하로 만화계에 입문했다.
당시 특출 난 데생력과 펜터치로 일가를 이루고 있던 오명천은 이른바 공장식 만화창작의 초기 형식을 구축했던 작가로 기록되고 있다. 오명천 문하생 출신 만화가인 박봉성 등이 이 같은 제작 형식을 더욱 강화시켜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한 것과 달리 오세영은 이에 회의를 느껴 만화계를 떠났었다. 당대의 인기작가, 즉 대중이 좋아하는 만화를 잘 그렸던 스승을 떠나 10여 년간 오세영이 했던 작업은 극장 간판 제작 등의 일과 삽화가로서의 활동이다. 이는 ‘만화계에서 오세영만큼 정확한 데생과 인물묘사를 구사하는 작가는 매우 드문 편이다’라는 평을 설명해준다.
데뷔작 발표이후 오세영을 만화계에 각인시킨 계기가 된 작품은 <<주간만화>>에 연재했던 ‘인생극장 시리즈’와 ‘월북작가 단편순례’였다.
80년대는 다양한 장르의 대중문화가 큰 폭으로 발전했던 시기였고 만화도 걸출한 스타 작가를 출현시키며 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성인만화의 장르는 신문을 중심으로 한 정치풍자만화와 연애주간지 등을 중심으로 한 성애만화에 국한됐다. 대본소 중심의 공장제 만화창작 형식 내에서는 성인을 주인공으로 한 기업 스포츠 액션 역사 등 다양한 소재의 장르만화가 있었지만 이런 작품들의 상당수가 청소년층을 중심독자로 설정하고 있어서 진정한 의미의 성인만화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 만화문화의 발전과 함께 성인을 대상으로 한 전문만화잡지가 등장했고 창작가와 독자의 성향에도 새로운 흐름이 생겨났다. 고품격 성인만화를 선언했던 잡지는 여전히 정치와 섹스를 주요 소재로 다루고 있었지만 이른바 ‘리얼리즘 만화가’로 분류되며 각광받기 시작한 이희재 박흥용 오세영 등은 사회적인 문제에 집중했다. 일반소시민들과는 별개로 움직이고 있는 정치적 현실과 만화적 판타지를 거부하고 현실 밖에서 잊혀질만한 장면을 단편소설과도 같은 서술방식을 통해 만화화한 것이다.
이희재는 아동만화치고는 현실의 부조리를 매섭게 꼬집은 <악동이>를 작업하면서 간행물윤리위원회의 심의를 피하기 위해 외국작가의 번안소설을 각색해서 발표했다고 한다. 정치적 불안기, 문화적 성숙기에 소설은 되고 만화는 안됐던 소재와 표현이 있었고 이를 극복하는 방안은 소설 자체에 기대는 것 또는 작가의 의식 자체를 남의 것으로 돌리는 것 밖에 없었다. 오세영 만화의 출발도 이런 정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단 오세영은 소설에 기대면서 소설 자체의 독자층을 넓힘과 동시에 만화의 저급성을 개탄하며 떠났던 독자들을 제자리로 돌리는 역할을 함께 수행했다. 또 단순히 기왕의 의식을 빌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소설이 독자의 몫으로 돌렸던 것을 형상화하고 소설에는 없는 만화적 수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또 하나의 문학을 완성하고 전혀 다른 만화세계를 구축했다.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만화규장각, 부천만화정보센터, 2003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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